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는 지난 2월 3일 2006년판 '4개년 국방계획서'(QDR 2006)를 공개했다. 이 'QDR 2006'는 9.11테러사태 이후 미국이 냉전(the Cold War)에 이은 새로운 '장기전(長期戰, the Long War)'에 접어들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적은 핵무기와 재래식 군사력을 가진 공산주의 강대국이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테러조직이다. 이러한 미국의 신국방전략은 부시 대통령이 집권 2기를 맞아 발표한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국가전략에 기초한 것이다.
새로운 국방독트린은 단기전(短期戰) 성격의 '테러와의 전쟁'이 가진 한계를 절감했고 기존 동맹과의 관계뿐 아니라 동맹국 간의 관계악화라는 부작용이 생겨난 데 따른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1기 조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 핵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경제적 고립과 군사적 압박을 통해 단기간에 해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북한의 핵보유 선언만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한·미간의 이견이 심화되고, 북한 급변사태를 둘러싸고 미래 통일한국에 대한 전망이 엇갈려 한미동맹의 공동비전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이처럼 1기 부시 행정부의 단기전에 기초한 전략은 북핵문제의 해결은커녕 사태만 악화시켰으며, 중국의 중재자 역할을 부각시키고 남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만 한껏 높여놓았다. 남북한 관계의 급진전과 한·중관계의 심화, 일본과 한·중 양국의 갈등 양상을 지켜보면서, 부시행정부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반도 및 동북아의 질서재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은 동북아 신안보구상 속에서 북핵문제, 한미동맹, 대만문제 등 지역현안들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9.19 공동성명은 미-중 힘겨루기의 출발점**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구상은 중국과 협력해 '동북아 다자안보협력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자신이 주도하던 동북아 지역질서를 중국과 나눠가지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한미, 미일 쌍무동맹을 바탕으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틀 속에서 중국을 관리하겠다는 의도가 더 강하다.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작년 3월 라이스 국무장관의 한·중·일 3국 순방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제4차 6자회담에서 다자간 논의를 거쳐 마침내 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드러난 새로운 동북아질서는 비핵화된 한반도, 한반도평화체제, 동북아다자안보협력의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공동성명의 합의는 21세기 동북아 신질서에 대한 논의의 종착점이라기보다는 미-중간 힘겨루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중국과 동북아 신질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 포위망 구축을 통해 질서재편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고자 했다. 미일 양국은 '2+2 전략대화'를 통해 대만의 안전을 공통전략목표로 설정했으며(2005.2.19), 이를 뒷받침할 주일미군 재편작업을 정리하는 '중간보고서'(2005.10.29)를 채택했다. 오는 3월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을 국빈 방문해 '신·신안보공동선언'을 발표하면 미일동맹 강화작업이 마무리된다.
***한미FTA는 동맹의 물질적 기초 강화 목표**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한미동맹 관계의 재편과정에서도 나타났다. 한동안 삐걱거리던 한미 관계가 작년 11월 17일 '경주 공동선언'의 발표를 계기로 군사, 외교, 경제 등 전방위 차원에서 밀월관계로 급진전하고 있다. 여기서 양국정상은 외무장관급 전략대화(SCAP)를 정례화하기로 하고, 금년 1월에 가진 첫 전략대화에서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한미군의 이동이 한국인의 의지에 반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안보전략에 전격적으로 합의해준 셈이다.
아울러, 예상을 깨고 일본에 앞서 한미FTA를 추진키로 합의했다. 국내에 크게 반발하는 세력이 있긴 하지만,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던 25개 국 가운데 한국이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근년 들어 정치·경제적인 유대가 중국쪽으로 기울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미국측 의도가 담긴 것이다. 이처럼 동맹의 물질적 기초를 강화함으로써 한미 양국은 지난날의 군사동맹에서 경제·외교·안보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동맹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미국이 한국에 적극적일까? 한때 주한미군사령관을 4성장군에서 3성장군으로 교체하고 주일 미군사령부를 광역사령부(UEy)로 격상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었다. 심지어 미국 내 강경파들은 한미동맹의 해체까지도 의미하는 '합의이혼'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한 미 사령부의 4성장군 체제가 유지되었고, 주한 미 대사에 역대 최고위급으로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거물급 외교관이 부임했다.
2기 부시행정부는 '민주주의 확산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을 '민주주의의 전초기지'(Outpost of Democracy)로 삼으려는 것이다.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라 불렀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미동맹의 물질적 토대를 재구축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초기지의 총지휘관이 바로 버시바우 미 대사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한국주재 대사라기보다는 '한반도 주재대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중국의 대(對)한반도 '경제-안보 분리원칙 변화 예상**
이처럼 미국이 한국·일본과의 동맹관계 강화를 서두르자 중국도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미일 양국이 대만문제에 개입하려하자 '반국가분열법'을 제정해 대만독립 움직임에 무력사용 의지를 밝히는가 하면, 동북아 미군의 재편·강화에 대응해서는 지난해 8월 사상최초로 중·러 합동군사훈련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10월 28~30일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해 양국관계를 종전의 군사협력관계에서 경제·기술·에너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협력관계로 발전시켰다.
금년 1월 10~18일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졌다. 변화의 물살을 타는 동북아정세에 김 위원장도 적극 편승하고 있다. 미국의 금융제재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중국을 방패막이로 삼아 상황을 정면 돌파하고, 6자회담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노림수인 것이다. 중국도 김 위원장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직후인 1월 19일에 있을 한미 전략대화를 견제하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경제-안보 분리원칙'에 따라 남북한을 다뤄 왔던 중국의 한반도 접근방식에 일대 변화가 예상된다.
작년 9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부시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질서재편 시도에 반대하면서 중국을 세계강국으로 인정하고 전략대화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중국과의 전략대화를 거부한 것은 미국이 중국을 대등한 협력파트너로 간주하고 있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확산'의 대상국가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 관련, 오는 4월 미중 정상회담의 귀추가 주목된다.
이와 같이 미국과 중국이 세몰이를 한다고 해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다자안보구도를 끌고 갈 것인가를 놓고 미중 양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힘겨루기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있다. 북핵문제의 해결과 한반도평화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북한정권의 향배와 통일한국의 성격, 나아가 동북아질서의 재편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 조성렬(趙成烈) 박사**
△1958년 서울 출생 △서울공대 졸업, 성균관대 정치학박사 △일본 도쿄대학 및 게이오대학 객원연구원 △저서 『정치대국 일본』, 『주한미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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