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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경주 불국토(佛國土)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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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경주 불국토(佛國土) 산책

[김유경의 '문화산책']<15>불국사 1

신라 경주에는 절이 별처럼 많았다고 했다.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경주에 남아 있는 절이 다섯 군데인데, 불국사와 석굴암도 그중에 든다.

▲ 불국사의 전면 2단 석축의 건축기법부터 회랑으로 길게 연결된 4개의 건물과 돌다리가 8세기 신라불교의 자취를 전한다. ⓒ 이순희

불국사는 고려 때도 중수됐다가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 이후 복구되면서 1805년 순조 5년의 중수기록을 마지막으로 몰락했다. 1910년경의 난간도 없이 무너져가는 청운교 백운교, 회랑도 없고 기둥만 남은 채 지붕 한끝이 내려앉은 자하문 등 폐허의 불국사 사진에서는 인기척도 거의 안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단위에 반듯하게 올라와 있는 신라 것 그대로의 다보탑 석가탑이 조금 보인다.

이때 이곳에 스님들이 있었던가? 불국사에 걸맞은 유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지종이에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석가탑에서 나오고 몇 번이나 백주에 도굴될 뻔 한 석가탑 사리함 일괄 유물이 있다. 그래도 사라진 다보탑 돌사자, 그 외 오래된 문서나 그림과 전적들, 기물이나 스님들 얘기 같은 유물이 남아 전한다는 말을 못 듣고 오직 석조 건축물 몇 가지만 남은 역사가 허망하기도 하다.

▲ 1910년 경의 불국사 자하문 안팎. 청운교와 백운교도 많이 무너졌고 기둥과 지붕만 남은 석축 위로 다보탑이 보인다.

오늘의 불국사는 언제 가보아도 인파에 북적인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타이틀도 가졌다. 하지만 '불국사에 기대하고 몇십 년 만에 가봤는데 사람은 많아도 정신적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고 서울의 한 사람은 말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매표구에서는 카드지불이 안된다고 옥신각신이고, 안내용 전단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가져가니까 달라는 사람만 준다'고 했다. 불국사 미술관이라기에 기대하며 들어갔더니 단순한 매점이었는데 석굴암 소개에 가서는 진짜 같지 않고 이상하게 보이는 11면 관음상 사진을 버젓이 내놓은 책자를 팔고 있었다.

창고 속 유물까지를 생생하게 소개하고 각종 연구로 세밀한 부분까지 다룬 책자가 수십 종이 넘는 외국의 유적지를 생각하면, 그 많은 관람객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대단한 세부구조가 있으면서, 자료 하나 변변히 내놓고 있지 못하는 불국사는 '왜!'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났다. 여기서는 '연구야 어떻게든 다른 걸로 보고 하겠죠. 꼭 뭐 이걸 사진 찍어서 봐야 돼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의치 않고, 불국사 건물의 자리나 청운교 백운교랑 두 개의 탑이 신라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만 생각할 때 정신은 8세기로 돌아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경주인들이 불국사를 이해한 대로 보는 방법은, 전 문화재 전문위원 유문룡 씨가 일러준 순서를 따르는 게 한 방법이다 싶었다. 유문룡 씨는 1968년∼1973년간의 불국사 복원작업에 현장감독으로 참가하며 불국사 등 경주의 많은 유적을 10년에 걸쳐 실측해 도면을 남겼다.

"그때 불국사는 조선시대 건물인 대웅전과 극락전, 신라시대 건축인 석축, 석가탑, 다보탑, 계단의 기초 정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다시피 했어요. 공사는 우선 불국사 건축이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중수되면서 어떤 자(尺)를 기준으로 건축됐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불국사 건축은 김대성과 아사달이 전체를 총괄했으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장인은 건축전체를 세부적인 데까지 꿰뚫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고, 이들 두 사람의 행적은 실로 세밀한 데까지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국사는 신라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시대 내내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다. 지금은 터만 남은 곳까지 모두 조사한 결과 비로전지는 동위척(東魏尺)에 가까운 자를 써서 고려 때 중수했다는 것, 관음전은 조선 초기에 영조척(營造尺)으로 건축한 것이고 무설전은 조선 중기에, 자하문, 대웅전, 극락전은 조선 영조 때인 1765년 중수했음을 밝혀냈다.

"안양문은 사라지고 없어서 그때 국립박물관의 미술과장 임천 선생이 강릉 객사문을 본떠 설계한 것입니다. 청운교 백운교의 난간과 회랑도 새로 만들어 복원했지요. 비로자나불이 그때까지 있어서 비로전에 안치하고 관음전의 천수천안 관음도는 복원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입니다."

▲ 불국사 실측 도면을 남긴 유문룡 전 문화재 전문위원.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그는 1000기가 분량으로 입력된 문화재 자료를 풀어 보이며 실측을 통해 접근한 '불국사 본연의 건축정신'을 말해 주었다. 이제까지 찾아낸 불국사 자료 중 가장 구체적인 접근이기도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문화재를 두고 온갖 말을 지어냅니다. 그러나 실측을 해보면 건축의 본래 뜻이 짐작됩니다. 그 건물이 왜 그 자리에 왜 그런 모양으로 했는지가 실측과 수학과 역사를 통해 풀리는 겁니다. 거기다 문헌을 통해 공부하면 사물의 원리를 알만해집니다. 건축은 다 상징이에요. 기록과 맞춰 조사 실측하다 보면 웬만한 상징성은 풀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유문룡 씨가 권하는 다음의 순서와 자료를 통해 얻어낸 여러 사실을 생각하며 불국사 안을 들어가기 시작했다. 천왕문 있는 남쪽입구로 들어와 조선시대 사천왕을 지나고 연못을 지나는 과정은 여느 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목조건축을 그대로 돌로 옮겨놓은 듯한 건축기법이나 석축, 토함산 물을 끌어들이는 수구, 그 위에 올라선 누각과 문, 청운교 백운교가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광경(光景)부터는 1300년 전의 건축 천재와 미학을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불국사의 모든 건축물은 사바세계를 넘어 수미산 정상의 불국토로 가서 여러 부처님들을 보는 과정을 건축으로 풀어낸 것임을 생각하고 움직여가며 차례대로 본다면 좀 더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 불국토에 들어가는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청운교 백운교 돌난간은 8세기 미감을 넘어 현대적일 만큼 경쾌하고 아름답다. ⓒ 이순희

불국사의 전면은 왼쪽서부터 안양문, 범영루, 자하문, 좌경루의 4개 건물이 회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자하문 앞에는 청운교 백운교가, 안양문 앞에는 연화교 칠보교가 있어 지상 세계와 부처님 나라를 연결해 주는 구름다리 역할을 한다. 불국토는 수미산 꼭대기 천상에 있다. 자하문과 안양문 모두 불국토로 들어가는 문을 뜻한다.

자하문 왼쪽에 있는 누각 범영루는 리듬감을 주는 길고 짧은 8개의 초석들로 기학학적 구성을 이루며 받쳐졌다. 좌경루 누각은 8각 기둥에 연화문을 조각해 비로자나불이 주재하는 연화장세계를 뜻한다. 8은 불교에서 중요한 숫자이다.

불국토에는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많다고 한다. 범영루 옆 축대에서 반원통형 수조 돌조각을 통해 토함산의 물이 아래 연못으로 떨어지게 했다. 수구의 조각이 '어떻게 이렇게 현대적일까?' 의아하게 만든다. 경주시대에는 그 밑에 큰 연못이 조성되어 범영루가 비쳤다는데 지금은 수구 아래 한 평쯤의 조그만 연못이 장식처럼 있을 뿐이다. 수구에서도 물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

▲ 범영루 초석과 2단 석축 및 난간에서는 8세기 불국사 건축 구조가 잘 드러나 보인다. 돌을 쌓은 기법에서 오랜 한국적 전통이 느껴지고 하단 석축 윗부분의 물 내려오는 수구의 돌조각과 그 아래 작게 축소된 연못이 보인다. ⓒ 이순희

자연석 돌을 쌓은 석축을 자세히 보면 자연석이 그 위를 덮은 판석과 이가 맞도록 다듬어 맞춘 부분도 보여 경이롭다. 이런 건축기법은 한국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 하단의 석축은 큰 돌을, 상단의 석축은 냇돌 같은 말끔한 돌을 쌓았다.

자하문 앞 청운교와 백운교가 홍예문 위에 다리처럼 놓여 수미산 들어가는 길을 인도한다. 사람들은 무지개 넘어 희고 푸른 구름 위 계단으로 수미산을 향해 오른다. 돌계단 아래 1300년 동안 한 번도 허물어지지 않은 홍예문이 있어 건축적 설명이 따른다. 이곳의 무지개 같은 곡선과 계단 난간의 직선이 교차하는 건축적 미감을 갖췄다. 안양문 앞 돌계단 연화교에는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불국토로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연꽃이 피어나도록 한 장식이다. 이렇게 중첩되는 상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국사는 여느 절과는 위상이 다르다.

▲ 안양문 앞 연화교의 연꽃이 새겨진 계단. ⓒ이순희

자하문은 부처님 몸에서 나는 빛이 붉은 안개 같다고 해서 석가모니 보러 가는 곳 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지금은 청운교 백운교의 오래된 돌계단이 수많은 관광객의 발아래 상할까 봐 디디고 올라갈 수 없다. 석축 아래 서쪽 경사진 옆길로 걸어 들어가 자하문 앞에 가서 선다. 하지만 자하문 앞 청운교로 진입하지 못하면서 불국토 들어가는 과정은 순서를 잃고 상당한 혼란을 일으켜 발걸음이 흐트러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 자하문 앞 불국토에 펼쳐진 두 개의 탑은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그의 법이 옳다고 증명하는 다보여래를 상징한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두 탑 모두 불교적 상징으로 가득 찬 조각이다. ⓒ 이순희

자하문으로 들어왔다 생각하고 문을 등지고 서니 눈앞에 석가탑 다보탑이 펼쳐지고 대웅전이 뒤에 있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확립된 건축구조이고 원래는 다보탑 석가탑의 배경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었다고도 한다. 자하문 앞에서 볼 때 왼쪽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상징인 석가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는 다보여래의 상징 다보탑이 있다.

두 탑은 법화경을 그 근거로 나란히 건축되었다. 두 탑 모두 극진한 불교적 상징으로 불국사 산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단 1,2분 보고 넘기기에는 너무 고귀한 예술정신이 발현된 8세기 철학이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놓인 것 없는 건축과학의 승리이다. 이들 천재적 건축의 유산만으로 불국사는 지역색을 뛰어넘어 8세기 한국의 대표적 예술이며 문화로 인식된다. 유문룡 전 문화재전문위원이 오랜 실측을 통해 알아낸 다보탑 석가탑의 구조와 그에 얽힌 장인적인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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