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제기획원출신으로 DJ정부시절 경제수석-재경부장관을 지냈던 강봉균 의원은 현재의 '김진표 경제팀'을 향해 "정통관료의 품위를 지켜라"라고 질타한 바 있다. 청와대 비서들에게 휘둘리면서 뒷전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경제팀에 대한 질책이었다.
경제관료들에게 가장 따가운 비판이 바로 "정통관료의 품위를 지켜라"라는 말이다. '정통관료'라는 단어처럼 그들에게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말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경제관료들은 예외없이 '정통관료'의 표상으로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을 꼽는다. 그만큼 한국경제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9일은 버마 아웅산 테러로 김재익 경제수석 등 16명이 순국한 지 만 20년이 되는 날이다. 특히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 김재익 수석은 박정희 시대의 정부 주도의 경제운영방식이 한계에 왔음을 절감하고 민간과 시장 주도의 경제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시대의 선각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전두환 군사정권에 봉직한 것을 흠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한국경제의 앞날을 내다본 '경제전략가'로서의 혜안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진정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진통을 겪고 있는 지금, 김재익과 같이 경제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치밀한 전략을 갖춘 경제관료가 아쉽다는 지적이다.
때마침 김재익 수석의 동시대인들이 그를 기리는 20주기 추모기념집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삼성경제연구소 발행)을 펴냈다. 시장경제시대의 경제관료란 어떻해야 하는가를 반추하는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글 중 언론인 손광식씨(프레시안 고문ㆍ전 문화일보 사장)의 '한 경제 전략가에 대한 回想 ―밖에서 본 김재익'을 전재한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필자와 삼성경제연구소 측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1. 관료상(官僚像)**
시대의 표상(表像)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상일수도 있고 기념비적 사건이나 구조물일 수도 있다. 어떻든 시대를 풍미한 흐름을 상징화한다. 이런 각도에서 관료조직도 그 시대의 특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탐구하려고 하는 인물은 70년대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경제관료 사회에 그 모습을 보였다가 홀연히 사라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그 시대의 관료상(官僚像)과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이었다.
대체적으로 당시의 경제관료들은 몇 가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다. 70년대는 개발독재 시대의 전성기였다. 경제성장은 제일의 가치였으며 성과주의가 시대를 지배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표 달성이 평가받던 시대였다. 소신과 박력을 가진 인물이 주목을 받았다. 물론 드물게 대학의 강단으로부터 차출된 관료들도 있었다. 성장의 진폭이 넓어지고 현대화의 길을 가자니 지혜와 논리가 필요했다. 70년대가 깊어질수록 개발독재의 모순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관변 이코노미스트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시류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들도 널리 깔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총합이 경제성장이라는 산물을 산출해내는 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환경의 경직성 때문에 사회적 불안과 불만이 증폭되어 갔다. 한편 개발과 성장은 그 긴장감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적어도 경제관료들 만큼은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있던 경제 성장률과 더불어 더욱 집단적 위치가 상승했다.
특히 관료 엘리트 집단은 사실상 경제쪽이 주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불철주야 뛰면서 정책을 입안하고 강력한 행정 드라이브를 걸어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냈다. 경제 성장률과 더불어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하지만 기업도 은행도 시장도 관이 주도했기 때문에 경제관료 조직은 가히 마피아를 닮아 가는 자기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능률의 반대급부로 부패가 생겨나고 왜곡된 경제회로가 뿌리를 내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지만 ꡐ달리는 성장 열차ꡑ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아직 폭발의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한 것 같지는 않다는 오판도 있었지만, 비판의 여백을 수용하지 않는 독재권력의 위압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재무부 경제기획원 그리고 상공부와 농수산부 등 경제부처를 취재하면서 많은 경제관료들을 만난 경험이 있다.
기자와 관료 하면 숙명적으로 긴장관계다. 피차 필요하지만 경계심이 깔려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정보의 공개는 일신상의 위험을 가져오는 잠재적 요소 때문에 항시 관료들은 보안유지에 철저했다. 반대로 기자는 안 깔려는 정보를 캐내는 것이 직업이다. 더욱이 당시는 사소한 보도들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에 기사거리는 물론 경제관료 개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기란 어려웠다. 그저 유능한 관료라던가 친화력이 있는 관료라던가 정치적 영향력이 큰 관료라던가 인맥과 금맥을 통해 세속적 출세의 길을 탐한다던가 그런 분류를 할 정도였다. 양식도 있고 정의감도 있고 지략이 있는 인물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 경제철학의 빈곤이었다. 이것은 기자와 관료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일 수도 있고 비밀주의를 신봉할 수밖에 없었던 관료들의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은 성장 드라이브만이 시대를 이끈다는 집단의식(集團意識)에 빠져 있었다. 비판은 있어도 미래의 답을 건져내는 데 아무도 열성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여러 경제 사태를 예견한 각료도 있고 사적으로 그에 대한 처방을 예비하려했던 엘리트들도 있었다. 그러나 10․26사건으로 박정희 시대가 끝나기까지 그 예견과 예비들은 지표(地表)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2. 조우(遭遇)**
1970년대 중반 나는 경제기획원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구석진 방에서 김재익(金在益)이라는 경제관료를 만났다. 경제관료라기보다는 경제 전략가와 조우하게 되었다는 편이 보다 사실적일 것 같다. 그는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런 타입의 관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비판에 날을 세우는 이코노미스트도 아니었다. 권위적 자세나 배경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거나 정책에 대한 높은 전문성을 과시하는 그런 타입의 관료도 아니었다. 막말로 승진이 보장되고 있는 그런 인상을 주는 엘리트 관료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어쩌면 당시의 그의 보직인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라는 자리가 그런 통상적 경제관료의 모습으로부터 이탈하게 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의 성격 이상(理想) 성장의 배경이 융합되어 전혀 다른 타입을 보여주게 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런 그의 입지는 그 이후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 같다. 권력과 돈과 인맥으로 얽혀있는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써 그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말의 하나인 '여백(餘白)'을 크게 확보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기자들 사회에 비쳐진 그의 모습은 '찬밥'이었으며 현실적인 뉴스와의 연관도가 낮아 취재 접촉 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도 경제기획원을 출입한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의 방을 우연히 찾게 되었다. 정확히 그때가 어느 계절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웬일인지 그가 추워 보였다. 훤칠한 키에 마른 체구 하얀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지 혹은 그에 대한 선입견(찬밥 대접) 때문인지 혹은 비극적 생애에 대한 어떤 예감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서 추워지는 건 오히려 내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메모지를 내놓고 그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판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0년 이후에나 나타날지 말지 한 정책지도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발 성장 드라이브 속에 메몰 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던 기자에게 형평과 배분이라는 컨셉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서서히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불과 2년 전 사채조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8․3조치)은 뒤집어 보면 바로 위기가 코앞에 닥치고 있다는 신호였다. '부채는 성장'이라는 경제를 지배해 온 원리가 신통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서서히 틀을 바꾸어 가야할 때인데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본문법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조치가 발동되곤 했다. 경제라는 유기체는 이런 조치들에 의해 완전히 그물 속에 갇히게 되었고 어느 곳에도 여유로운 공간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명령경제였다. 무단경제(武斷經濟)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흩어진 에너지를 결집하고 자원배분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방법이 효율적 생산양식으로 빛날 때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발 성장의 나팔 소리를 드높이던 6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가 그랬다. 물론 8.3조치의 배경에는 제1차 오일쇼크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들이닥친 배경이 있다. 국가권력이 전면에 나서는 방법만이 효과적 대응방법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경제관료 사회는 그 문법을 신앙처럼 여겼다.
그런데 김재익이 나를 잡고 설명하는 미래 경제의 기조는 관치경제(官治經濟)로부터의 해방을 대 전제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고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을 뛰어넘은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경제 이념이나 철학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버스와 지하철을 연계하는 대중교통망(20년도 더 뒤에 등장할)에 대한 방대한 구상을 말했다. 이 사람은 이단(異端)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출 생산 재벌 금융지원 물가동결을 말할 때 그는 '대중을 생각하는 경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10년 20년 후 전개될 사이버(cyber) 세계가 내장되어 있었다. 그의 생각들은 구름을 불러 타고 하늘 위에서 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신기루를 보고 있는 듯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경제현상을 통해 그 리얼리티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신통력(神通力)은 어디에서 왔을까. 치열한 사고(思考)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들고 경제이념이 가져다 준 해법일 듯도 싶었다. 그의 이념적 기조는 분명 자본주의이지만 그렇다고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는 가난했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들었다. 어쩌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 같은 면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3. 여백(餘白)**
그와 대화를 할 때 하나의 느낌이 있었다. 그는 전혀 다른 미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현실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 경제가 가는 방향은 국제적으로 이미 평가가 나 있었던 터다. '한 세대 안에 후진국으로 출발하여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나라가 하나 있다면 바로 한국'이라고 IECOK(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총회는 평가했다. 스웨덴의 소시얼리스트인 하칸 헤드버그 기자는 거대한 조선소의 건설을 목격하고는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나라'로 결론 내렸던 자신의 오판을 고백했다. 이미 한국의 생산양식과 성장의 문법은 개발 후진국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와 행정부의 정책과 창구의 관행들이 빈틈없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업 군단을 앞세워 진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뛰놀 공간은 엄청나게 제약되어 있었다.
후미진 구석방에서 곧고 맑은 자세로 앉아 있던 김재익에게는 들어설 공간이 없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의 생각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틈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세계를 그가 원했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정책 캔버스에 마음대로 그리는 시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20년 후에 나타날 징후군에 대처할 구체적 방안들을 말하고는 경제를 먹여 살리게 될 전자 정보 통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나를 놀라게도 했다. 자율화와 개방만이 살길이라는 대 방략을 술술 풀어갔다. 그래서 그랬던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몽상가라고들 말했다.
그는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온 정치학도이면서 코스를 바꾸어 하와이대학을 거쳐 스탠포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소년시절의 꿈은 공학도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여러 차례 목표를 바꾸었다. 뜻한바 있어 기술자가 되려 했다가 다시 정치를 지망했고 그것도 맞지 않아 경제학도로 이리저리 방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물론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적(知的) 섭렵에서 한 가지 발견을 했다. 인생이고 학문이고 주어진 여건에서 얼마든지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다. 그것은 몽상가라 평을 듣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여백의 철학'이다. 그는 이미 망쳐진 캔버스의 그림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여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이것은 김재익이라는 인물을 탐색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듯 싶다.
그가 신군부의 5공 정권에서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이 된 것을 두고 누구도 세속적 출세를 위한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경제수석이 되어 그가 이상을 구체화하여 대통령으로 하여금 집행케 한 일련의 방략들도ꡐ여백의 경제학ꡑ이었다. 정치권력과 관이 틀어쥐고 있던 경제 지배력을 해방시키는 작업이었다. 국제화 자율화 재벌 지원으로부터의 철수는 궁극적으로 시장과 정책 필드에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려했던 생각이 깔려 있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여백을 즐겨했던 것 같다. 방은 잘 정돈되어 있고 장식을 싫어했다고 한다. 눈에 들어오는 불필요한 장애물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약한다. ꡐ여백의 경제학ꡑ도 이런 생활철학의 소산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경제관료 사회에서 그는 확실히 이단아(異端兒)같지 않은 이단아였다. 관료이면서 관료 같지가 않았다. 비전형(非專型)의 관료였다.
***4. 융합(融合)**
불균형과 불균형의 합은 균형일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과 김재익의 만남이 그렇다고 본다. 10․26사건이 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전두환 장군이 부상했다. 그는 지배권력의 후계자도 아니고 준비된 국가 리더도 아니었다. 그가 권력을 잡게 된 계기는 물론 박 대통령의 유고였다. 권력 공백기에 그는 신속하게 '작전'을 감행하여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자유민주주의의 정통성은 회복되지 못했고 무단 정치는 계속 되었다. 국보위라는 국가 조직을 만들어 위기관리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 그러나 소위 '새 시대'를 이끌 소프트웨어는 빈곤했다. 실제로는 그것을 생산해 내야할 인적자원의 빈곤이라 할 수 있다. 신군부 정권은 구 정치 행정 세력권을 비토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라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정권을 잡았지만 정통성도 이념도 국가를 경영해 갈 노하우도 빈곤했다. 오직 국가주의를 토대로 한 생산양식만 상속자산이었다. 개발독재 시대에 비춰보더라도 그 짜임새는 엄청난 불균형 상태였다. 그리하여 지배세력이 물러난 공백을 신속하게 대체할 인적 조직화가 다급했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때 안 묻은 유능한 인물들이 필요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전두환은 그의 막료로부터 어느 은행지점장이 깨끗하고 유능하다는 평이 자자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 은행의 행장으로 발탁하라고 지시했다. 말하자면 새 권력자에게 엄청난 여백이 생겨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김재익은 전두환을 국보위에서 만나게 된다. 전혀 무단정치를 하는 세력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형의 김재익이 그들과 하나의 결합체를 이룬 것이다.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되는 장면은 외형상 확실히 불균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재익은 당시 기획원의 관료생활을 접고 있는 때였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었던 것 같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진로의 수정을 놓고 고민중에 있었다. 1977년부터 조짐을 드러낸 경기의 과열현상 때문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플레 노동문제 부패 등등. 여기다가 장기집권에 따른 내부의 권력암투가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신현확 경제기획원 부총리의 등장을 계기로 안정화 시책과 개방정책이 강도 높게 추진된 것은 경제도 경제려니와 한 단계 올라서 보면 정권 안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기획원의 개방 안정화 그룹의 핵심 가운데 한 사람이 김재익이었다. 그런데 신현확 부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정책 쿠데타가 상공부에서 일어났다. 재계의 응원을 업고 성장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박 대통령이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10․26사건이 일어났다. 안정이냐 성장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흔들리는 대 혼란상태에 들어갔다. 자신의 이상이 현실 정책으로 문을 여는 순간 김재익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보따리를 싸자 사람들은 이제 연구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머리에 가득 찬 방략들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으니 불균형이다. 의욕과 실천의 힘은 넘치는 데 '머리ꡑ가 부족했던 전두환의 불균형이 그를 부르게 되는 것은 필연은 아니지만 자연스런 귀결이다. 전두환은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경제 지략의 여백을 김재익의 머리로 채우고 김재익은 자신에게는 없는 권력이라는 여백에 전두환을 끌어들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상사와 부하라는 단순한 결합이라기보다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인적(人的) 융합(融合)이라 할 수 있다.
부정적 정권에 그가 참여한 행동을 두고 지식인 친구들로부터 김재익은 많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는 정치학도 출신의 경제박사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패권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었을까. 그의 부인 이순자 교수의 회고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 친구가 "김재익이는 김일성이 밑에 가서도 일할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부인은 분하고 억울해서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 무슨 영문이냐고 묻는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김재익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에 내가 김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
그의 부친은 6.25때 공산주의자에게 희생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살부의 원수이다. 적대적 관계를 초월한 것은 다만 그의 인생관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약하다. 그의 생각 속에는 역사관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5. 설득(說得)**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 땅은 바야흐로 난세였다. 10․26 정변으로 난세가 시작되고 확산되었지만 실은 경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폭발점에 이르러 있었다. 외채 인플레 노사갈등 부패 문제가 뒤엉켜 있었다. 어떻게 보면 궁정동의 총소리는 하나의 돌파구를 제공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는 새로운 문법으로 대응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인 신군부 세력이 국가권력을 또다시 장악했다. 태생적 취약점이 있는 권력이기 때문에 경제와 사회적 측면에서 무엇인가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리하여 부정축재에 손을 대고 경제안정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내 놓았다. 무단적(武斷的) 조치로 기존 정치의 틀을 해체할 수 있었지만 왜곡된 경제의 틀을 바로 잡는 신질서의 구축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부족하고 이념체계가 빈곤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는 학생세력은 반(反) 자본주의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공권력 발동 차원 이상의 대응력이 필요했다. 경제 대응책은 기술적 접근이 가능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념이 필요했다. 사실상 정권의 안정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전두환 앞에 김재익이 등장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책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가 숱하게 그려 놓은 그림들은 이념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가 먼저 해야할 일은 대통령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깐 경제교육을 시작했다. 왜 통화는 한국은행이 마구 찍어서는 안되고 물가는 정부가 통제해서는 안되며 국제거래는 자유화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했다. 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설득작업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의 경제문법 책을 뒤집는 것들이었다. 전두환의 흡수력은 빨랐다. 개인적 성격이 소탈했다던가 경제에는 문외한임을 자인하고 있었다던가 하는 게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비록 박정희 시대를 이어받았지만 무엇인가 새 시대를 알리려는 강박관념이 전두환에게 지배되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임자와 다른 방향이 있어야 했다. 김재익이 그 답을 제공해 준 것이다. 전두환은 공백지대로 남아있던 국가 경제 운영에 눈이 트였고 김재익은 권력을 차입함으로써 물을 만난 용이 되었다. 그는 이제 이상(理想)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와 힘을 잡아 낸 것이다. 이 대목은 어떻게 보면 김재익 탐구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대통령 경제 수석비서관이라는 자리가 제공된 그 기회가 그의 진면목을 발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난세관(亂世觀)이라는 것이 있다. 그의 난세관은 5공 참여로 현실주의자란 평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어떤 정치권력이 그를 징발했어도 그는 부자연스런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경제관료이지만 학맥 지맥 인맥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관료사회에서 보기 드문 자원이었다. 소설 ≪유방과 항우≫(司馬遼太郞 著)에 유방(劉邦)의 총신 소하(蕭何)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하는 유방을 별로 대단한 인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지방의 말단 행정관료였다. 그런 소하가 유방 밑에 들어가 유방으로 하여금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케 한다. 소하는 유방이라는 권력의 상징물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킨 것이다. 이 대목에서 ꡒ김일성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 밑에 가서 일할 수도 있다ꡓ는 김재익의 말이 떠오른다. 잘못된 권력에는 맞서 싸우는 방법과 그 속에 들어가 변화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 있다. 아마 그가 선택했던 길은 후자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는 사실이 20년 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6. 책(冊) 한 권**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해 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책이다. 책은 풍부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그러나 김재익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데이터는 수없이 많이 가졌던 대화다. 아마도 5공 초기 전두환 대통령은 그와 많은 대화를 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대화야말로 김재익 식 개혁 프로그램의 첫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념을 바탕에 깔아야 하고 관주도(官主導) 경제의 과거를 부정해야하고 새로운 대안(代案)을 전달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쉬운 전달(傳達)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작업이다. 장애물은 이 교육이 대통령으로 끝나는 데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주변의 막료들을 이해시켜야 하고 지식인 사회에 자신의 뜻을 전달해야 했다.
카키색으로 둘러 쌓인 군부정부에서 자본주의를 말하고 자율경제를 설파하며 실명제와 개방정책을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발독재의 시대가 끝났지만 정치권력은 신군부에 의해 장악되고 끊임없는 학생 세력의 도전은 지식사회의 신념에 회의를 일으켜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노동자 농민문제로 사회주의적 공기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옹호는 흡사 반(反) 시대적이며 재벌의 안보를 위한 이론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었다. 특히 3공화국이 무너지기 직전에 터진 YH사건으로 노동세력은 전 사회로 확산되고 있던 터였다.
이때 김재익은 한 권의 책을 들고 나왔다. 나도 파란 표지의 비공식 간행물인 이 책을 받았다. 총칼과 돌맹이와 최루탄으로 뒤덮인 난세의 전쟁터에 그는 한 권의 책을 무기로 들고 나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 사회 철학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자본주의를 지나치리만큼 옹호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 이 미국 교수가 쓴 ≪반(反) 자본주의 심리≫가 바로 그 책이었다. 김재익은 그래도 지식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에게는 물론, 대통령 주변의 막료 학계의 친구들에게 살포하다 싶이 했다.
미제스 교수가 아르헨티나에서 일으키려 했던 것은 제갈량의 동남풍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의도는 신선하게 불어오는 솔솔 바람으로 열에 들뜬 정권과 좌파적 흐름으로 덮여 가는 거리를 진정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강단에 섰던 것은 1958년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페론 정권이 무너지면서 정변이 일어나고 경제의 판더멘탈이 붕괴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왜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오해가 일어나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모순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평범한 일상의 용어를 써가며 평이하게 설파했다. 그의 연설은 청중을 이해시켰으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부인 마그리뜨는 훗날 남편의 강연장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마치 닫혀있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신선한 산들바람을 맞아들이는 것 같았다."
김재익은 정치학을 했다. 그의 일상과 사고는 매우 철학적이다.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해서 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학자 아닌 관료였다. 스스로 바이블을 만들 수 없을 바에는 미제스를 바이블로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의 상황이 본질 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황과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틀은 매우 흡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한 권의 책을 선택한 배경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이 고려된 것 같지가 않다. 김재익의 그림자가 더욱 크게 보이는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미제스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이유는 분명하다. 자칫 절벽을 향해 밀려갈지도 모르는 잠재적 불안 때문이었다. 군부독재는 정의(正義) 형평(衡平)을 강조하고 무단적 조치를 선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사회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아니면 영구집권의 독재체제의 틀이 굳어지게 된다. 정치의 파멸이 문제가 아니다. 경제의 기반 붕괴로 피폐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가 한 권의 책을 읽어주길 바란 것은 이걸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무기가 보편성을 띄고 그 추종 세력이 막강해 져야 시장 경제는 힘을 받을 것으로 이해했다. 인플레 전쟁에서 지난 시대의 문법인 정부 개입에 의한 물가 동결 내지는 억제조치의 틀을 해체하는 과정을 보면 이 점이 명백해 진다. 대통령과 여론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어 낸 다음에 그는 인플레 진정에 나서게 된다. 통화정책에 대한 신봉도 미제스의 영향을 받았다. 미제스는 인플레를 잡는 방법으로 정부가 돈을 안 찍어내고 시장의 자동 조절기구에 맞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익은 시장경제와 자율이라는 컨셉을 정책의 기본으로 깔고 나가되 통화정책만은 본인의 말처럼 '앙심 먹고' 긴축으로 몰아 붙이는 국면을 전개시켰다.
***7. 꿈 그리고 앙심**
1982년 그러니까 아웅산 사건이 나기 전 해 늦가을 볕이 따사로운 어느날 나는 청와대에서 그와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무척 진지했고 이제는 몽상가가 아니라 정책 메이커의 입장에서 신념에 차 있었다. 그 대화 내용을 나는 기록해 두었다. 김재익을 탐구하는 데 매우 흥미 있는 자료다. 그가 가장 많이 즐겨 쓴 용어는 '앙심먹고……'였다. 경제를 혁파할 다시없는 기회라는 판단이 그 말속에 숨어 있다. 대통령도 자기도 독한 마음먹고 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자기절제(自己節制)의 다짐으로 들렸다. 당시의 여건과 상황은 까딱 방심하면 옛날 문법으로 돌아갈 잠재적 위험이 높았던 터였다. 그가 말한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앙심먹고 돈을 안 풀기로 했다. 대통령은 매일 이를 깨물며 작심을 한다.
우리는 가격 통제를 앙심먹고 안 하려 한다.
우리는 이제 개방화로 간다. 물론 초기단계는 무역 자유화이고 다음은 자본 자유화다.
우리는 앙심먹고 세금을 더 거둬들이려 한다.
이제는 20대 재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앙심 먹고 철수하려 한다. 그 1500배에 달하는 3만여 개의 중소기업이 뛰놀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에만 금융이다 세 제다 해서 지원하다 보니 ꡐ여백ꡑ이 없다. 5차 5개년 계획은 조선 자동차 정도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크게 ꡐ여백ꡑ을 두기로 했다. 이걸 위해서는 은행이 민영화되어야 한다. 청와대가 특정 기업(20대 대기업)에 융자를 하도록 지시를 내린 기록을 보았다.
은행장도 관이 주도해서 뽑는다. 도대체 의사결정에 비집을 틈이 없다. 그러니 이제 금융의 국영 체제는 끝나야한다고 앙심먹고 있다.
외채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의 거부반응이 있다. 경제 종속으로 망국의 위기를 부른다는 논리다. 이건 잘못된 판단이다. 한 세기 전 영국의 발전과 비교하여 절망적이라던 독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해외자본 투자 때문이다. 해외투자를 차관만으로 이해하는 데 진짜는 직접투자다. 해외자본이 들어와 공장을 세우면 고용이 늘어나고 경쟁력이 강화되는 엄청난 기술 이전이 일어나게 된다. 영업 잘되면 그들이 세금을 많이 내니 국고가 불어난다. 상공부는 이런 경제시책 방향을 두고 '소극적' '여성적'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 때는 '조치하고' '지원하고' 기동력 있게 밀었는데 불황이라는 때에 돈이나 줄이고 대기업에 대한 금융과 세제지원을 철수하고 있으니 쯧쯧 하고 혀를 차는 것 같다.
그러나 앙심먹고 이 길을 가려 한다. 나는 우리 나라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제대국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의 모델이 있다면 그건 스웨덴이다. 인구 8백만의 이 북유럽 복지국가는 오래 동안 1인당 GNP 최상위 국가에 있다. 해외투자에 그 비법이 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는 회사는 바로 IBM 스웨덴이다. 이 회사를 통해 수십 명의 최고급 기술자가 배출된다. 세금도 제일 많이 낸다."
그는 5차 계획의 '여백'에 꽉 들어찰 정보통신 산업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기초는 인플레를 잡는 것으로 삼았다.
무단(武斷) 경제체제 아래서 물가를 물리적으로 잡는 수단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격 통제령만 내리면 그만이다. 18년 동안 '빛나는 한국경제'였지만 인플레를 잡지 못했다. 인플레는 통화증발과 함께 성장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성장방식은 중독 상태였으므로 그걸 끊을 때는 '금단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김재익이 잠꼬대처럼 "대통령도 앙심먹고 나도 앙심먹고"를 되뇌인 이유가 극명해진다.
어떻든 2차 오일쇼크까지 맞물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물가는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한국 경제사에서 인플레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을 진정시킨 기반을 이룬 때는 바로 이 시절부터였다. 지금도 '전두환 대통령은 물가 하나만은 확실히 잡았다'는 평가가 남아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무단적(武斷的)인 냄새가 풍기는 예의 조치를 발동하지 않고 경제원론 적인 대응으로 이 안정화 작업을 이끈 상황은 참으로 묘하다. 군부가 장악한 정권이 가장 시장적 접근을 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매일 매일 김재익은 어금니를 깨물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이것은 과거의 유능한 경제 참모와는 다른 심모원려(深謀遠慮) 형의 면모를 김재익이 보여 준 대목이다.
***8. 자기 부정(否定)**
개혁은 자기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관료로 몸담아 어떻든 현실정책에 편입되어 있었다고 보면 김재익이 날개를 편 이후의 개혁은 자기부정이라 할 수 있다. 규제 간섭 명령 지시 조치로 이루어진 틀을 부정하는 작업이 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시도한 일련의 방향 전환은 청와대 중심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관계 장관이 1대1로 대통령을 만나 내리는 의사결정은 안 된다. 거기에는 금리도 은행장 인사도 대기업에 대한 대출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무역과 관세를 통한 외국상품의 규제는 애국심이 아니다. 그들과 경쟁하여 제품의 질을 높이고 가격은 떨어뜨리는 것이 애국심이다. 통화긴축(通貨緊縮)은 말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하는 것이다. 정부가 쓸 돈이 필요하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한다. 바야흐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때가 되었다.
전두환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인기 없는 정책이거나 스스로 경제권력을 철수해야하는 것들이다. 그래도 그는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야"하고 엄청난 '여백'을 김재익에게 제공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보장교 출신이다. 그는 권력의 핵심부를 가장 근접해서 목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경제는 몰랐지만 부패와 부정과 이른바 정․경유착의 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단적 방법을 발동할 수 있었지만 경제는 달랐다. 특히 그는 흉년에 따른 엄청난 외미(外米)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시장 경제의 가공할 위력을 교습받은 바 있었다. 위기마다 발동되는 '주사 한방 놓기'식의 조치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다른 측면도 있었다. 신군부 정권으로서는 과거와 다른 길이 필요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새로운 경제 비전의 제시 없이는 쿠데타 정권이 인정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개혁'의 간판을 단 일련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후 시행되는 일련의 개혁작업은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민주화의 질풍노도 속에서 탄생된 무단정권으로서는 내용이야 어떻든 그런 방향의 개혁만이 군부정권이 상대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김재익의 등장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김재익은 개혁을 실천하고 밀어붙이는 타입의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준비해 온 것들은 그런 역할보다도 한 차원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왜곡된 틀을 까부수고 금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까지 그려 놓는 철학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특이성은 반(反) 체제가 아니라 체제 속에서 일어났으니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신군부도 김재익도 현실적 병리와 모순에 대한 강한 비판심리가 있었지만 체제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것은 얼마 뒤 개혁의 한계성을 상징하는 또 다른 사건을 빚어낸다. 바로 실명제(實名制)의 경우다.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이 발생한 이후 '금융 실명제'의 도입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개혁을 표방했던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정책 추진을 지원했다. 그러나 몇 개월 잠잠하던 경제계로부터 반격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경기도 안 좋은 데 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밀어붙이다가 독을 깨게 되었다는 논리였다. 논리뿐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들이 일어났다. 급기야 청와대 참모 진들까지 이 반격에 가세했으며 경제부총리조차 '불가(不可)'가 대세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실명제'는 유보되었다. 김재익이 사표를 제출하고 등청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실명제를 지지했던 그에게 군부 출신의 청와대 참모가 모욕을 주었다는 것이다. 모욕이 아니라 김재익은 심각한 좌절감을 느꼈으리란 짐작이다. 따지고 보면 국보위 시대 이후 그가 추진해 온 일련의 정책은 반(反) 대기업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실명제'는 그 하이라이트에 속했다. 재계는 그가 진짜 자본주의 신봉자인지 의심이 간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문제는 정권 안에서조차 이미 개혁이 와해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과거의 틀과 관행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 제시에 권력과 동맹관계였던 김재익의 입지는 이후 퇴화되는 것 같았다. 체제 안에서 일어난 자기 부정이 시간이라는 암실을 통과하면서 어떻게 변색되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냈으니 이 또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9. 에필로그**
지나간 사람을 떠올리면 기억 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이미지도 말씨도 더욱 선명해 지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물론 사적(私的) 교류에서 남아있던 인상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재익과 친구가 아니다. 사적으로 가까웠던 사이도 아니다. 기자와 관료였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설득조의 그 나직한 말씨는 생생하게 들려온다. 아마 그의 비극적 죽음이 사실 이상으로 그를 채색시키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도저히 한국 관료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일한 청결 맨이었다. 경제와 미래에 대해 그만큼 진지하게 이야기한 경제관료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원대했다. 내가 머리 속에 그렸던 참모급 관료의 가장 이상형(理想型)이었다.
김재익이 살아 있다면 나와 동년배(同年輩)다. 각기 지향한 목표는 달랐겠지만 성장의 과정과 환경과 여건은 크게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60대 중반이 된 이들은 일본 점령기에 태어났고 최초로 한글 교육을 받은 세대다. 소년기에는 참혹한 전란을 겪었으며 대학시절은 반(反) 독재 대열에 참여했다. 그리고 개발 성장시대에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개인사가 파란만장한 것이 아니라 통틀어 한 세대가 파란만장이었다. 60대가 된 이 세대는 각자에 따라 진폭은 있겠지만 그래서 인생관에 철학적인 면이 있다. 김재익의 철학자 같은 면모도 그런 공통성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눈으로 보아도 탄복할 만한 수준급이었다. 그렇게 비쳐진 데는 이유가 있을 듯 싶다. 그를 대할 때 심상이 이렇게 맑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마도 음모와 돈과 자리가 맞물려 돌아가는 경제관료 사회에 그가 몸담고 있어 더욱 돋보였는지 모른다. 그의 풍모를 학창의(鶴氅衣)만 입히면 영락없는 제갈공명이라고 묘사한 후배기자도 있다. 지략(智略)만을 말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에게서는 노자(老子)의 냄새가 풍긴다. 애써 만들어 꾸밈이 없다는 '무위(無爲)'의 사상이 짙게 배어 나온다. 그의 '여백 철학'이 상통하는 대목이다.
사실 그는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고 포항에다 제철소를 만들어 내는 테크노크라트는 아니다. 그는 국가와 사회와 시장이라는 틀을 어떻게 혁파하고 개조하는 가에 뛰어난 역량을 지녔던 경제 전략가(戰略家)였다. 다른 것은 다 빼고 죽어라하고 전자 통신 시스템을 바꾼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를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시대에 한국 경제가 먹고 살 길을 깔아 놓은 것이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였지만 비판자이기보다 생산자였다. 그의 생산적 참여는 어쩌면 토인비의 역사관과도 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보는 역사관이다. 그가 어떤 체제에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나쁜 판이든 좋은 판이든 판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바른 방향으로 틀어 가느냐를 중요하다고 본 데 있다.
그의 이야기를 끝내며 나는 두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하나는 그가 왜 굳이 한국의 미래 모델을 스웨덴으로 잡았을까 하는 점이다. 작지만 국민 소득이 높은 깨끗한 나라여서 그럴까. 전쟁에 안 끼어 드는 중립국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시장적 사회주의 체제 때문인가. 이 나라의 복지후생 노동자 정책을 주의 깊게 관찰한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노르웨이와 쪼개지고 난 뒤에도 동쪽과 서쪽의 두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 때문일까. 두번째 의문은 아무리 교역과 금융을 개방하더라도 왜 은행은 외국 자본이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의문이 새삼스러운 것은 노무현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념적 틀에 대한 문제가 등장하고 우리 금융계는 이미 외국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곳도 생겨나고 있어서다. 20년 전, 그가 이미 암시한 바가 있는 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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