메인화면으로
"마당놀이엔 풍자와 희극정신이 생명이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마당놀이엔 풍자와 희극정신이 생명이죠"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7/05] 창립 20주년 맞은 극단 미추 대표 손진책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1981년 국내 연극계에는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탄탄한 극과 음악, 춤이 한데 어우러진 무대에서는 신명이 묻어났고 관객들은 배우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풍자와 해학 섞인 대사에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마당놀이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극단 미추가 올해로 창단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군사정권하에 억눌린 분위기를 마당놀이를 통해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해준 극단미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극단미추의 손진책 대표를 초대했습니다.

30년간 무대연출을 해온 그가... 유난히 마당놀이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0여년간 마당놀이가 우리사회에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입니다.

연출가 손진책씨는 1967년 극단 산하 연출부에 입단하면서 연출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한 후 대학부설 민족연극연구소 조교로 근무하다가 1973년부터 우리 전통극 재현을 표방한 극단 민예극장 창단멤버로 활동했습니다. 1981년 마당놀이 허생전을 연극무대로 끌어올린 이후 26차례 마당놀이를 무대에 올리면서 마당놀이를 연극의 새로운 장르로 정착시켜온 주역입니다. 1986년 극단미추를 창단했고 서울 올림픽때는 문화예술축전 한강축제 총감독, 2002 한일월드컵에는 개막식 총지휘를 맡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3 개의 한국백상예술대상, 이해랑 연극상, 허규 예술상 등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하도 바쁘셔서 저희가 지금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와 있습니다. 내일부터 부인 김성녀씨의 모노드라마가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손진책 : 네. 여배우 시리즈에서 한 번 선을 보였는데, 다행히 칭찬도 받고 해서 재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제목이 <벽속의 요정>이라는 뮤지컬 모노드라마라고 알고 있는데요, 어떤 작품입니까?

손진책 : 이 작품은 원래 스페인 내전 당시의 실화입니다. 이념문제로 벽속에서 30년간 숨어 살아갔던 아버지가 있는데, 딸이 벽속에 요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라고 결혼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얘기를 실화로 나온 책이 있는데, 그것을 일본의 후쿠다 요시유키라는 작가가 연극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하로카즈 히노미라는 유명한 여배우가 모노드라마를 해서 대단히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았죠. 원래 후쿠다씨는 지기가 쓴 원작 그대로 해주기를 바랐는데, 사실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우리 민족처럼 절절히 경험한 민족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가 번안하지 않고 그대로 하는 것은 의미없기 때문에 제가 번안을 해서 하겠다고 해서 작가도 승낙을 했고, 우리가 작년 공연할 때 직접 내한해서 공연을 보고 각색이 훌륭하다고,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박인규 : 2시간 10분 동안 김성녀씨가 1인 30역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체력적으로 가능한가요?

손진책 : 한 배우가 장기공연 하기는 무리긴 하죠. 기본적으로 벽속에 있는 남편의 아내 역할도 하고, 아버지의 딸 역할도 하고, 두 역할을 어려서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의 전 생애를 연기하면서, 가족이 만났던 다양한 군상들을 본인이 직접 연기하기 때문에 1인당 30역을 소화했습니다.

박인규 : 부인의 작품을 연출하시려면 약간 좀 껄끄러울 것 같은데 문제는 없었습니까?

손진책 : 워낙 몇십 년을 같이 했기 때문에 모노드라마라고 특별히 다른 건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국의 여배우들이나 연기자들은 모노드라마가 대단한 꿈입니다. 모노드라마를 하면 명배우 반열에 오르는 식의 전례도 있었고 해서 모노드라마를 하길 원했습니다. 사실 제가 82년도에 영국에 연수를 갔다 오면서 '다리오 포'와 '프랑카 라메'라는 두 부부가 만든 <여자의 역할>이라는 모노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대본을 제가 들고 와서 김성녀의 모노드라마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때 생각으로는 내가 연출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한테 의뢰하는 게 낫겠다 해서 오태석씨가 연출하기로 하고 대본까지 만들었어요. 그런데 서로 극단 일정이 바쁘니까 무산되고 자꾸 시간을 끄는 사이에 선배님이 박정자하고 몇 사람 같이 할 테니까 그 대본을 주면 안되겠냐고 해서, 선배님이 말씀하시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시라고. 해서 그때 기회를 놓쳤고, 또 그 뒤 현대백화점에 있던 현대극장이 개관하면서 독일 연출자가 마누엘 루트겐홀스트가 와서 모노드라마를 연습했었어요. 그러다가 막상 공연 직전에 제작자측과의 관계 때문에 무산되고. 그러다 결국 이번에... 그래서 저는 부담을 덜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동안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거든요. 약속을 지킨 거죠.

박인규 : 미추 얘길 해보죠. 미추가 창단된 지 올해로 만 20주년인데 그 동안 끌어오시면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손진책 : 창단 때부터 저희들은 그 당시 한국에 적은 인력에 비해서 극단이 너무 많다는 데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극단을 만든다는 건 굉장히 나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게 했어요. 민예를 만들어서 대표까지 하다가 그만 두면서 그렇게 빨리 극단을 만들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는데, 어쨌든 이 시대에 다시 극단이 생긴다면 뭔가 생길 필요가 있는 극단이 돼야 한다. 그 많은 중에 또 하나가 돼서 아무 의미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작은 목표는제가 평생의 화두로 삼은 한국의 독자적인 민족의 연극기호를 만들겠다는 것. 그런 결심 속에서 정말로 나와 정말로 결사동맹이 되듯이 굳은 심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자고 해서 창단된 것이 미추의 86년 창단인데, 20년을 돌이켜 보고 나니까 나름대로 저희가 완성도 있는 연극을 고집하고 한국 연극의 새로운 기호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만, 어쨌든 운영이라든가 하는 면에서 미진한 저를 믿고 따라온 단원들에게 새삼 고맙고..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미추라는 극단의 이름을 도올 김용옥 교수가 지어줬다던데 맞습니까?

손진책 : 네. 그 당시 사실 극단이 없으면 공연을 못했어요. 공연을 하려면 극단 등록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곧바로 등록을 하기 위해서 작명을 했는데, 도올한테 당신이 좋은 이름을 한 번 찾아보라고 했더니 어느 날 아침에 새벽같이 전화를 했어요. 자기가 아침에 화장실에 앉아서 좋은 생각이 났다. 뭐냐고 하니까 미추라고 해서, 듣는 순간에 딱 여러 가지로 맘에 들더라구요.

박인규 : 미추라는 건 아름답고 추하고. 그 뜻인가요?

손진책 : '아름다울 미'자 '추할 추'자입니다. 이 극단 이름에 대해서 특히 외국 사람들이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갖고 의미있는 이름이라고 얘길 하는데, 사실 노자 말씀도 큰 아름다움에는 꼭 추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미추라는 것이 윤리적인 개념의 미는 좋고 추는 나쁘다는 개념이 아니라 심미적인 개념에서의 미추를... 글자 자체의 의미도 있고. 도올의 작명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역시 화장실이 사색의 공간이군요. 미추가 창단된 건 86년이지만 손대표께서 마당놀이를 선보인 건 그보다 5년 전인 81년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허생전이라는 작품으로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게 되셨나요?

손진책 : 그 당시 저는 민예에 있었기 때문에 민예에서 그런 작업을 했었고 80년도에도 이미 창포각시전이라고 해서 문화체육관에서 마당놀이 형태의 공연을 허규 선생님 모시고 공동창작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개인 극단이 하기는 굉장히 무리다. 비용도 그렇고 대외에 알리는 것도. 그때 마침 여의도 마당에서 국풍이 있었거든요. 관제의 그런 축제가 있었는데,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가 하나 만들자.. 그 당시 문화방송 창사 21주년 기념으로 이런 행사를 하자고 저희가 제안했습니다. 그때 선배작가인 김지일 형하고, 제작하시는 이영윤씨 같은 분들과. 그럼 뭐라고 이름을 붙일 것인가.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니고. 그래서 그때 마당놀이로 하자. 그 형은 모둠놀이도 좋겠다. 그때 당시 마당극이라고 하면 꼭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것처럼 뭔가 서로 조합이 잘 안 되는 것 같고, 마당굿이라고 하면 종교계에서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고 해서 마당놀이라고 만들었는데, 마당놀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제 나름대로의 의미는, 자꾸 복고적인 것 북치고 장구치고 멍석 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제 철학은 마당은 일상을 딛고 있는 땅이 마당이다. 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마당이다. 그리고 놀이라는 것은, 연극이 영어로 play고 play를 번역하면 놀이인데, 연극의 어원이 일본, 중국, 독일 등에서 다 놀이라는 거거든요. 가장 원초적인 우리의 연극. 마당놀이라는 건 지금 여기 인간다운 삶을 창출하기 위해서 하는 가장 우리다운 연극이거든요.

박인규 : 그 당시의 국풍을 말씀하셨는데 국풍행사와는 관계가 없는 행사였죠?

손진책 : 국풍이라는 것에 저희는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사회 풍자적이고 정치풍자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처음 할 때 사람들이 이 당시 어떻게 이런 작품이 가능하냐 할 정도로 굉장히 안티적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정동에 있는 문화체육관에서 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몰렸다고 들었습니다.

손진책 : 사실은 만든 저희도 놀라고 구경 오신 관객도 놀라고 경찰도 놀라고.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열렬할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올 수 있을까.

박인규 : 81년도면 5공 군사정권의 서슬이 가장 시퍼럴 때였는데 혹시 잡혀가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손진책 : 대중이 많이 모이는 것 자체에도 굉장히 민감할 땐데, 정동체육관 앞에 전경들이 쫙 깔렸었죠.

박인규 : 상당히 안티적이라는 표현까지 쓰셨는데, 그런 걸 보고 당국에서 제제를 가하진 않았습니까?

손진책 : 나름대로 검열은 받아야죠. 그걸 행간으로 읽게 하고...

박인규 : 뭔가 문제는 있는데 딱히 잡을 수는 없도록.. 그 이후로 마당놀이라는 게 상당히 보편적인 우리의 것처럼 돼서 해마다 공연을 하고 있는데, 요즘 보면서 본래 만들었을 때의 사회적 카타르시스, 풍자. 요즘 되고 있는 마당놀이가 더 나아졌다고 할지 변질됐다고 할지.. 어떻게 보십니까?

손진책 : 마당놀이가 그 당시만 해도 고유명사였지만 일반명사가 된 거거든요. 그때는 저희만 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마당놀이를 하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고. 마당놀이가 그간 윤문식씨 등의 인기와 함께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인기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자꾸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부분도 많았어요. 그렇다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마당놀이의 기본적인 성격을 가지라는 게 제 생각이었는데, 무조건 웃기면 된다는 식으로 저질스런 공연같은 분위기도 있었고 약간 음담패설 쪽으로 흐르기도 했고, 애꿎게 관객을 골탕먹여서 웃음을 유도하는 식의 좀 적절치 않은 놀이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마당놀이라든가 우리 전통연극의 기본정신은 희극정신입니다. 유머, 풍자, 해학인데 그것이 미래를 보는 낙천성에서.. 고통을 웃음으로 초극하는 정신인데 웃음으로 퇴폐적이고 소비적인 쪽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니거든요. 기본정신이 좀 잘 지켜지는 마당놀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창단 20주년을 맞은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얘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해보죠.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20년 동안의 발전상이랄까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긴 어렵겠지만.. 어떻습니까? 초창기 멤버에서 극단에 소속된 인원으로 따지면 초창기 몇 명으로 시작해서 지금 몇 명이나 됐나요?

손진책 : 초창기에는 제가 민예를 두고 창단했기 때문에, 민예에서 저를 따라서 미추로 오겠다는 사람들을 제가 다 고맙지만 그럴 순 없다고 했고. 몇 사람 갖고 시작하고 새로운 동지를 만들었죠. 저희 극단은 그 당시는 미추 연극 아카데미라고 해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지금 한 20기 정도 되는데 매년 교육을 통해 배출하고, 그 배출된 배우가 미추의 자산이 됐죠.

박인규 : 미추 아카데미 말씀하셨는데 경기도 어딘가에다가 미추산방이라고 해서 학교도 하고 연극도 하는 장소를 갖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손진책 : 대학로에 있을 때는 미추 아카데미라고 해서 좁은 극단 연습실에서 교육을 했습니다만, 미추산방이라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미추 연극학교를 만들었죠. 1년 코스로 해서 거의 스파르타교육이라고 사람들이 얘기할 정도로 1년이기 때문에 강훈을 시키고. 그런 교육을 받은 배우들이 극단에서 많이 활동합니다만 기본 역량은 아주 훌륭하다는 얘길 듣죠. 그만큼 미추 연극학교 선생들이 교육을 잘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지금 미추에 있는 배우들은 거의 다 미추 연극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손진책 : 거의 다 미추 연극학교 출신입니다.

박인규 : 손진책 대표께서는 1967년부터 연극을 하셨으니까 한 40년 가까이 해오셨는데요,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연극을 하고자 하는 배우들의 수준이나 연극에 대한 사회적 태도, 사회의 지원 등에 많은 차이나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얼마나 달라졌다고 보십니까?

손진책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40년이 지났으니까 물론 변화는 많이 이뤄졌고. 또 여러 가지로 발전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겨뤄도 될 작품들이 나오고 있고, 그렇지만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가내수공업적이기도 하고 영원히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에 경제적, 정책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거든요. 외국의 경우도 전 극장을 매진시키고도 반 이상을 정부에서 지원받아야 연극이 가능하듯이. 문화 인프라로서 연극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런 발전이 있으면서도 실제 연극을 제작하는 데 어려움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박인규 : 경제는 상당히 발전했는데 연극에 대한 지원은 그 만큼 발전이 안 된 모양이군요.

손진책 :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문화마인드는 그렇게 발전을 못했는지....

박인규 : 사실 연극이라는 건 아무리 좋아도 영화처럼 복제해서 풀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97.3MHz)'

손진책 : 복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카피가 안 되는 것이 연극이기 때문에 자생력이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연극도 자꾸 경제논리에 놓거든요. 한쪽에는 문화진흥정책이 있으면서 그것이 경제논리로 하나같이 도움을 받기 때문에 한쪽은 문화말살정책을 같이 펴고 있는 겁니다.

박인규 : 지금 문광부 장관 하시는 분이 연극도 하시고 해서 잘 하시지 않을까요?

손진책 :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잘 하리라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손진책 대표가 고향이 경상도시죠?

손진책 : 경북 영주입니다.

박인규 : 경북 영주면 상당히 양반 동네고, 8남매 중 장남이신데 예전에 연극이라고 하면 광대, 심지어 딴따라라고 해서 상당히 좋은 직업으로 안 쳤거든요. 연극을 하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상당히 반대가 심했을 것 같아요.

손진책 : 저희 지역이 또 그런 성향이 강해서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씩 극단 생활만 하고 집에 안 들어가기도 하고..

박인규 : 처음에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 어떻게 하신 건가요?

손진책 : 처음에는 제가 연극연출가가 된다는 생각은 못했고. 제가 문학과 음악, 미술, 무용을 좋아하고 예술 다방면이 다 좋아서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떤 책을 읽으니까 연극이 종합예술이다. 아, 그럼 연극을 하면 좋아하는 것과 다 가까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해서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때도 연극을 하면 교수가 되든가 학자가 되든가 이러려니 생각하고 했는데, 그 당시 내가 연기는 재주가 없단 생각이 들었고 할 용기도 없었고. 그래서 연기 아니면 연출 둘 줄 하난데. 연출을 해야 되는 쪽으로 선택했으니까 워크샵 발표를 해야 되는데 발표하면 잘 했다고 하니까 정말 잘 한줄 알고 자꾸 하다 보니까..

박인규 : 제 기억으론 60년대 말, 70년대에는 부조리극이다 뭐다 해서 '고도를 기다리며'라든가 '대머리 여가수'라든가 서구극들이 굉장히 첨단인 것처럼 비춰지던 시대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당시 전통극 쪽에 관심을 가지신 건 상당히 이례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손진책 : 그렇죠. 당시에는 번역극 일색이었고 전통극이라고 하면 감각 떨어지는 사람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저도 역시 처음에는 서양연극으로 시작했습니다만, 제가 그때 클래식 광이었는데 클래식 음악을 듣다 음악감상실에서 하루에 한두 번 국악을 틀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는 담배 피우는 시간이었는데, 어느날 한 번 들어봤더니 거기도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국악을 듣기 시작하고, 그러면 서양음악이 있고 국악이 있으면 서양연극이 있고 우리 연극도 있지 않겠느냐. 우리 연극이 뭔가 찾아보자 해서 시작한 게 민속극이고 이것을 평생의 화두로 삼은 계기가 된 것이 국악을 알고부터죠.

박인규 : 부인 되시는 김성녀씨도 남편 못지 않게 유명하신 배우지만 자제분들도 전부 예술계통에서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개를 좀 해주시죠.

손진책 : 아들 딸 하나씩 있는데, 딸 지원이가 어릴 때부터 연극배우가 꿈이었고 연극과를 나와서 서울에서 데뷔해서 뮤지컬 주역도 하다가 엄마 아빠의 후광을 벗어나겠다고 해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거기서 공부를 하고 지금 미스사이공 투어 공연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어디선가 보니까 김성녀씨도 선대가 연출가와 배우 부부시고, 손진책 대표도 연출가와 배우 커플이신데, 따님이 지금 배우기 때문에 연출가 사위를 얻으면 3대가 연출가, 배우 커플이 나온다고.. 혹시 그런 계획이 있습니까?

손진책 : 인연이란 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박인규 : 앞으로 한국적 연극을 계속 만들어 가시겠지만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계획이 있으시다면 마무리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손진책 : 저희의 작업 목표는 일관되게 우리 연극 찾기에 매진할 거고, 저희가 미추산방 보금자리를 갖고 있지만 서울시내에 전속극장이 하나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미추산방의 극장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극장을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고. 재원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면 미추 연극학교를 본격적인 연극교육기관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고. 지금 미추 관현악단을 운영합니다만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연희적인 개념의 악단을 키우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박인규 : 하실 일이 아주 많으시군요. 한국적 연극을 만들겠다는 노력이 30년 남짓 됐는데, 앞으로도 계속 한국적 연극, 정말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적 연극을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손진책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