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자신이 북한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 1978년 군산 선유도 앞바다에서 일련의 헤프닝 속에 북한 선박에 의해 구조된 후 입북하게 됐고 "점차 북측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굳어진 마음도 풀어지고 북한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 북에 남게 됐다고 밝혔다.
"메구미, 94년 4월 13일 자살…일본 주장 졸렬하다"
김 씨는 이날 금강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산 사람을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는 나와 메구미에 대한 모욕으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메구미 씨의 사망 경위와 관련해 "결혼 전부터 병적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딸 은경의) 출산 후 좀 더 악화됐고, 우울증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나타나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했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우울증이 상당히 호전됐다고 봤는데 호전됐을 때 자살 시도가 많다고 들었다"면서 "여러번 그런 시도가 있었고, 구체적인 방법은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결국은 병원에 가서 자살한 것으로 됐다"고 전했다.
그는 "메구미 문제는 이것이 전부인데 일본 정부가 나의 말을 잘 믿지 않고 자꾸 딴소리를 하면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면서 "2004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 관계자를 만나 구체적으로 (사명경위를) 설명해 줬다"고 덧붙였다.
그는 "(메구미의) 유골도 넘겨줬고, 일본은 유골을 받으면서 '나에게 직접 받았다' '메구미 부모에게 전달하겠다' '공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자필 확인서도 남겼지만 그후 일본은 유골을 여기저기 나눠주면서 감정놀음까지 하며 졸렬하고 유치한 주장을 펼쳤다"고 비난했다.
그는 메구미와의 만남 과정에 대해 "사업상 특수부문에서 필요해서 일본어를 메구미에게 80년대 초에 배웠고, 메구미에게서 일어를 배우면서 이성적으로 가까워져 결혼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료로 공부할 수 있어 북에 남아"
'입북' 경위와 관련해 김 씨는 고교 1하견 재학중이던 지난 1978년 8월 5일 선유도 해수욕장에 놀려갔다가 일련의 해프닝 속에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해수욕장 인근에 있던 나무쪽배를 탔다가 망망대해로 흘러간 뒤 북측 선박의 구조를 받아 북으로 가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함께 놀러갔던 여자친구들에게 빌려준 녹음기를 찾아오라며 폭력배 같은 선배로부터 폭행을 당한 뒤 "일시적으로 몸을 피하자는 생각에 바닷가의 조그만 나무쪽배에 숨었다"고 사건의 발단을 전했다.
그는 이어 "안심이 되지 않아 배를 약간 (바닷가에서) 뺀 뒤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섬은 보이지 않고 해수욕장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면서 "섬으로 가기 위해 판자로 배를 몰았지만 아무리 봐도 섬은 보이지 않았고, 날이 밝아오자 망망대해였다"고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그러던 차에 멀지 않은 곳에서 배를 발견해 구원을 요청했다"면서 "그 배에 올라가서 일단 (섬으로) 가기는 힘드니 자기들이 있는 데로 가고 나중에 (집으로) 가면 어떠냐는 말에 배를 타고 갔더니 후에 알고 보니 배는 북측 배였고, 도착한 곳은 남포였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그는 "당시 겁도 나고 걱정도 앞서 처음 며칠간 밥맛도 없었지만 점차 북측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굳어진 마음도 풀어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녀보면서 북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면서 "특히 북에서는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이 들었고, 여기서 공부하고 (고향에) 가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이 계기가 돼 28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현재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 "특수부분, 구체적으로 통일 부문 관련 사업을 보고 있다"면서 "당의 품에 안겨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딸 은경 양은 김일성대에 재학중이며, 아들 철봉 군은 소학교에 다니고, 부인 박춘화 씨는 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장인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끝으로 ▲자신의 말을 정확히 보도해 줄 것 ▲자신과 가정의 문제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이 이용되는 것을 막아줄 것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번 상봉결과를 보도해 줄 것 등을 남측 기자단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