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돌, 화강암의 단단하고 맑은 색조를 지니고 완벽한 조형으로 천 수백 년 간 거기 솟아있는 탑. 종교철학으로 따지면 드높은 정신세계를 알리는 상징이자 엄격함, 고귀함, 아름다움, 부드러움과 화려함, 강함의 모든 덕목을 갖춘, 한국인의 미의식세계를 결정적으로 나타내 보인 유물. 신라 땅에 대대로 백제 명장의 손으로 세워지는 탑의 건축사적 내력을 담고 있으며, 거대한 문화사적 위상을 말해주는 사리유물을 간직한 탑이다.
한쪽은 절벽이고 한쪽은 산등성이인 불국사의 까다로운 지형을 딛고 가을 오후 쏟아지는 햇살 속에 바라본 두 탑은 언뜻 환한 두 그루 꽃나무가 피어나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땅에 디디고 서서 보는 그 두 탑이 서있는 자리는, 불교에서 말하면 청운교 백운교의 33천 세계를 올라온 수미산 정상이라 한다.
▲ 사진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가 상징하는 33천을 올라온 곳에 나란히 자리해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그의 설법을 듣는 다보여래의 상징 석가탑과 다보탑. ⓒ 이순희 |
석가탑·다보탑에 대한 지식이나 미학은 현대에 와서 깊이를 더해가는 중이다. 1950년대의 교과서적 설명은 '다보탑은 여성처럼 장식이 많고 복잡하고 석가탑은 남성처럼 소박단순하고 돌을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것, 다보탑의 사자상이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는 정도에 그쳤다. 왜 다보탑이 복잡한지, 석가탑이 어떤 기술력의 소산인지, 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은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연구가 이뤄졌다. 두 탑이 세워진 8세기의 모든 의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 지식의 양은 상당해져서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 되었다.
석가탑은 진신사리를 간직한 석가모니의 상징이자 한국 석탑의 양식을 완성한 정점의 탑이다. 석가모니는 고행 끝에 진리를 깨달은 이로 자신을 치장하며 산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의 탑 또한 별 꾸밈이 없다. 그러나 간결함이 추구하는 미학과 탑 건축의 발전과정, 불교의 의궤와 상징을 담고 8세기를 대표하는 문물이다. 석가탑은 1038년 고려 때 와서 한차례 중수되었다.
다보탑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가 하는 설법이 참임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의 상징으로 지어졌다. 두 탑이 한 공간에 나란히 놓인 것은 석가 생존 당시의 설법장면을 재현해 보이는 것이며, 다보탑은 8.2m의 석가탑보다 더 높은 10.4m이고 기단 폭은 석가탑과 같은 4.4m이다. 두 탑 사이는 30m 떨어져 있다. 다보탑은 좌경루를, 석가탑은 범영루를 앞에 두고 있으며 두 탑의 뒤에는 대웅전이 서 있다.
1966년 석가탑에 두 번이나 도굴범이 접해 탑석을 들어 올리며 탑을 훼손했음이 밝혀지자 바로 해체하면서 사리함유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금동 투조조각의 사리외함부터 녹색 유리병 등 사리장엄구 일체가 공개되고 신라 닥종이에 분명한 글씨체로 인쇄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이 나왔다.
이홍직 교수 등 학자들은 이 경이 706-751년 사이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신라 목판인쇄임을 입증하는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들 사리유물이 일반에 익숙하게 떠오른 것은 발굴 이후 지속적으로 소개된 사진과 글, 전시회를 통해서이다. 그들의 섬세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은 석가탑의 내면적 품위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런데 처음 알려진 사실대로 석가탑이 흔들린 것은 지진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도굴범 소행임을 알아챈 사람은 황수영 박사였다. 경주 출신의 도굴범들은 기구를 갖춰 전국의 온갖 탑을 뒤지며 다니던 악명 높은 일당이었다. 그 당시 읽은 신문기사에서는 누군가가 이들 도굴범 뒤에서 장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묘사되기도 했었다.
다보탑 사리유물도 국내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석가탑 사리유물마저 도굴되었다면 두 탑의 가치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지닌 목판 인쇄술의 어마어마한 위상도 금 은 수정의 보물 사리함도 구리거울도 물거품이 될 뻔했다.
▲ 석가탑 사리유물중 (위 왼쪽부터) 금동사리외함, 금동사리외합, 은제와 파리제(유리) 병으로 이뤄진 사리장엄구들. 경건함과 함께 귀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받드는 종교적 심성이 느껴진다. ⓒ 문화재청 |
▲ 석가탑에서 발굴된 642cm 길이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서기 751년 이전의 신라 목판 인쇄술을 말해주는 가장 오래된 역사적 유물이다. ⓒ 문화재청 |
1972년 문화재전문위원 유문룡 씨 등이 두 탑을 정밀 실측했다. 1200년의 풍화에 섬세한 조각이 마멸되는 것을 우려해 두 탑의 석재와 가장 근접한 화강암을 구해다가 복제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돌을 다루는 실적과 경험이 가장 뛰어난 50대의 명장 김부관, 이복수 씨 등이 책임자로 매일 150명의 장인이 6개월간 작업했다. 이 작업에서 알려진 사실은 다보탑에 사용된 화강암재는 265개, 석가탑은 71개이며 두 탑에 소요된 돌무게는 280톤이란 것이다. 1975년 1월 복제 완성된 두 탑은 지금 경주박물관 뜰에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 건축이 법화경에 근거한 불교 철학에서 나온 것임은 미국 출신 미술사학자 존 코벨 박사의 1980년대 영문 글에서 처음 알았다. 천상의 것 같은 다보탑이 아무 근거도 없이 천재조각가의 머릿속에서 뚝 떨어진 디자인이 아니라 다보여래의 상징이란 것, 석가탑과 나란히 서 있는 근거가 제시됐다.
그제서야 비로소 청운교 백운교의 33천을 지나 올라온 뒤의 불교 세계가 연결되어 이해되었다. 불국사를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된 계기였다. 2000년대 들어 나온 국내학자들의 불국사 연구서들은 모두 두 탑의 예술적 조형을 파헤치는 동시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의 이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석가탑은 주변 땅바닥에서부터 수미산 위 석가모니의 존재를 그려주는 상징세계가 펼쳐진다. 석가탑의 사방을 돌아가며 8개의 큰 연꽃송이 조각이 연결돼 있다. 신영훈 씨 등은 법화경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서 뿌린 보배꽃, 또는 불법을 보호하는 팔방(八方)의 금강신들이 와서 앉는 자리라고 표현한다. 석가탑은 석조건축의 일대 혁신이라고도 한다. 그렝이기법이란 공법에 대해선 신영훈 씨로부터 처음 들어 알았는데, 그런 기법이 실제 드러난 단면들이 불국사 여기저기서 보인다.
미묘한 것은 기단석 아래 자연스러운 모양새의 바위들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수평의 기단돌과 이가 맞게 재단돼 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위에 앉아 고행하던 석가모니의 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울퉁불퉁한 돌은 그 위에 얹힌 기단돌과 이를 맞춰 수평을 이루도록 다듬어졌다. 이 돌 작업을 한국특유의 그렝이기법이라고 한다. "이 돌 자리의 의미를 놓친다면 석가탑을 온전히 못 보는 것입니다"라고 신영훈 씨는 말했다.
▲ 석가탑 주변은 8개의 연꽃조각이 둘러싸고 석가모니의 암좌를 상징하는 자연석 바위가 기단돌과 맞물리는 그렝이기법으로 건축되어 있다. 석가탑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고 상징이다. ⓒ 이순희 |
실측은 또 다른 세밀한 면모를 알게 해준다. 석가탑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치밀하게 수직으로 향한 미학을 대표한다.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직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탑신의 벽면 윗부분을 약간 좁게 한 미약한 사다리꼴 형태로 다듬어 전체적 체감에서 수직으로 보이게 한 것"이라고 실측자 유문룡 씨는 말한다.
"아사달의 천재성은 탑신과 옥개석의 좁아지는 폭의 정도를 묘하게 계산해서 수직의 탑을 조성했다는 데서도 보입니다. 장인들은 착시에 의한 수법을 많이 활용합니다."
▲ 불국사 석가탑에 와서 탑신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통돌을 써서 건축되었다. 엄정하게 솟은 수직의 탑을 세우는데는 탑신의 비율 등에 착시를 이용한 기하학적 계산법이 활용됐다. ⓒ 이순희 |
다보탑은 법화경에 수많은 난간과 감실과 보배로 장식되었다는 기록을 좇아 건축가의 능력과 천재적 예술성이 한껏 구현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이런 아름다운 탑은 세상 어디에도 전무후무한 것이며, 심주나 두공, 옥개석 등에 목조건축의 기법을 그대로 돌로 나타낸 신기(神技)가 발휘된 것이라고 모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돌을 다루는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해야 이런 기법을 그토록 유연하게 쓸 수 있는 것일까, 불국사에서는 명장과 달인의 경지에 있는 돌 장인의 무수한 숨결이 느껴진다.
기단 4방에 10계단으로 된 계단이 있어 탑에 웅장한 기운을 준다. 이 계단 입구에 서있는 돌기둥에는 난간석인 돌란대가 끼워지는 구멍자리가 나있다. 그렇다면 계단위의 1층 탑신은 난간이 둘린 구조였을 것이고, 기둥사이의 공간은 그대로 감실이 되는 구조라고 한다. 경전의 묘사와 일치하는 것이다. 네 마리 사자는 4방의 사천왕과 같다. 그중 3마리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탑신 기둥 위에 목조건축처럼 보이는 지붕받침(두공)이 있고 그 위에 날렵하게 네 귀가 쳐들린 옥개석이 얹혔다. 미륵사탑이 생각나는 다보탑의 이 옥개석과 같은 형식으로 다듬은 눈썹지붕이 청운교에도 있다고 신영훈 씨가 그의 책 <불국사>에 발표했다. 그 위에 4방을 난간으로 둘렀다. 옥개석의 선 및 두께와 나란히 평행하는 4방 돌난간의 비례가 참으로 뛰어나다.
▲ 다보탑의 하단은 직선과 반듯한 네모위주의 조형으로 구사되었다. 돌계단 앞쪽 기둥석에는 돌난간을 설치한 구멍자리가 나있어 5개 돌기둥으로 이뤄진 1층 탑신의 공간을 감실로 꾸민 구조라고 해석한다. ⓒ 이순희 |
4방 난간 안쪽에는 기둥면마다 감실이 패어져 조각된 8각기둥이 있다. 그 위에 또 한 번 8방으로 둘린 난간 안에는 8개의 대나무마디 같은 작은 기둥이 8각 받침대를 감싸고 있다. 이곳에 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받침대 위에는 원형의 활짝 핀 연꽃화판이 대좌처럼 놓여있다. 이는 석굴암 본존불의 원형대좌와 같은 형식이다. 그리고 화판에서 솟아난 꽃술처럼 보이는 조형이 솟아 팔각의 최상층 옥개석을 받치고 그 위는 상륜부와 이어진다.
조각의 기술적인 면으로는 8각돌의 모서리점이 약간씩 두드러지게 다듬어졌다. "그래야만 전체적으로 팔각의 모양이 예리하게 살아납니다. 이 또한 착시현상을 이용한 중요한 기술입니다"고 유문룡 씨가 설명했다.
▲ 목조건축 기법을 그대로 돌로 실현시킨듯한 다보탑의 상층부는 팔각과 원형의 디자인이 겹겹이 중첩된다. 옥개석과 그 위에 설치된 돌난간의 비율이 참으로 아름답다. ⓒ 이순희 |
성덕왕릉서부터 나타나는 돌난간은 다보탑에 겹겹이 설치돼 법화경에 묘사된'수많은 난간과 감실'을 재현해 보인다. 난간은 불국사 석단 전체,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의 계단에도 설치돼 있어 경덕왕대 불국사의 일관된 건축정신을 생각게 한다.
경주박물관 홍사준 관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건축한 아비지와 석가탑 다보탑을 지은 아사달은 동족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런 건축은 신라인만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며,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대의 안정된 사회에서 이룩된 예술적 통합을 지적하는 것이다.
불국사에서 돌로 된 모든 것들은 전란과 도굴 등으로부터 살아남아 우리에게 한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와 이런 조상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준다. 석가탑 다보탑은 세월 속에 그 본뜻이 수수께끼처럼 가려지고 말았지만, 후대의 전문가들은 하나씩 그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과 더 깊은 사랑으로 두 탑을 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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