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박 선생님의 말씀처럼 근대를 경제적 착취의 피라미드가 들어선 시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과 왕에게 눌려 지내던 보통 사람들의 권리인 인권이 새롭게 발견된 시기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권은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해 자유 · 평등 · 박애의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만들려 했던 프랑스혁명(1789. 7. 14 ~ 1794. 7. 28) 때 처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여 뒤에 발표된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I'homme et du citoyen, 1789. 8. 26)"은 인간해방의 이념으로 자유 · 소유권 · 안전 및 압제에의 저항과 같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결합체로서 국가를 인정하고,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주권재민 · 권력분립 · 법률제정권 등과 같은 시민적 권리들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권은 남성의 전유물이었지, 여성에게는 아직도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 보기. 때로는 백 마디 화려한 수사보다 한 장의 그림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과 알프레드 르 프티의 "두 공화국(1872)"이라는 그림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림 1〉
▲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2005 들라크루아
〈그림 2〉
▲알프레드 르 프티, 〈두 공화국〉, 『방울』(1872), ⓒ『마리안느의 투쟁』(한길사)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삼색기를 흔들며 파리 시민들을 바리케이드로 이끌고 있는 자유의 여신이나, 머리쓰개와 다 떨어진 빗자루를 들고 있는 늙고 뚱뚱한 노파나, 자유를 뜻하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 키가 크고 젊은 여전사나 모두 마리안느(Marianne)라는 이름을 갖고 있더군요.
영국의 침입에 맞서 왕가를 구한 쟌다르크는 실존 인물이었지만, 프랑스의 이곳저곳에서 때론 동상으로 때론 그림으로 마주치는 마리안느는 공화국이라고 하는 정치체제를 상징하는 알레고리(allegory, 諷諭)일 뿐 실존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장총을 든 정장 차림의 부르주아와 풀어 헤친 셔츠에 칼을 치켜든 프롤레타리아의 대조적 모습처럼, 프티의 그림 속 두 계급이 꿈꾼 공화정은 마리안느의 자태마냥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들라크루아는 1830년 구제도(舊制度)로 돌아가려는 샤를 10세에 맞서 싸운 부르주아들의 "7월 혁명"을 높이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마리안느에게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들려주었겠지요. 반면 프티는 1830년의 공화국의 알레고리인 마리안느를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하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는, 늙고 뚱뚱한 하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반면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 공화국은 키가 크고 젊은 역동적인 여전사 마리안느로 묘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상시 한 것 같습니다.
당시의 남성 화가들의 그림에서 마리안느 외에 살아 숨 쉬며 투쟁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해서 당시 프랑스 여성들은 잠들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가난한 푸줏간 집 딸로 태어나 최초의 여권주의자로 거듭 난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1748~1793)는 남성의 인권만을 보장한 인권선언에 격분해 발표한 1791년 "여권선언(La 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u la citoyenne)"에서 남성과 대등한 여성의 권리를 목청 높여 외쳤지요.
특히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연단에도 올라갈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는 선언의 제10조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타자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임을 당당하게 주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진보주의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국민국가의 국민 만들기를 중시하는 부르주아의 우파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넘어선 계급혁명을 설파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좌파도 여성의 권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성중심의 지배구조가 관철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시밭길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즈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꿈꾼 여성 해방의 이상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여권의 옹호(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en)』을 쓴 영국의 메리 월스톤크래프트(Mary Wollstoncraft, 1759~1797)나 1848년 "여성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Sentiments)"를 쓴 미국의 엘리자베스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에게 이어져 "남성의 노예"에서 해방된 주체로서 여성들을 당당히 서게 하였지요.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인형의 집(Et Dukkehjem)』(1879)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는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며 더 이상 현모양처이기를, 더 이상 비(非)국민이 아니기를 거부한 새로운 여성(new women)을 대표합니다.
노라는 말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자기의 인형이라고 부르곤 했고, 내가 내 인형을 갖고 놀듯 나와 놀아주셨죠.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서 당신(남편)의 손으로 넘어왔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의 취향대로 했고 나는 당신과 같은 취향을 가졌죠. 혹은 그런 척했어요. 지금 되돌아보면, 여기서 동냥으로 먹고 사는 거지처럼 살았던 거 같군요. 당신을 위해 재주를 부리면서 살았던 거예요"라고 말이지요.
근대란 역사 무대의 전면에 여성이 남성과 함께 각성한 주체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노라와 같은 신여성들은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고 가장에게 예속되게 하는 가부장제라는 비인간적 억압의 기제에 맞서 인형의 집을 뛰쳐 나왔습니다. 이 땅의 여성들도 서구나 일본보다는 늦었지만, 1890년대에 이미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에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사나이가 벌어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깊은 골방에 갇혀 남의 절제만 받으리요!"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집 부인 300여명이 뜻을 모아 만든 최초의 "여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의 첫 머리입니다. "벙어리, 장님, 귀머거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 · 교육권 · 직업권 갖기를 꿈꾸며 여학교의 설립을 요구했지만, 당시 이 일은 신문에 "놀랍고 신기한"(『황성신문』)일이거나 "희한한"(『제국신문』) 해프닝으로 치부될 정도로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한 세기 전 우리들은 우리 힘으로 여성도 사람대접 받는 근대사회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지요.
일제 하 이 땅의 인텔리 남성들도 양반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을 욕망 해소의 대상으로 탐하거나, 현모양처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남성을 낳고 기르고 시중 드는 종속적 존재로 치부할 뿐이었습니다. "'사랑걸신증'이라는 성적 박테리아가 방방곡곡을 휩쓸어서 인심이 자못 퇴폐한 모양이오. 이에 따라 이혼, 야합이라는 희비극이 날을 따라 도처에 연출되는 모양"이라고 자유연애를 꿈꾸는 신여성에 대해 비아냥거린 염상섭(「감상과 기대」, 『조선문단』, 1925)과 "민족 발달상 또는 가정 개량상 어느 정도 까지는 여자의 인격을 인정함이 유리할 줄로 생각한다. …나는 이론상으로는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나 이해타산상 이를 주장한다"던 이광수(「혼인론」, 『매일신보』, 1917)의 속내를 보면, 당시 여성들이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막는 걸림돌은 일제라는 외부의 적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의 여성들의 어깨는 외세와 식민지 가부장권에 의해 이중으로 짓눌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식민지 여성에게 다가온 근대란 철저하게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림 3〉
▲나혜석, 〈자화상〉(1928),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개화기 이래 식민지시대 이 땅의 남성들은 자신들의 국민국가―부르주아국가건 사회주의 국가건―만들기를 꿈꾸었지만, 이미 국민국가 수립에 성공한 서구나 일본의 남성들에 비해 그들은 과중한 짐을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즉 국민국가 만들기란 과제에 더해 외세 물리치기라는 반제국의 과제 하나가 더 그들의 어깨를 짓누른 것이지요. 1920년대에 들어 우리에게도 노라의 뒤를 따르는 신여성이 등장하였습니다만, 이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서구나 일본의 노라들이 가부장권 무너뜨리기에 집중할 때 이 땅의 여성들은 그것에 더해 국민국가 만들기와 외세 물리치기라는 이중 삼중의 과제를 떠맡아야 했습니다.
나혜석(1896~1948)으로 대표되는 신여성들은 남성이 여성의 몸을 욕망 해소의 도구로 착취하거나, 현모양처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일등 국민"인 민족을 이끌 남성들을 낳고 기르고 돌보는 종속적 존재로 얽어매어 놓으려던 당시에 "남편을 보필하여 아들을 훌륭히 키우는" 현모양처의 족쇄를 풀고 당당히 욕망의 자유와 몸의 주권 찾기와 남성과 동등한 사람 되기에 나섰습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낸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이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을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나혜석, 「인형의 家」, 1921)"
이처럼 남성들의 "인형"이 아닌 당당히 홀로 선 주체로 살고 싶었던 나혜석은 "현부양부(賢父良夫)의 교육법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상적 부인」. 『학지광』, 1914)"이라고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물든 남성들의 여성관에 반격의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녀의 꿈은 욕망의 자유 얻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아! 나는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여하튼 나가볼 욕심"이니 동포 여성들도 "사람 될 욕심" "서양의 학문을 소화해 조선화 시킬 욕심", 그리고 "자손의 미래를 위해 사업가가 될 욕심"을 품으라고 목청을 높였지요(「잡감(雜感) : K언니에게 줌」, 『학지광』, 1917).
그녀만이 아니라 의사 이영실도 "의사로서 완전한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뚫고 돌진할 각오"로 "여자는 용기가 없고 연구심이 부족하다"는 차별적 인식과 "조선의 가정제도가 여자에게 주는 과중한 질곡"에 굴하지 않고 도전해 나갔으며, 신문기자 김명순(1896~1951)도 "내가 성장하는 나라는 약하고 무식함으로 역사적으로 남에게 이겨본 때가 별로 없었고 늘 강한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겠다. 벗어나야겠다. 남의 나라 처녀가 다섯자를 배우고 노는 동안에 나는 놀지 않고 열두자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음먹었다고 하더군요(「탄실이와 주영이」, 『조선일보』, 1924).
이처럼 식민지라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신여성들은 여성의식과 직업의식, 그리고 민족의식을 갖고 남성 지배 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장애를 넘어 남녀동권 사회 만들기, 외세 쫓아내기, 그리고 국민국가 세우기라는 중첩된 과제 수행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 신여성은 누구일까요? 세계사적 기준, 즉 보편적 기준에서 보자면 신여성은 자기 몸의 주권 찾기에 나선 여성들이겠지요. 그러나 한국사의 특수성은 신여성이라는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범주화 유형화 할지를 놓고 서로 충돌하는 견해들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는 한일 두 나라 여성학자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신여성에 대해 논박한 글들을 모아놓은 『신여성』(문옥표 외, 청년사, 2003)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학계의 신여성 연구에 보이는 시각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여성은 누구인지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합니다. "일제의 식민주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제약 속에서도 민족차별과 성차별에 저항하며 여성운동과 사회 · 경제활동을 펼친 이"(이배용), "해방된 여성 문화를 창조하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평등하게 사회적 의무까지 지겠다던 이"(박용옥), "민족에 눈뜨고 젠더를 의식하고 계급의 해방을 외친 이"(송연옥),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해방되고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 이"(이노우에 가즈에), "중등 이상의 신교육을 받고 개성에 눈뜬 근대적 인간"(이상경), 그리고 "신교육을 받고 저술 활동과 개인적인 삶을 통한 실천에서 근대적인 가족 및 남녀 관계를 추구하고자 한 이"(문옥표)라고 말입니다.
사학 · 인류학 · 문학, 원로와 신진, 그리고 한국과 일본학계, 서로 다른 프리즘에 비친 신여성의 모습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신여성의 모습은 크게 둘인 것 같습니다. 욕망의 자유와 몸의 해방을 꿈꾼 독립된 개인으로 보는 견해(이노우에 가즈에 · 문옥표 · 이상경)와 젠더(gender)의 해방을 꿈꾸는 여성이기에 앞서 민족의 독립과 계급의 해방을 함께 고뇌하는 인간으로 보는 견해(이배용 · 박용옥 · 송연옥)가 그 대척점을 이룹니다.
전자가 입센의 "인형의 집"(1879)의 주인공 노라와 히라츠카 라이초우(1886~1971)와 나혜석을 연장선상에 놓고, 보편으로서 여성의 해방을 논하는 현대 페미니즘의 눈을 갖고, 개인으로 우뚝 선 이들만을 신여성으로 그리고 있다면, 후자는 서구와 일본과 달리 계급과 민족의 질곡에 눈감을 수 없던 식민지 근대를 살아간 조선 여성들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민족과 계급이라는 거대담론에 여성을 종속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노우에는 신여성의 범주를 젠더를 넘어 계급과 민족문제로까지 확대하는 시각에 우려를 표하며, 주체적 여성으로서 각성한 나혜석을 신여성의 표상으로 꼽고 있더군요. 반면 송연옥은 개인으로서 자기실현을 중시한 나혜석 보다 젠더를 계급 문제의 하위에 위치시킨 사회주의자 허정숙에게 높은 평점을 주고 있더군요. 이노우에에게 허정숙은 여성의 해방을 꿈꾼 신여성이기보다 사회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매몰된 사회주의자일 뿐이지만, 송연옥에게 나혜석은 "근대가정의 환상에 빠져" 계급 해방을 생각하지 못한 몽상가로 비칠 뿐입니다.
그때 거기를 산 신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오늘 여기를 사는 이들이 바라는 사회의 내일이 어떠할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일 것입니다.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국민국가의 시대를 맞아 국민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그들은 아직 생기지 않은 나라의 모습을 놓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족독립운동과 민중해방운동. 지난 시절 역사가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을 꿈꾸느냐에 따라 역사책에 다른 이름이 올라갔지요. 그 시대를 산 이들의 머릿속에는 제방에 난 구멍을 고사리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이 땅의 사람들은 민족의 중흥을 위해 살아야만 했지요. 전체의 이름으로 낱낱의 희생을 강요하던 시절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신화일 뿐 아이의 손바닥 하나로 둑에 난 구멍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에 맞서 민중의 이름으로 새 세상을 꿈꾼 이들의 눈에도 개인은 비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없습니다. 그때를 산 여성들은 남성보다 큰 희생을 강요받았지요. 국가권력과 가부장권 두 개의 족쇄가 여성을 속박했습니다. 신사임당과 유관순 열사를 추앙하던 시절, 여성은 민족과 민중의 이름으로 남성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생각과 지향과 이해를 달리 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어야 한다면, 사가(史家)들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연역적으로 만들어진 도식적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타자와 더불어 살기를 이야기하는 시민의 눈으로 본 역사 서술에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나혜석 같이 몸의 주권을 되찾으려 한 이들은 물론, 태평청국의 반청봉기에 참여한 장족 출신 여군이나 주세죽(박헌영의 처)과 허정숙 같이 민중과 계급을 위한 운동에 투신한 이들도 신여성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근대가 독립된 개인의 시대라면, 신여성은 마땅히 개인으로 거듭난 여성들에 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저는 여성 해방을 꿈꾼 나혜석 같은 근대적 인간이 자라나고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에 수탈만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노라와 히라츠카로 상징되는 서구와 일본의 신여성들이 집단으로 여성의 해방을 외칠 수 있었던 데 반해 나혜석과 같은 조선의 신여성은 왜 혼자 맨몸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을까하는 의문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일그러진 식민지 근대에 보이는 발전은 결국 "잘못된 발전"이자 "과잉발전"이었음은 나혜석의 비극적 삶이 웅변한다고 보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현재의 여자는 장래의 어머니"라는 전제하에 여성을 훌륭한 국민을 길러낼 도구로 보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물든 이광수와 이에 반대하는 일본의 신여성운동에 영향을 받아 여성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나혜석의 삶은 합치될 수 없는 기찻길 같이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가부장권과 그 뒤를 받쳐주는 군군주의가 지배하던 일제하에서 주체로서 각성한 삶을 살고자 했던 나혜석의 삶은 이미 실패로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광수와 그녀를 버린 김우영과 최린은 친일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지만, 이혼녀로 탕녀로 손가락질 당하다가 끝내 거리의 행려병자로 숨을 거둔 나혜석은 요즘 시대를 앞서 산 선각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니, 그녀의 삶은 수많은 밀을 키워낸 한 알의 밀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글을 마치는 순간에도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라는 나혜석의 말이 귓가를 맴도는군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의 한 구절처럼, 시대를 앞서 "한 알의 밀"이 되었던 신여성들의 치열한 삶은 진정한 남녀 양성의 평등을 소망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기억이자 삶의 좌표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끝으로 저 역시 박 선생님처럼 레즈비안과 게이 같이 남과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이들도 용인하는 사회가 타자와 더불어 살려하는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여성이 개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꼭 서구의 경우와 같이 가정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양성평등 사회 만들기 과정에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불가역의 발전 과정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남성이나 여성 반쪽만의 사회가 아닌 부부가 서로 존중하며 자녀를 양육하는 건강한 가정은 양성 평등 사회에도 지켜야 할―폐기할 수 없는―가치가 아닐까 하는 작은 생각하나 덧붙여 봅니다.
겨울의 추위를 제법 느끼는 수원의 연구실에서
***도움이 된 책**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나혜석기념사업회.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2001.
모리스 아귈롱 저 · 전수연 역. 『마리안느의 투쟁』. 한길사, 2001.
문옥표 외. 『신여성』. 청년사, 2003.
박용옥. 『한국 여성근대화의 역사적 맥락』. 지식산업사, 2001.
이상경. 『인간으로 살고 싶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한길사, 2000.
이임하.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 서해문집, 2004.
정기문.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 푸른역사, 2004.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 나무, 2000.
태혜숙 외.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여이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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