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열차시험운행 약속을 파기한 이후, 연일 서해상 충돌방지 문제를 포함한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회피하고 있는 남한 때문에 시험운행이 불발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29일 "미국의 북침전쟁 도발 책동이 극도에 이르고 있고 쌍방의 무력이 서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조건에서 해상경계선을 바로 확정하지 못할 경우 임의의 시각에 제3, 4의 서해 해상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며 "열차시험 운행 도중 돌발적인 충돌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시험운행 취소의 배경을 설명했다.
남북군사회담 북측 대표단 대변인도 28일 "남측이 진정으로 철도·도로 개통에 관심이 있고 그에 따른 군사적 보장대책을 세우려고 한다면 마땅히 서해 해상 충돌방지 문제와 같은 군사적 긴장을 푸는 근본문제에 우선적으로 달라붙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남북장관급 회담 북측 권호웅 단장은 26일 남측 이종석 수석대표에게 전화통지문을 발송해서 "귀측(남측) 군부가 조선반도의 평화보장에서 급선무로 나서는 현안문제 해결을 완전히 외면하고 회피한 데 근본문제가 있다"고 말했었다.
이밖에도 북한은 열차시험운행 취소를 통보했던 24일 전통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의 26일 담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28일 논평 등에서도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문제'로 군사적인 문제를 거론했다.
북한, 철도연결에 따르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안보상 우려에 더 비중
이같은 일련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북한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한은 철도 운행만큼은 경제협력 사안이 아니라 철저히 군사적인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서해상에서의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조치를 합의하는 것이 남북의 안전 보장에서 최우선적 과제이며, 그 문제가 풀려야 열차 운행에 필요한 군사적 안전보장 등 군사적 신뢰구축 논의를 포괄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도 운행에 대한 북한의 이같은 인식은 우리 정부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제협력과 군사적 긴장완화·신뢰구축, 북핵 해결을 남북관계의 3대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우리 정부는 철도·도로 연결 문제를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과 더불어 3대 '경협과제'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철도 연결 사업 자체가 경의선과 동해선을 중국의 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에 연결해 '철의 실크로드'를 만들고, 그를 통해 한반도를 동북아 철도 물류의 기지로 만들겠다는 '경제적' 아이디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물류 통과세 수입, 노후 철도 개선 등 철도 운행이 가져올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이야기하며 북한을 설득해왔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철도 운행을 위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하나의 수단 정도로만 여겨왔다.
그같은 설득과 더불어 정부는 북한이 철도시험운행에 따른 군사적 안전보장을 해주면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누·신발·의류 등 경공업 원자재나 50억원어치의 철도 자재를 지원하겠다는 일종의 '연계 전략'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남북간의 교착을 풀거나 보다 진전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쌀·비료 지원을 지렛대로 사용했던 방식을 열차 운행에서도 적용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철도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 같은 방식이 통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2003년 철도 연결 당시에는 북한도 철도를 경협으로 해석하는 측면이 강했다"면서도 "하지만 미국의 대북 압력이 한층 강화되고 한국과 미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하는 등 안보 불안 요소가 뚜렷한 최근의 상황에서 철도는 군사적인 고려가 우선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따라서 남측에서 아무리 많은 경협 사안을 철도 연결과 바꾸려 한다고 해도, 또 실제로 철도가 아무리 많은 이익을 준다고 해도 군사적인 관점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화가 없는 협력과 교류란 있을 수 없고 전쟁의 위험을 덮어둔 평화정착이란 지뢰밭에서 콩마당질을 하겠다는 식의 어리석은 처사"라는 남북군사회담 북측 대변인의 28일 발언과, 경공업 원자재와 철도 자재를 거론하며 "가소롭다"고 깎아내린 <로동신문>의 29일자 논평은 그의 분석을 뒷받침한다.
"경협과 함께 남북간 군사신뢰구축 진전돼야"
그렇다면 철도 연결에서의 교착은 어떻게 타개될 수 있는가.
또다른 북한 문제 전문가는 "철도가 갖고 있는 안보적인 측면을 우리 정부가 인정하고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군사적 신뢰보장과 긴장완화 문제를 전면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뤄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경제교류를 앞세워 정치·군사적 문제에서의 진전을 꾀하겠다는 과거의 접근법에서 탈피하는 것은 물론, 휴전선에서의 상호 비방 중단이나 서해상 함정 간 '핫라인' 및 육상 통신연락소 가동 등 과거 합의한 초보적인 조치에서 한발 더 나가는 군사적 신뢰구축안을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핵 문제는 이미 국제적인 의제가 됐기 때문에 남북한이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남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외에도 많다"며 "북한도 핵 문제가 아닌 서해 해상경계선을 먼저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 문제를 군사적 신뢰구축의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북측이 서해상 해상경계선을 '근본문제'로 제기한 만큼 우리도 그 문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하고, 그를 통해 철도 연결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 문제로까지 확대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NLL협상' 양보로 비칠까봐 과감한 접근 망설이는 중
물론 우리 정부도 서해상 해상경계선 문제에 대해 과거의 경직된 태도에서 "한 단계 입장을 진전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4차 남북장성급회담(16-18일)에서 북한이 해상 불가침 경계선을 협의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협의를 위한) 문을 열어놨다"며 "이 문제를 포함해 남북기본합의서의 8개 군사 분야를 다 협의하게 된다면 남북관계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의거해 해상 불가침 경계선을 제안했다는 게 중요하다"며 "기본합의서 내용대로 하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이행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같은 접근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보수층에서 이 문제를 '북방한계선(NLL) 포기'로 왜곡해 규정하는 상황을 우려하며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도 적극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북은 내달 3-6일 제주도에서 1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29일 최종 결정했다. 정부는 철도시험운행 취소 후 처음 열리는 남북 당국자간 회의에서 시험운행을 위한 조속한 조치를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공업 원자재 및 철도 자재 지원이 철도 운행을 위한 지렛대일 수 없음이 판명된 지금 시점에서 정부가 이번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고 받으려 할지, 철도에 대한 과거 접근을 고수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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