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되고 있는 독일 총선(9월18일 투표 예정)은'사회 정의'와 '경제적 효율'간의 균형이라는 전세계적인 과제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대량실업과 경제난으로 위기에 몰린 사민당-녹색당 연립정권은 개혁정책의 지속 여부를 국민에게 직접 물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대연정 구성 가능성이 더욱 짙어졌다.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민-기사련과 자민당 간의 이른바'보수 연정' 성립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엠니드와 알렌스바흐 등 독일 유수의 여론 조사기관들조차 총선 결과는 예상과 다를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지난 5월 조기 총선 결정이 있은 뒤 보수 야당의 낙승이 예상되어 온 상황에서 사민당이 대연정의 형태로 정권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기회를 다시 한번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선거 막바지에 독일 유권자들이 다시 사민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민당의 개혁 정책에 독일 국민이 동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른바 적-녹 연정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 능력에 다소 의문을 갖더라도 보수 진영을 선택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다. 보수적인 문화에 대한 독일인들의 정서적 거부인 셈이다. 또 원전의 조기 폐쇄 등 환경 보호 정책에 대해 독일인들이 우호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아울러 지난 4일 총리후보 TV 토론 역시 사민당의 지지율 상승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거 막판 사민당 지지율 상승의 주요 요인은 사민당의 이라크 파병 반대 정책인 것으로 독일 언론들은 분석했다.
그러나 사민당은 대연정을 통해서만 정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힘을 받고 있다. 사민당의 연정 대상으로 떠오른 좌파연합이 정권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봄 조기 총선 결정 당시 슈뢰더 총리는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등장한 정통좌파 라퐁텐과 옛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이 합쳐진 좌파연합이 총선 전까지 당을 신속히 조직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었다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그러나 지난 달 27일 좌파연합은 전당대회를 갖고 복지정책 중심의 정책공약을 발표하면서 집권 연정 구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좌파' 사민당의 위기가 총선 이후 '좌파'연합에 의해 초래되는 아이러니다.
독일과 같은 합의 중심의 사회에서 대연정은 정치적 공방을 중단시키고 균형 잡힌 정부를 구성해 이른바 'good governance'를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슈뢰더 2기 내각의 복지감축 정책인 '아젠다 2010'은 기민-기사련의 정책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민당의 사회개혁 정책은 기민련의 주장을 다소 완화한 형태에 불과해 좌-우 대연정이 성립되면 효율적인 정책입안이 가능하다는 시각이다. 게다가 독일 공영 ARD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의 43%가 대연정을 선호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 유권자들은 대연정을 통해 내수 경기 장기 침체와 같은 이른바 '독일병'이 치유되길 바라고 있다.
사실 독일 유권자들에겐 연립정부가 낯설지 않다. 예컨대 1966년 사민당과 기민당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연정을 구성한 바 있다. 당시 연립정부는 정식 회기를 채우지는 못했다. 또 지난 80년 총선에서는 44.5%를 득표한 기민-기사련이 제1당인데도 42.9%를 얻은 사민당이 10.6%를 획득한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했었다.
따라서 이번 총선은'좌-우 대연정'이라는 정부 형태가 독일식 복지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경제 개혁의 대안을 마련하게 될 것이냐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고용정책과 세금,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 등 주요 국가정책에서 상이한 입장 차이를 보여 온 사민당과 기민-기사련의 연정은 정책 혼선을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민당은 노동자 권리와 환경규제를 유지한 채 세제-실업정책 개혁 등을 근간으로 한 사회개혁을 추진할 방침인 데 반해 기민련은 노동법과 환경규제 등의 조건들을 완화하는 경제해법을 통해 기업 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경제 규모를 키워서 고용을 늘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대한 의견도 다르다. 메르켈 기민련 당수가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단호히 반대하는 반면 슈뢰더 총리는 이를 적극 찬성한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서방세계 편입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 현행 법인세를 낮추고 부가가치세를 인상하겠다는 기민련의 공약은 사민당의 부유세 도입이라는 세제정책 공약과 마찰을 빚을 수 있다.
더군다나 지난 2002년 사민당 재집권 이후 11차례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사민당이 모두 패배한 뒤 몇 년 동안이나 연방 상원에서 '기민련의 법안'만이 통과되어 정책 불균형이 반복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단독정부를 꾸릴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소극적인' 대연정은 향후 대연정 내부의 이견을 조율하는 데에 정치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의 녹색당과의 연정보다 기민련과의 연정이 사민당으로서는 더욱 힘겨울 것으로 전망되는 까닭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7년간의 야당 생활 이후 재집권의 희망에 부푼 기민-기사련에겐 대연정이 실현될 경우 다만 '절반의 출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독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밝힌 앙겔라 메르켈 기민련 소속 총리 후보의 선거공약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셈이다. 또 대연정을 통해 정권에 참여하고 개혁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사민당의 희망 역시 과장된 착각인 것 같다. 대연정으로 각종 정책 현안이 표류되고 책임 정당의 소재도 불명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적-녹 연정 성립 이후 추진되어 온'아젠다 2010'은 정치적 위기에 몰린 슈뢰더 총리의 5월 조기 총선 승부수와 함께 중단됐다. 따라서 좌-우 대연정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독일 사회 개혁의 실제적인 주도권은 사실상 보수 진영으로 넘어간 셈이다.
이에 향후 보수 진영이 사회복지와 자유주의적인 경쟁력을 확충해야 하는 어려운 고비에 처한 독일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어떠한 정치적 해법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가 관심의 초점이다. 지금 독일 국민들은 정치권의 숱한 '아젠다'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성공적으로 종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정파적 대결보다는 효과적인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 정의'와 '효율'이라는 현실적 과제의 해결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목전에 다가온 독일 총선은 세계화의 압박 속에서 국민국가적 개혁정책이 효력을 발휘할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에 일국의 개혁정책이 자본을 통제하고 노동시장을 안정시키며 국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독일은 전세계적 과제이기도 한 사회개혁 성패의 역사적 실험에 돌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난제를 풀어낼만한 명쾌한 대안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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