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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 기둥의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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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 기둥의 동물들

[김유경의 '문화산책']<17>불국사 3

불국사에는 6세기 법흥왕 때부터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차돈의 죽음 이후 왕실 사람들이 지극한 불교도로 헌신했다.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연제부인이라고도 한다)의 법명을 따서 창건한 법류사라는 이름으로 불국사의 시초가 존재했다.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해 이곳에 안치했다. 670년 문무왕 때는 무설전을 짓고 신림·표훈같은 스님들이 화엄경을 강의했다. 김대성의 불국사중창은 751년 전후이다.

▲ 불국사에서 제일 높은 관음전 구역에서 내려다본 다보탑과 회랑 주변. 이 광경은 과거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순희

신라 후기에도 수놓아 만든 석가모니와 헌강왕 초상화, 경명왕비(혹은 경문왕비)가 시주한 전단향 나무의 관음상이 있었다. 광학부도라는 이름의 섬세하고 여성적 느낌이 나는 석조부도 1기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헌강왕비의 법명이 광학이라니 혹시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 신라시대의 유물 광학부도. 섬세한 조각이 사뭇 여성적인데 지금 비로전 마당 앞 구석에 놓여 있다.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깨져서 돌아왔다. ⓒ이순희

또 다른 무수한 이들이 불국사에 광휘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불국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든 보물과 건물이 불탔다. 역사기록은 삼국유사 외에 최치원의 글 약간과 1740년 동은스님이 지은 <불국사고금창기(또는 불국사고금역대기)>가 남았다. 이 책의 원본은 일본 동경대학에 가있다. 광학부도 또한 일본으로 반출됐다 돌아오면서 지붕돌이 반쯤 깨졌다. 다보탑과 석굴암과 석축까지, 불국사는 일본인들 손에 많이 훼손됐다.

현대 들어 1970∼1973년간 그때까지 남아 있던 대웅전과 극락전은 새로 단장하고 무설전은 고려 때 양식으로 다시 지었다. 관음전, 비로전도 새로 지었다. 도편수 이광규, 신응수, 단청의 한석성, 관음전 탱화의 원덕문, 비로전 수미단조각 박찬수 등이 나섰다.

불국사 정면 100m가 넘는 듯 펼쳐지는 대석단의 아랫단과 탑, 당간지주와 부도 등 8세기 신라를 보다가 그 주변 전각에 가서는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18세기 조선시대 후기의 절과 현대의 복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입구 쪽에 박물관을 새로 짓는 중이다.
지금 불국사는 5개 전각에 여러 부처님들이 상징하는 구역 및 스님들 거처로 나뉘어 있다.

▲ 1765년에 중창한 북구사 대웅전 안에는 코끼리, 사자, 봉황, 나찰 등 목조각 동물이 있다. ⓒ이순희

그중 대웅전은 석가탑 다보탑과 함께 상징 축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변란을 당해서도 꾸준히 중창되어왔다. 화강암 기단과 초석, 석등은 신라 때 그대로이고, 지금 건물은 영조 41년인 1765년 채원(采遠)스님이 중창했다.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정사각형 터에 전체 높이는 13m지만 고건축전문가 신영훈 씨는 기단 규모로 보아 '원래는 이층 전각이었으리라'고 한다.

▲ 대웅전에서 본 기둥 위 천장 사이의 여러 동물들. 대웅전 왼쪽에 흰 코끼리(?)와 용이 보에 걸쳐 있고 앞쪽 기둥에 붙어 있는 사자도 보인다. 사자 등에 있던 업경은 떨어져 나갔다. 코끼리는 입에 반야용선 막대를 물고 있다. 대웅전 기둥 위쪽은 불국사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광경, 18세기 불교 동물의 세계이다. 문화재청은 이 건물을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이순희

처음 대웅전을 보았을 때는 미륵보살과 갈라보살, 석가모니불에 제자인 가섭과 아난의 입상이 있다는 것 뿐, 벽화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벽면 투성이에 수미단은 평범하고, 닫집도 없어서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된 분위기가 담겨 있는 기둥 위쪽의 건축 장식을 보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것은 8세기 불국사 이후 제2의 불국사이기도 했다.

대웅전 안에는 10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 사이는 아주 넓은 편으로 위쪽으로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이중 보와 천장까지 공간을 가득 채운 공포가 있었다. 그들 기둥 사이 보에 걸쳐 용과 언뜻 돼지 같기도 한 하얀 코끼리, 표범 비슷한 점박이 사자가 좌우 칸에 둘씩 매달려 있는 커다란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로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 대웅전은 사방에 문이 나 있어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만으로도 천장 구석구석까지를 다 볼 수 있게 지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천장은 닫집 장엄이 없지만, 3단으로 층이진 평면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한가운데가 제일 깊어져 변화를 주고 천장 가득 단청으로 된 다양한 그림이 있었다.

부처님께 예를 표한 뒤 천장 구석구석의 동물 조각들을 보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각 안에서 사진을 못 찍게 눈을 부릅뜨고 지키던 보살 한 분이 "코끼리는 보현보살이고 사자는 문수보살이에요. 불단에 불상을 더 세울 수 없으니까 문수 보현을 그렇게 나타내 부처님을 모시는 거라고요. 그런데 조각한 목수가 코끼리를 못 보던 시대 사람이라 저렇게 돼지같이 만들어 놓은 거지"라고 설명했다.

소박한 불교 신자의 해설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불교의 상징을 엄격하게 나타냈다기보다 동물 형상을 한 지지대 같은 느낌으로, 기둥사이가 넓으니 그런 불교적 장식으로 기능을 보하는 건축적 측면이 있잖을까 추측도 생겼다. 용 조각은 익숙한 손길로 엄숙하게 제작되었지만 코끼리나 사자(혹은 해태?)조각은 단순한 편이었다.

왼쪽에 있는 하얀 코끼리 조각은 존재를 과시하는 것 외에도 입에다 낡은 반야용선대(극락으로 가는 바다 위의 배를 상징하는 대)를 매단 쇠줄을 철사 옷걸이처럼 비뚜름하게 물고 있었다.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 같지는 않고 줄을 걸어놓은 돼지 코끼리는 입술이 아파서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용선대에는 용머리 조각도 없고 일자형 막대에 종만 10개가 줄줄이 달려 있는데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빈자리도 많다.

다른 데서 본 반야용선대는 불국사 대웅전의 이 낡은 막대기와는 비할 수 없는 정치한 용 조각에 규모가 크고 양쪽 끝에는 줄에 매달려 배 위로 올라가려는 악착 동자도 매달려 있다. 이곳 대웅전의 용선대는 그냥 일자 막대기에 종만 매달아논 하품 같았다. 불교적 신앙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라면 그런 자리에 그런 모양으로 매달아 놓치는 않았을 것이다. 새 한 마리가 가운데 올라앉아 있었다. 보살이 "극락조에요"라고 눈을 내리깔고 답했지만, 불국사에 어울리는 반야용선은 전혀 아니었다.

▲ 대웅전 오른쪽 기둥사이에 걸쳐있는 알록달록한 사자(?)와 용. 넓은 기둥 사이를 구조적으로 받쳐주는 듯하다. 그 뒤쪽에 보이는 공포의 윗부분은 모두 봉황이다. ⓒ이순희

오른편의 알록달록한 점박이 동물은 사자인지 무엇인지 짐작도 안 됐다. 하얀 몸뚱이에 꽃핀 것처럼 반점 무늬가 있다. 철봉에 매달린 애기 같았다.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한 용은 무심한 얼굴로 보에 턱을 괸 채 긴 몸뚱이를 뒤로 빼고 있었다. 더 정밀하게 검사한다면, 어떤 것들이 더 나올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불상이 안치된 어간의 기둥에는 천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쭈그려 앉은 나찰, 또 다른 조그만 코끼리가 있었다. 맞은편 문 쪽의 기둥에는 업경(생전에 지은 죄를 비쳐 보인다는 명부의 거울)을 등에 지고 있는 사자가 조그만 조각품으로 붙어 있었다. 한 마리는 업경이 없어졌다. 사자는 '씩' 웃고 있었다.

기둥머리 공포의 위쪽은 모두 봉황의 얼굴로 다듬어져 수십 마리 봉황이 자리했다. 용 또한 여러 마리가 보에 걸터앉아 지키고 있다. 그림 속에는 학이 날고 비천상은 날아갈 듯한 자세로 연주하고 있다. 갑자기 대웅전 천장 가득 온갖 동물들의 움직임과 소리가 가득한 것 같았다.

미술사학자 존 코벨은 절 천장과 대들보에 그려진 이들 무당 같은 비천상은 '대들보 신을 위해 즐겁게 연주를 함으로써 집의 들보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무속적 관습이 절에 적용된 것으로 비천의 시대적 변천상이기도 하다'고 했었다.

동물들은 모두 생생한 표정과 몸짓으로 자기들 세계를 지키면서 저 아래 공간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이들은 미세한 움직임 속에 서로 알아볼 것 같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이들 동물의 세계가 기둥 위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못 알아채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연속해서 불국사를 4,5번 방문하고도 직업적으로 대웅전을 살펴보자는 생각을 하고 나서였다. 이 건물을 중창한 천룡사 스님 채원은 불교에 대한 어떤 원칙과 철학을 구현했을까, 건물을 지은 도편수는 누구일까, 생각은 마구 1765년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불교 건축을 연구하는 동국대 박물관 오세덕 연구원은 "아직 절의 이런 동물 조각에 관해서는 명칭도 확정되지 않고 이 방면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학계의 현황을 말해주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11월 이 건물을 보물 지정하리라고 예고했다.

▲ 극락전 현판 뒤에는 멧돼지 조각이 있다. ⓒ이순희

이들이 불국사의 창건이념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1765년에 건축된 절의 본래적인 모습임은 분명하다. 이들을 보면서 또 다른 불국사의 매력을 만끽하는 시간은 즐겁고도 진지했다. 전각마다 건물 내·외벽의 아무 장엄 없이 텅 빈 공간이 주던 허전함 같은 것도 잊었다. 다만 불국사 안에서조차 이들에 대한 어떤 자료 하나 없는 게 아쉬웠다.

바깥에 나와서 쳐다본 대웅전은 처마마다 용과 봉황이 수십 마리는 되는 것 같다. 시대를 거치며 그렇게 됐는지 나무 뿔이 조각된 용, 철사 뿔이 달린 용, 그것도 없는 용 등 가지가지였다. 그리고 같은 조선시대 건물 극락전에도 지붕 바깥 처마 현판이 붙어있는 바로 뒤에 멧돼지 조각이 숨어들어 있고 산신도 두 점이 아미타불 옆 칸에 있었다.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내려가는 길은 세 갈래 계단으로 구성된 삼도(三道)계단이었다. 자현은 그의 저서 <불국사에 대한 재조명>에서 '이 계단은 석가모니가 도리천에서 설법을 마친 뒤 지상 세계로 내려올 때 양옆에 제석천과 범천이 같이 걸어 내려오던 삼도계단의 상징이다'라고 했다. 교리적 의궤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불국사로서 대웅전과 극락전 간의 높낮이 차이도 분명히 의도된 것이라 한다.

▲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내려가는 삼도 계단은 불교의 의궤를 상징한 신라의 해석이라 한다. ⓒ이순희

▲ 극락전의 아미타불. 수인의 손은 좌우가 일반적인 아미타불과 반대이다. ⓒ이순희

비로자나불이 비로전에, 아미타불이 극락전에 안치되어 있는데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 어머니이던 지소부인이 조성한 6세기 불상과의 관련은 밝혀지지 않았다. 두 불상은 모두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의 수인과 달리 손의 좌우 위치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불상 없는 무설전을 지나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이 남해 보타낙가 산에 상주한다는 상징을 구현해 제일 높은 지대에 지어졌다. 하지만 평지에서 동산 위의 관음전으로 난 가파른 직선계단은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관세음이 사람을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올라오게 할 리가 없다.

안에는 월주스님(원덕문)이 그린 천수관음 탱화가 있는데, 왼쪽 아랫단에 용왕님이 그려졌다. 경주에서는 무수한 용왕을 만나게 된다. 경주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관음전 주위에는 수많은 전각과 버드나무, 대나무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대나무가 조금 주변에서 자랄 뿐이다.

▲ 무설전 뒤 관음전 올라가는 동산의 가파른 계단. 바다 한가운데 관세음이 상주하는 산을 상징한 곳에 지어졌다. ⓒ이순희

▲ 관음전 벽에 걸린 월주스님의 천수관음 탱화 중 용왕 부분. 경주에 오면 수많은 용왕들과 조우한다. ⓒ이순희

관음전에서 비로전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대웅전에서 극락전 내려가는 것처럼 고저차이가 있고 계단이 있지만 여기는 평범한 일도(一道)계단이었다. 대웅전-극락전 간의 삼도계단과 차별화한 것 같았다.

비로전의 부처님은 대좌도, 닫집도, 협시불도, 벽화도 별로 없는 전각에 덩그렇게 모셔져 있다. 대좌가 없는 것은 문 앞에서 볼 때 불상이 문틀에 걸린 듯 보이지 않게 하는 방편이라 한다.

엄격한 것으로 알려진 불상의 도상에서 불국사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은 왜 일반적인 수인과 달리 손의 좌우 위치가 반대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문화재와 학술관련 어떤 정부기관은 불상사진을 아예 반전시켜 자료로 제시하거나 불상의 실물과 다른, 틀리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 불상의 제작시기를 낮춰잡고 있기도 하다.

비로전 앞 마당 한 구석에 광학부도가 있다. 이 자리가 원래 놓여 있을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부도를 간수하지 못하고 일개 일본 요릿집에 빼앗겼었다. 얼마나 더 많은 걸작들이 과거 불국사에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 불국사 입구 가까이 천왕문의 광목천왕은 용을 미꾸라지처럼 움켜쥐고 여의주도 뺏어가진 양상으로 표현됐다. ⓒ 이순희

천왕문의 사천왕을 더 볼 겸 그 문을 다시 지나 나왔다. 조선시대 후기 사천왕상 중 서쪽을 관장하는 광목천왕은 용을 한 손에 잡고 여의주를 빼앗아 들고 서 있다. 손아귀에 든 용은 가엾게도 미꾸라지 정도로 묘사되어 있고 여의주를 잃고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대웅전에서 무수히 본 용과는 달리 너무 희화화되어 유머라기보다는 잔인해 보였다.

8세기 불국사의 웅대한 석조물을 보고 난 뒤 관람객이 혼자 알아서 곧바로 조선시대 불교세계로 적응해서 불국사를 다시 보기는 어려웠다. 한 젊은 외국인은 "탑이든 석단이든 그랭이기법 같은 중요한 사항을 알려주는 설명이 왜 없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기는 용역으로만 움직이는 절 같고 스님들의 법다운 자취나 모습은 쉽게 접해지지 않았다.

예술적 완성도에서 대웅전은 차라리 미술품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미술 속에서 보이는 종교적 분위기가 불국사에서 유일하게 정답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불국사 정문 앞에서 멀리 4Km 밖 영지가 보였다. 자현은 그의 책에 '절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계곡이나 연못 등은 피안과 차안을 갈라놓는 구실을 한다'고 했다. 과연 영지를 가운데 두고 세속의 아사녀는 불국사를 만들던 피안의 세계 속 아사달을 접할 수 없었다. 영지이야기는 그래서 더 설득력 있는 불국사의 한 부분이 되고 마음은 다시금 불국사 본래의 8세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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