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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 속의 개구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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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찜통 속의 개구리', 일본

윤재석의 지구촌 Q&A <24>

Q) 일본 경제가 올해 들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주요 경제지표가 대부분 우울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죠?

A) 성장의 목을 죄는 장기간의 디플레이션과 전후 최고의 실업율 등 일본의 경제는 여전히 불경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월 28일 일본 정부가 발표한 1월치 경제지표를 보면, 우선 실업율은 5.5%로 전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지난해 12월말 수치 5.3%에서 0.2%포인트가 오른 수치이기도 합니다.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상 겸 금융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취업여건은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면서 “개인소비가 취약해 경제전반의 침체(plateau)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조사한 주요 소비자 물가지수도 무려 40개월째 계속해서 떨어지면서 전년 대비 0.8%가 하락해 일본경제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인 디플레이션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1월치 산업생산지수가 지난 연말 대비 1.5% 상승해 실로 오랜만에 플러스 수치를 보였지만 이 또한 수출주도의 산업 구조에서 그리 밝은 전망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산업생산지수의 반등이 지난 4개월간의 지속적인 침체 이후에 반발 형태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3월치 주요 산업지수 동향은 0.4%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기제품, 개인용 컴퓨터, 액정 화면, 휴대전화 등 주요 가전제품의 생산지수는 6.8%의 상승률을 보였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통산산업성 당국자의 전언입니다.

Q) 일본 경제의 최대 현안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정부의 채무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90년대 들어 경제가 꺾이면서 이를 회생시키기 위해 수십조엔 규모의 경제대책을 연발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로 대규모 공공사업, 도로건설 등을 남발해 실제로 얻은 것은 매년 불어난 재정적자에 따른 엄청난 국가채무 뿐이었습니다. 지난해 일본정부의 부채내역을 보면 내국채 450조엔, 차입금 110조엔, 정부단기증권 5조엔 등 약 600조엔 규모에다 정부채무보증 60조엔을 더한 총 660조엔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4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처럼 국채가 늘어나고 있는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의 개혁정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들이 일본 국채에 대한 신용평가를 잇달아 하향조정하고 있어 일본 정부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일본 국채의 신용등급이 계속 떨어질 경우 투자자 이탈에 따른 가격폭락으로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재계에서는 이를 ‘국채폭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미 시작된 ‘외국자본의 엑서더스’도 문제입니다. 2월14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일본 빅뱅의 태양이 뜨기를 기다리는 데 지쳐 이제 일본에서의 사업을 축소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사례를 전했습니다.

BOA는 지난 13일 도쿄 조직을 대폭 축소해 외환업무를 싱가포르로 이전하고, 채권 관련업무는 중단키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BOA의 이번 조치는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P모건체이스, ABN암로, ING, 코메르츠방크 등에 이은 것으로 일본에 대한 이들의 실망감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금융기관의 탈일본 현상은 일본의 장기 침체에 반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Q) 문제의 핵심은 개혁, 특히 금융개혁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군요.

A) 그렇습니다. 제로금리 정책에 따른 금리인하와 통화공급 확대 같은 금융정책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투자는 꽁공 얼어붙었고 부실 채권을 다량 끌어 안은 금융기관은 대출을 꺼리는 가운데 파산 위협에 직면해 있는 등 금융정책이 가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Q) 고이즈미 총리는 개혁을 위해 상당히 애써 오지 않았나요?

A) 그랬죠. 하지만 지금 중간결산을 한다면 한마디로 실패작입니다.

고이즈미 개혁의 하이라이트는 지난해 9월말 단행한 고이즈미 제2기 내각의 출범이었습니다. 이때 고이즈미는 다케나카 경제재정상(52)에게 금융상을 겸직하도록 합니다. 게이오대학 교수 출신의 다케나카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돕고 지지를 얻기 위해 각종 행사와 TV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기존 관료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왔습니다. 그 결과로 다케나카는 아사히 신문이 실시한 조사에서 국민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관료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금융상의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는 취임 일성으로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금융분야에 대해 전면적인 수술에 나설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했습니다.

그는 "가망이 없는 기업이 퇴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원칙이며 (기업이) 크다고 해서 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폭탄선언을 하면서 "일본은행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적 언행은 곳곳에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우선 그의 경기 경착륙 방침으로 주식시장이 충격을 받아 이른바 '다케나카 쇼크'로 주가가 한 달 동안 1000포인트 가까이 내려앉으면서 8000을 위협했고, 재계에서는 퇴출기업의 살생부가 떠돌아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7대 은행총수들이 10월 하순 "다케나카의 은행부실채권 대책이 은행의 국유화를 전제로 한 자유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라며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자민당의 실력자인 아오키 미치오 참의원 간사장은 "다케나카 처방으로 증시가 붕괴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정면 비판합니다.

야당측은 한술 더 떠 민주 자유 등 4당이 문책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해 그를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개혁 시도 한달만인 10월말 그는 고립무원에 처하게 됩니다.

Q) 저항은 왜 나오는 것인가요?

A) 개혁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바꿔 말하면 기득권에 침해를 받게 되는 보수 및 기득 세력이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기게 되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난해 가을 첨예하게 붙었던 도로공단 민영화를 둘러싼 다툼을 예로 들어보죠. 일본 재정악화의 주범 도로공단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민영화를 천명했고 자민당의 '도로족(道路族) 의원'들은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도로공단 민영화 방침을 정하는 민간위원회도 개혁파 위원들과 기득권 세력이 첨예하게 맞서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 추진되었던 우체국 민영화 불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우체국은 단순한 우체국이 아니라 웬만한 일본인이면 계좌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을 정도의 대표적 금융기관으로 무려 250조엔의 수신고(일본전체 수신고의 40%에 육박)를 유지하고 있는 공룡입니다. 세계최대의 은행이 이른바 일본 우정성입니다.

우정상 출신이기도 한 고이즈미 총리에게 있어 우체국 민영화는 금융 개혁의 결정판인 동시에 도탄에 빠진 일본 경제 회생의 기반다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겉으론 우편 배달 체계의 효율화와 은행 기능을 분리를 내세워 우정 개혁을 추진해 왔지만 기실은 정경유착의 질긴 고리를 끊기 위한 첫 작업인 동시에 개혁의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손쉬운 우정 개혁을 대상으로 잡았던 것인데요.

하지만 2002년 7월 참의원은 우정 업무의 민영화 시책과는 달리 상당히 느슨한 관련 법안을 승인함으로써 결국 우체국 개혁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 역시 ‘우정족(郵政族)’의 장난에 의한 것이죠.

Q) 고이즈미 개혁의 근본적 실패 원인은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A) 우선 시기 선택을 잘못했다고 봅니다.

무릇 개혁이 그러하듯 고이즈미의 경제개혁, 즉 금융개혁도 집권 초기에 했어야 했습니다. 즉 지난 2001년4월 모리 요시로의 퇴진으로 그가 전격 등장했을 때부터 개혁의 칼을 강하게 휘둘렀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매드센 스탠퍼드대 교수 최근 우리나라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이제 고이즈미가 일본을 개혁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면서 그 이유를 그가 초기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매드센 교수는 그가 특히 자신의 집권 기반인 대기업의 이해를 배신하기가 어려워 개혁을 차일피일 미뤘다고 주장했습니다.

금융개혁의 지지부진은 결국 기업개혁의 부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각 부문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어느 한 분야만 개혁한다고 해서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죠. 기업 부실이 금융부실이고 금융부실이 기업부실인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죠.

금융기관 부실을 턴다고 하면서 기업이 행위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과가 날 리가 없습니다. 개별 개혁(piecemeal reform)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Q)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에도 일본국민들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더욱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A)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에드워드 링컨 연구원은 “일본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주요 이유는 지난 10여 년 간 대다수 국민이 ‘지금의 상태에 문제가 없는데 왜 우리가 변화를 해야 하느냐?’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도 나타나지 않았고 실제 문제를 인식하더라도 때가 늦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요즘 우리 세태는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지난 97년말과 98년초 국가부도 위기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적극적인 대처, 그리고 비록 미완의 개혁으로 아직도 문제가 적지 않지만, DJ정부가 추진했던 기업기혁과 금융개혁 노력 등은 일본의 지도자들이 지금도 부러워하면서 벤치마킹 하고 싶어하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요즘 일본인들의 경제관련 의식구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찜통 속의 삶은 개구리(boiled frog in the frying pan) 현상’이라고나 할까요. 미지근한 물 속에 들어 있는 개구리가 점점 따뜻해 오는 물 속에서 “이대로 잠시만 있자, 있자” 하다가 결국은 삶아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국민들의 70%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66%가 노후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수치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일본의 개인금융자산은 빚을 제외하고도 약 1천조엔에 달합니다. 1인당 9백만엔이 넘고, 4인 가족 기준으로 4천만엔(약 4억원) 가까이 보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수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개인파산자와, 수요가 모자라 일어나는 디플레이션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약 43%의 가정이 만성 적자(닛케이신문 조사)이며 일본이 자랑하던 고율의 저축률마저도 최근 들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위기는 실제로 문턱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70년대말 20%를 웃돌았고 2000년에만 해도 9.8%에 이르던 가계저축률이 2001년에 6.9%, 작년에는 6%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거든요.

Q)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는 일본이 국가부채비율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경제 활성화의 구체적 대안이 아닐까요?

A) 일본 경제의 문제는 GDP대비 국가부채가 너무 높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개혁을 통해 부채를 줄여야 하는 데 그것이 암초에 걸렸으니 결국 GDP를 높이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인플레이션 정책입니다.

로런스 코트리코프 보스턴대 교수와 아랑 오엘바하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최근 일본신문 기고를 통해 일은에 의한 국채 대량매입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 금융시스템과 경제 전반을 압박하고 있는 디플레이션 해소로 연결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경제전문 통신사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퍼섹은 2월25일 고이즈미가 하야미 마사루 일은총재 후임으로 후쿠이 토시히코를 지명한 것이 그에게 인플레이션 시책의 악역을 맡기기 위해서라고 분석했습니다.

Q) 일본의 금융개혁에 대한 선진국들의 요구도 만만치 않죠?

A) 1월 27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각국 정치 지도자들은 세계 경제의 성장을 위해 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특히 미국에서의 기업개혁과 일본에서의 금융개혁, 유럽의 구조개혁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일본은 지난달 23일 파리에서 열린 서방선진7개국(G-7) 연례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연석회의 공동성명에서 금융, 기업 부문의 구조개혁을 법제화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만 지난 93년 통과된 금융제도 관련 개혁법, 그리고 96년에 통과된 금융관련 규제 철폐 조치 등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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