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중인 KBS 새노조가 제작한 <리셋 KBS 뉴스9>을 통해 폭로된 국무총리 공직윤리비서관실의 광범위한 사찰내용 중 일부이다. 구체적 대화내용까지 적시돼 있는 것을 보면 미행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첩보영화처럼 도청장치를 이용하여 대화를 엿들은 것처럼 현장감 있게 묘사돼 있다. '불륜 행각'을 들킨 고위공직자는 두 달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사찰대상자는 대낮에 누군가에 의해 벌거벗겨지고 있다는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2.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 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정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親鞫)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 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로 재판을 받던 때 군법회의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 중 일부이다.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의 딸까지 은밀하게 사찰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두 가지 사례를 수평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첫 번째 사례는 이른바 '민주정부'의 총리실에서 이뤄진 고위공직자에 대한 '감찰 보고'이며, 두 번째 사례는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이 사형당하기 전에 밝힌 '고백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사례 모두 합법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 번째 사례는 법률에 정해진 대로 공직자의 비리를 감시한 '직무감찰 기록'이라기보다는 도청이나 미행 등 불법수단을 동원한 '사찰기록'임이 명백하다. 은밀한 사생활 엿보기를 통한 볼썽사나운 악취미도 드러나 있다. 두 번째 사례는 독재정권 시절 정권안보의 첨병이었던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의 딸까지 은밀하게 뒷조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위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앞서 두 가지 사례를 든 것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 자신도 사찰대상이었다며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에 대한 특검을 도입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KBS새노조가 입수한 사찰문건 2619건 중 80% 정도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의 문건은 대부분 합법적인 경찰의 직무감찰 보고서라고 KBS새노조는 밝혔다.
반면, 이명박 정부 들어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만들어진 2008년 7월 이후에는 민간인과 언론계, 정치권, 호남 출신 공직자 등이 주요 대상이다. 산부인과 의사, 사립학교 이사장, 서울대병원 노조,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등 누가 봐도 민간인임이 명백한 사람과 기관이 포함돼 있다. '촛불 트라우마'에 시달린 이명박 정부가 이 조직을 신설하여 반MB 세력을 솎아내기 위해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주장이 전형적 물타기 수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자유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 자행된 민간인 불법사찰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만행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한다. 독재정권 시절의 민간인 사찰은 중요한 정권보위 수단의 하나였다. 흔히 '남산'으로 일컬어지는 중앙정보부는 정적을 제거하거나 비판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을 일삼았다. 사찰결과를 미끼로 이들을 협박하여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악용했다. 지금도 사찰기록은 '존안자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를 오마주 한 이명박 대통령은 독재정권의 유물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은 것일까. 이명박 정부가 우리 사회를 독재정권 시절로 되돌리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중앙정보부는 독재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불법사찰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정치인과 재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해온 '정치공작'은 악명을 떨쳤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언론사 등 민간기관에 출입처를 두고 정보수집에 나서고 있다. 정보수집 활동이 국가안보에 직결된 사안으로 국한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정원의 정보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자신의 측근을 국정원장에 앉힌 뒤 국정원의 정보를 통치수단으로 악용하던 과거로 회귀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아직 없다.
정치 권력의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은 주로 비선조직을 통해 이뤄졌다. 사찰기관이 정보기관이든, 경찰 조직이든, 이번처럼 정부 공식기관이든 'BH(청와대) 하명'에 따라 이뤄지고 비선라인을 통해 보고돼 정권 비호의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미림팀'은 1997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1888여 명을 도청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미림팀의 감청내용이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에게 보고됐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하명사건 수사를 전담한 곳은 경찰의 '사직동팀'이다. 사직동팀은 야당 정치인의 부인들까지 불법 사찰하고 권력 실세들에게 비선보고를 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 장진수 총리실 주무관(왼쪽)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 비서관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도 'BH 하명'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사찰기관은 국정원이 아닌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다. 사찰대상은 고위공직자가 대부분이지만, 민간인이 다수 포함돼 있다. 공직자에 대한 직무감찰은 법에 허용됐다고 할 수 있지만,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엄연히 불법이다. 그것도 도청이나 미행 등 불법이 저질러지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했을 경우이다. 이명박 정부가 사찰기관을 총리실로 지정한 것은 만에 하나 사찰보고서가 드러나더라도 공직자 비리에 대한 감찰이라고 우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검찰은 이번에 공개된 문건을 입수하여 검토한 뒤 위법사항은 2건에 불과했다고 변명하지 않았던가.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은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목표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 비방 동영상이나 패러디를 인터넷에 올린 김종익 씨와 서울대병원 노조를 사찰한 것이 그렇다. 문건에 등장하는 김유정·남경필·정태근 의원, 이완구 전 충남지사 등도 이명박 정부에 비판의 각을 세웠던 인사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이병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서갑원 전 의원 등 노무현 정부 인사들에 사찰보고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21, KBS, YTN 사장 등 언론계 사찰도 빠지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박근혜 위원장 관련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울 뿐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이 전체의 1%에 불과하다는 추정이 나오는 만큼 전체 문건이 공개된다면 박 위원장 관련부분이 포함돼 있을지도 모른다.
2008년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공식 보고라인은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이강덕 공직기강팀장→정동기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그러나 이영호 전 대통령 고용노사비서관 등 비선라인을 통한 보고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영포라인'이다. 지원관실은 청와대와 국정원, 국세청, 검찰 등에 포진한 영일·포항 출신 인사 73명의 명단을 별도로 작성했다. '영포라인'이 정보수집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상왕'으로 불리던 이상득 의원에 반기를 들어 사찰대상이 됐던 남경필·정태근 의원의 사례는 '영포라인'의 위력을 반증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권력을 사유화했던 김현철 라인을 능가하는 비선라인인 셈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의 몸통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최금락 홍보수석은 "사안에 따라 청와대에 보고한 사안도 있다"고 밝혀, 이 대통령이 불법사찰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민간인 불법사찰 은폐를 연일 폭로하고 있는 장진수 전 주무관은 "민정수석실이 아닌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을 통해 직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아예 "몸통은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새누리당 마저 "(사찰 보고서가) 어디까지 보고되었는지 밝히라"며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총선을 불과 10여 일 앞두고 터진 민간인 불법사찰 파문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특히 정치권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특검 도입'과 '특별수사본부 구성'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민간인 불법사찰은 국기를 흔드는 사건이자,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중대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온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의 거짓말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찰문건을 보고받은 사실이 확인된다면 단순한 거짓말로 넘겨버릴 사안이 아니다. 불법·비리를 넘어 증거인멸 및 사건은폐, 헌법을 훼손한 국사범이 될 수밖에 없다. '하야'를 넘어 '구속'해야 할 사안이다. 누리꾼의 지적대로 이명박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하는 '무상급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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