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법은 우회적 레토릭을 써서 최선의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생겼다는 얘기로 들을 수도 있었다. 5.16이 헌법과 민주정부를 유린한 군사반란이었음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지만 그 자신의 종전 입장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민주진영과 웬만한 야권 인사들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야권의 반응은 박 후보의 선거전략 상 사과 연설에 대한 또 하나의 전략적 대응이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다간 역풍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 있다.
박 후보는 이날 사과 연설에서"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목도 피해 당사자들만으로 국한시킴으로써 사과의 대상을 크게 축소시켰다. 이 땅에 18년간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비인간적 고문악행과 체제폭력을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사과라면 당연히 포괄적으로 국민과 역사 앞에 머리숙여야 할 일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 직접 피해자들에게는 사과 뿐 아니라 보상대책 등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야권에서 말하는 후속대책이 그것이다.
후속대책 핵심은 국회의 유신헌법 무효화 조치
2013 새 정부 대통령이 과거사에 공식 사과해야
후속대책으로서 중요한 것은 국회의 유신헌법 무효화 조치와 관련 입법이다. 헌법학자들은 이미 유신체제 기간을 '헌법 부재의 시기'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원내에서 여야 간에 격렬한 논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대안으로 2013년 새 정부의 대통령이 반민주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방안이 있다. 대통령이 불미스런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려면 그 만한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 국민적 합의는 선거과정에서 공약으로 내 걸고 지지를 받아 당선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담보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박 후보는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해서 과거사 문제 등을 치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대통합이란 갈등과 대립의 원인 규명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정치적 목적만 강조하는 용어다. 바로 박정희 시대 '국민총화'니 '총력안보' 같은 구호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전체주의 독재정권이 즐겨 쓰는 공작적 어법이다.
박 후보의 사과 연설 중 "증오에서 관용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인 없는 증오나 분열이 어디 있겠는가. 또 과거 없는 오늘과 오늘 없는 미래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율법 같은 것이다. 또 과거를 지워버리려 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려 들다간 바로 역사의 교훈을 거부하는 죄로 역사의 배반에 직면하게 된다는 금언을 명심해야 한다.
박 후보의 사과는 선거전략이었다. 지지율이 계속 고공행진을 하고 대세론이 흔들림 없었다면 과연 사과했을지는 의문이다. 또 사과의 시점을 추석 며칠 전으로 잡은 것도 명절 민심에 영향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는 민심을 건드리는 감성적 레토릭을 심도 있게 구사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를 흉탄에 보내드리고 개인적으로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기도 했다"거나 "국민들께서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특히 50대 이상 장년과 노년 세대의 감성을 크게 자극할 것이다. 영남권은 물론이려니와 어머니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권의 표심을 강력히 결집시킬 것으로 보인다.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략적 계산이 여론조사 지지율 하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박 후보는 지금까지 자신의 높은 지지율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지키기를 걸어 옥쇄하려 했다. 그러다가 지지율이 추락세로 돌아섰고 박근혜 대세론은 가볍게 무너져 내렸다. 연달아 터진 측근 비리와 안철수 후보의 출마도 작용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지지율 하락의 원죄는 그의 역사 왜곡이었다.
▲박근혜 후보가 24일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고 종전에 고수했던 역사왜곡을 수정했다. ⓒ뉴시스 |
5.16은 4.19혁명 바탕한 민주정부 짓밟은 반란
내부 파벌과 권력투쟁도 대의명분 부재를 입증
박 후보의 과거사 발언 중 "5.16은 구국의 혁명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언명은 역사왜곡의 백미였다. 5.16은 4.19혁명에 바탕해서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출세주의와 권력욕, 그리고 육사8기 일부 정치장교들의 장래 불안으로 인한 한탕주의가 결합된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이었다. 5.16 주체세력 내부의 수차에 걸친 권력투쟁으로 인한 이른바 반혁명 사건을 보면 그런 역사 평가가 더욱 명확해진다.
5.16 이후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군정 내각의 구성을 보면 몇 개의 인맥과 파벌로 분류된다. 가장 핵심은 박정희와 그의 직계부대 노릇을 한 김종필 김형욱 옥창호 등의 육사8기 그룹이다. 둘째, 장도영 중심의 서북파(평안도와 황해도 출신)과 그의 측근세력인 박치옥 문재준 등의 육사5기 그룹이 있었다. 셋째는 김동하 김윤근 중심의 해병대 세력과 동북파(함경도 출신)였다.
이 중 박정희와 육사8기는 불평불만이 가장 많았고 처음부터 군사반란을 음모하고 기획한 세력이다. 그러나 반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병력 동원은 장도영과 가까운 육사5기 그룹이 맡았다. 공수단장 박치옥,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전방 5사단장 채명신 등이 모두 5기출신이다. 그리고 해병대 세력과 동북파도 병력동원의 일각을 책임졌다.
이중 5.16 후 권력투쟁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8기 그룹이 주도하고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이 조직한 중앙정보부가 핵심적인 도구 노릇을 했다. 그 후에도 중앙정보부가 정치공작과 통치권 행사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은 것은 초기의 역할에서 성격지워졌다.
최고회의는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두 달도 안 된 7월9일 장도영을 비롯한 송찬호 박치옥 문재준 방자명 등 44명을 반혁명 음모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첫 내부 권력투쟁으로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대부분 병력동원을 맡은 5기출신의 지휘관들로 김종필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그룹이었다. 5기 출신 중 김재춘은 박정희와의 남다른 인연으로 방첩대장을 맡아 중앙정보부와 함께 실세에 속했다.
박정희와 장도영은 처음부터 군정의 성격과 기간, 그리고 쿠데타 집단의 군대 복귀를 두고 생각이 달랐다. 박정희는 김종필 등 육사8기 그룹과 함께 정권장악이 목표였으며 애초에 군대복귀란 그들의 시나리오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장도영은 단기 군정을 거쳐 민정이양을 한 뒤 군대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처음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국방장관, 그리고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직을 내주었다. 그러다가 최고위원은 다른 직책을 겸직할 수 없게 비상조치법을 만들어 장도영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장도영 "6개월~1년 정도로 군정 마무리하고 군 복귀해야"
박정희 "목숨걸고 나섰는데 혁명기간 정해 놓을 수 없어"
5.16 후 한 달 여가 지난 6월 하순 어느날,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 장도영은 집무실에서 비서에게 박정희 부의장에게 면담 의사를 전하라고 지시한다. 전갈을 받은 박정희는 그날 저녁 8시 내각수반 집무실로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인사를 한 뒤 마주 앉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물었다.
"지금 혁명과업 추진이 너무 크게 일을 벌인다는 얘기들이 있는 것 같은데, 들어 보았소? 농어촌 고리채 정리나 부정축재자 처리 같은 일들은 지나치게 근본적이고 과격한 문제에 손대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처음 정하기로는 이런 비상기간을 좀 압축해서 하고 그런 개혁조치도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성과를 낼 수 있게 하자는 것 아니었소?"
장도영은 군사정부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셈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정희는 생각이 달랐다.
"각하, 지금 우리가 하는 혁명과업은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당장 꼭 필요한 과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 장군, 그러면 박 장군은 이 군사혁명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고 있는 거요?"
"지금 우리는 기간 같은 것을 미리 정해놓고 제한적으로 일할 수야 없습니다."
"박 장군, 이 군사혁명이 당초 계획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기간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과업을 선택해서 꼭 필요한 것만 해야 될 것 같은데 …"
"그럼 각하께서는 혁명의 기간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으로는 6개월 정도가 좋을 듯싶소만, 이것이 너무 짧다면 1년 이내에 기본 질서를 잡은 뒤 군정은 마무리하는 게 좋겠소."
여기서 박정희는 장도영과 근본적으로 다른 속내를 드러낸다. 박정희는 비상수단으로 군사혁명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장기적인 집권 구상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포승줄 장도영 군사법정으로 계도한 노태우 방첩대 대위
▲1961년 7월 반혁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전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을 노태우 방첩대 대위가 법정으로 계호해 가고 있다. |
"1년 동안에 무슨 혁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은 정치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으로 봐서는 최소한의 혁명 목표가 단기간에 성취될 것 같지 않습니다."
"박 장군, 그러면 박 장군이 처음에 공약한 조기 민정이양과 혁명장교들의 군 복귀는 어떻게 되는 거요? 이게 그대로 이행하는 거 아니란 말이오?"
두 사람은 5.16 거사를 두고 논쟁할 때처럼 기 싸움을 벌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속셈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이 정권장악과 장기 집권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러면 박 장군은 이 혁명을 한 2년 정도로 생각하는거요?"
"각하, 아까 말씀드린대로 기간을 딱 정해놓고 하기는 어려운 거 같습니다. 어렵게 일을 시작했으니 5년이고 10년이고 혁명과업이 성과를 낼 때까지 해야지, 그냥 중도에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박 장군, 내 역할은 지난 번 겸직 금지를 규정한 비상조치법으로 사실상 끝난 것 같소. 이제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에서 물러나고 육참총장 일에만 전념하겠소."
장도영은 사실상 혼자서 군대복귀 의사를 통보한 셈이었다. 당초 비상조치법을 작성한 김종필 등의 8기그룹은 장도영에게 육참총장직을 내놓게 함으로써 그의 힘의 원천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은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민정이양 후 복귀할 자리인 육참총장직은 고수할 생각이었다. 그는 민정이양이 1년 이내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고 정치에 참여할 의사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 날 밤 대화에 평행선을 그었고 결국 냉랭하게 헤어졌다.
장도영은 7월2일 중앙정보부와 방첩대에 의해 자택에 연금됐다가 반혁명 음모죄로 군사재판에 회보된다. 이때 포승줄로 묶인 장도영을 군사법정으로 계호해 간 방첩대 장교가 바로 내사과장 노태우 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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