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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용 '독서이력철'은 국가의 문화적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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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용 '독서이력철'은 국가의 문화적 폭력"

[기자의눈] '책읽기' 강요 앞서 '도서관 인프라'부터 확충을

"시원아, 너는 책을 '왜' 읽는데?"
"그냥 책 속 주인공이 저와 비슷한 상황인 거 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움받을 수 있어요."
"그럼 시원아, 네가 읽은 책을 갖고 문제 만들어 풀게 하면 책읽기가 재미있겠니?"
"미쳤어요? 시험치는 건 강제잖아요. 제가 좋아서 읽는 책인데, 시험 친다면 구속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요."

***당신은 책을 '왜' 읽는가?**

부산의 한 중학교 국어담당 교사인 김은규(29) 씨는 학생들의 책읽기 활동을 입시에 반영하겠다는 교육부 계획에 대한 생각을 묻자, 한 학생과의 짤막한 대화를 소개했다.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나를 향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성찰이죠. 시원이처럼 책 속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반성할 수 있을 때 참된 재미를 느끼는 거에요. 성찰은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받을 수도 없는 가장 자유로운 마음 속 움직임입니다. 그걸 타인에게 보여주고 증명받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그때부터 왜곡은 시작됩니다. 학생들한테 짐을 지워줄 뿐이죠."

사실 책 읽기는 본질적으로 굉장히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목적이 지식 습득이든, 자아 성찰이든, 아니면 단순한 재미 추구이든 스스로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본인이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으로 인한 내밀한 기쁨도, 이에 대한 평가도 읽는 이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책 읽기를 두고 학생들이 너무 책을 안 읽으니 제도적으로 강제해서라도 읽히겠다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후진적인 발상이다. 게다가 독서의 본질에 비춰봤을 때, 효과는 커녕 자칫 책읽기에 대한 오해와 염증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독서이력철 제도, 국가가 자행하는 문화적 폭력"**

지난 8일 (사)어린이도서연구회는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다름 아니라 교육부가 2007년 고등학교 과정부터 도입해 2010년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독서이력철' 제도 때문이다.

<사진 1>

이 제도에 따르면 2007년부터 고교 학생들은 학기 초마다 관심 분야와 도서 목록 등을 담은 독서계획서를 제출하고, 핵심 내용 요약, 독후감, 에세이 등 한 학기 동안의 독서 활동을 기록하는 독서기록장을 작성해야 한다.

독서담당 교사는 독서계획서를 바탕으로 학생을 상담하고 학기 말에는 학생부 '독서활동상황란'에 학생의 독서량, 독서 분야, 독서의 흥미와 지속성, 이해 수준, 책 이름(선택 사항) 등을 기록한다. 독서인증제 등급, 독서행사 수상경력, 독서시험점수도 기록사항에 포함된다.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전국국어교사모임·한국아동문학학회·민족문학작가회의·문화연대 등으로 구성된 '바람직한 독서문화를 위한 시민연대' 또한 지난 2일 이에 대한 성명을 냈다.

"책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은 그대로 둔 채 책 읽기만을 강요하는 것은 옷은 그냥 둔 채 옷 입을 아이의 키를 늘리거나 줄이려는 억지이며, 독서이력철은 기본권 침해이자, 국가가 자행하는 문화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독서활성화를 위해 국가가 할 일은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독서를 위한 물적·인적 토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읽기가 '학습과 평가의 도구'로 쓰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책읽기의 즐거움이 학생들의 괴로운 학습노동으로 바뀔 수 있다는 본질적인 문제제기 외에 평가의 기술적 측면에 관한 우려도 있다. 대독·대행 등 독서 사교육이 조장되고, 독서 부풀리기, 학부모·학생-교사 간의 평가 시비 등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줄어드는 공공도서관의 책 구입 예산**

그러나 이런 요란법석과 상관없이 이 나라의 독서 환경 인프라 구축 노력은 부끄러울 지경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모의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손만 뻗으면 그야말로 '책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공간 마련과 분위기 조성이 책읽기의 제1조건인데도 말이다.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공공도서관이지만 그나마 문화관광부는 지난해 중앙정부가 직접 지원하던 공공도서관 책 구입 예산을 지자체 재량으로 넘겼다.

문제는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던 공공도서관 지원을 포함한 24개 문화사업 예산(356억2800만 원)이 행정자치부의 분권교부세로 바뀌면서 교부액이 전년대비 71%(253억2300만원)로 줄었고, 사업 항목마다 정해져 나오던 돈이 이제는 지자체가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 항목이 되어, 결과는 상당수 지자체의 '공공도서관 책 구입비 삭감'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표 도서관 구입비, 출처: 열린우리당 김재윤 의원실>

문광부가 공공도서관 지원에 '나 몰라라' 하는 동안 교육부는 '입시 반영'이라는 몽둥이를 들고 '학생들이 책 읽나 안 읽나' 감시하겠다고 나선 모양새다. 국가가 이같이 보편적 책임을 지자체에 떠넘김에 따라 지자체장의 판단에 따라 문화적 격차가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겼다.

왜 자꾸 도구화하고 강제하나. 책 읽는 행위도, 학생들의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이 모든 것에 앞서 '책 값'부터 제대로 대고 그 다음에 독서의 방식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들은 그렇게 하라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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