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ㆍ에너지 전문가인 이필렬 교수(방송대)의 칼럼 '생태와 인간'을 부정기 연재한다. 이 교수는 앞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생태친화적인 삶이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석유와 원자력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과 보급, 생명, 과학기술의 사회적 효용성에 관해 글을 쓸 예정이다.
이필렬 교수는 1957년 인천 출생으로 서울대 화학과를 중퇴한 뒤 1988년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방송통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에너지대안센터 대표직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찾아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등이 있다. 편집자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 같다. 독일과 프랑스가 시계바늘을 멈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전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와 광장을 반전물결로 뒤덮고, 독일에서는 국회의장과 장관까지 그 속에서 전쟁반대를 외치지만 부시의 귀는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보다 더 확실하게 후세인을 손봐주겠다는 태세다.
도대체 무엇이 부시를 전쟁의 길로 몰고가는가? 9.11 테러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 그가 정권을 잡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군수산업과 석유산업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1993년 쿠웨이트에서 후세인에게 암살당할 뻔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석유확보를 위해서?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한 것 같지만, 그 중에서도 석유 때문이라는 말이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유럽과 미국의 석유 전문가, 경제 분석가, 언론인 등 많은 사람들은 부시 전쟁의 주된 원인으로 석유확보를 꼽는다. 사우디 석유장관으로 수십년간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야마니도 석유를 전쟁의 “아주 중요한 원인”으로 본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국장을 지낸 울시까지도 미국으로서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의 ‘민주화’를 통한 석유확보가 관건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의 끝없는 석유갈증 - 세계 석유의 25% 소비**
<도표 1>
석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기에, 또는 석유사업이 얼마나 남는 장사이기에 미국이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이라크를 장악해야 하는 것인가?
현재 미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석유의 양은 약 2천만 배럴이다. 1년이면 72억 배럴이 된다. 그 중에서 40%도 안되는 28억 배럴이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석유로 충당되고, 나머지 60% 이상은 외국에서 들어온다. 연간 44억 배럴이 수입되는 것이다.
전세계의 연간 석유생산량이 270억 배럴이니 미국이 세계 석유 생산량의 25%를 소비하고 15%를 수입하는 셈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석유를 수입하는 이유는, 미국의 산유량은 해마다 감소하는 반면 미국에서 석유를 가장 많이 먹어치우는 자동차문화는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웃는 ‘늙은 유럽’의 석유소비는 지난 10년간 거의 늘지 않았는데 미국의 석유소비는 지난 10년간 17%나 증가했다는 것은 그들의 끝없는 석유 갈증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 아직도 석유가 풍부하게 묻혀있다는 소문을 믿는다. 이에 따르면 미국에서 석유를 그렇게 많이 수입하는 이유는 자기네 것은 남겨 두었다가 석유고갈 사태가 닥쳤을 때 꺼내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땅 속에는 얼마나 많은 석유가 묻혀있는 것일까? 소문이 믿을 만하다면 미국인들이 수십년 이상은 충분히 쓸 수 있는 양이 남아있어야 한다.
***미국내 석유는 갈수록 감소 - 2020년이면 소비량의 90% 수입해야**
그러나 분석 자료들은 유감스럽게도 소문이 거의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유전은 알래스카와 멕시코만 유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20세기 초부터 석유를 쏟아낸 노쇠한 것들이다. 이들 유전 속에는 이제 석유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산유량도 1970년에 최대값에 도달한 후 감소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그동안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전체 산유량은 33억배럴에서 28억 배럴로 15%나 감소했다. 이에 비례해서 수입도 꾸준히 늘어나 현재 전체 소비의 60%를 넘었고, 앞으로 수요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 해도 2020년이면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게 될 전망이다. (ASPO23)
<도표 2>
미국의 거대 유전 중에서 산유량이 늘고 있는 곳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석유 생산을 시작한 멕시코만의 심해 유전뿐이다. 알래스카에서 엄청나게 많은 석유가 쏟아져나온다는 보도가 종종 미국이 석유부자라는 소문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이곳의 산유량도 1980년대 말 연간 7.3억 배럴로 최대값에 도달한 후 급격하게 감소했고, 현재는 작은 유전들에 힘입어 최대 산유량의 절반인 3.6억배럴 수준에서 정체 상태이다.
부시와 석유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알래스카 국립공원에 거대 유전이 숨어있다는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서 탐사가 허용되어 석유가 생산되면 연간 7억 배럴 가까운 양이 추가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 전체 석유 소비량의 10%도 안되는 양이다. 특히 본격적으로 석유가 생산될 때까지는 탐사 시작 후 20년은 지나야 하기 때문에, 2020년 경에 석유가 연간 7억 배럴씩 나온다 해도 그 효과는 크지 않다. 수입되는 석유가 여전히 전체 소비의 80% 이상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앞으로 퍼낼 수 있는 석유의 양은 얼마나 될까? 석유 전문가들은 현재 확인된 매장량이 3백억 배럴 쯤 될 것으로 추정한다.(British Petroleum 통계) 300억 배럴은 물론 꽤 많은 양이다. 한국에서 일년에 소비하는 8억 배럴 남짓의 석유와 비교하면 40년은 쓸 수 있는 양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일년동안 소비하는 72억 배럴로 나누면 4,5년이면 없어져버리는 얼마 안되는 양이다.
낙관론자들, 또는 아직도 낡은 사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탐사기술이 개발되면 더 많은 유전이 발견될 것이고, 퍼올리는 기술이 혁신되면 늙은 유전에서도 많은 양의 석유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의 믿음이 현실화된다면 당분간은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석유를 품고 있는 지질층은 특정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 속에 들어있는 석유의 양도 늘어나지 않는 법. 아무리 기술을 개발한다 해도 이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탐사할 만한 곳은 이미 거의 다 탐사되었고, 대형 유전에서는 오래 전부터 남은 석유를 짜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압력을 높이고 점성을 낮추기 위해 가스, 물 또는 뜨거운 증기나 화학물질을 유전 속에 뿜어넣는 기술이 이미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상 어떤 혁신적인 기술이 나올 수 있겠는가?
미국의 석유 매장량이 3백억 배럴밖에 되지 않고 새로 발견될 만한 유전도 별로 없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다. 반면에 미국의 석유 소비량은 감소하지 않는다. 아무리 가스와 석탄 소비를 늘린다 해도, 석유를 태워야만 움직이는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에너지원 중 석유 비중은 21%**
사실 미국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원 중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21%밖에 안된다. 석탄이 33%, 가스가 28%로 석유보다 훨씬 비중이 높다. 그리고 이들 에너지원은 대부분 미국에서 생산되고 외국으로부터는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석유의 비중이 낮다고 해도 석유는 미국사회를 유지하는 교통 네트워크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필요한 석유의 절대량은 계속 증가한다. 결국 미국은 석유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이 침공하려 하는 이라크에는 석유가 얼마나 묻혀 있을까? 영국석유(BP)는 이곳에서 퍼올릴 수 있는 석유의 양이 1천1백억 배럴 가량 될 것으로 추정한다. 전세계에서 퍼낼 수 있는 석유의 양이 1조 배럴 정도니까 이라크에 10% 이상 묻혀 있는 셈이다. 그것도 대부분 질이 좋고 아주 쉽게 퍼올릴 수 있는 것이라는데, 미국이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1천1백억 배럴이면 미국 매장량의 4배이고, 연간 소비량의 15배이다. 여기에다 미국 안의 매장량까지 합하면 20년은 석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 정도의 이득이 돌아온다면 미국으로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이라크를 침공할 만할 것이다. 더욱이 9.11 테러 연루의 정도로 볼 때 미국 석유의 15% 가량을 공급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언제 반미로 돌아설지 모르는 마당에, 이라크를 점령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정말 긴급한 일일 것이다.
<도표 3>
이라크를 침공하면 미국도 인명피해를 입고,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를 본다. 그러나 미국의 석유회사와 부시 측근들은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전쟁이 일어나서 석유가격이 배럴당 60달러 이상 치솟으면 석유회사들은 엄청난 이득을 올릴 수 있다. 전쟁이 오래 가면 세계경제가 타격을 받고 석유소비도 감소하겠지만 가격은 떨어지지 않을 터이니 석유회사들에게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이래저래 좋은 것이다.
부시는 석유로비의 막대한 돈을 정치자금으로 이용해서 권좌에 올랐다. 부통령 딕 체니나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비롯한 부시의 측근들은 오랫동안 석유회사에서 일을 했다. 이들은 모두 석유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 석유가격이 오르고 이에 따라 석유회사의 주가가 오르면 이들도 당연히 큰 돈을 번다. 그러니 부시정권과 석유회사들에게 이라크 침공은 석유로 돈도 벌고 ‘악의 축’도 하나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한국은 에너지원 중 55%가 석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지 모른다. 전쟁으로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로 뛴다고 가정해보자. 유가가 25달러였을 때 석유수입을 위해 지출했던 돈은 연간 2백억 달러였다. 60달러가 몇 달만 지속돼도 2백억 달러가 그냥 날라간다. 수출로 일년동안 벌어들인 돈의 절반 가량이 석유 대금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만일 후세인이 최후의 항전을 하면서 이라크 유전을 모두 불태우고 쿠웨이트와 사우디 북부의 정유시설까지 파괴하면 장기간의 석유부족현상이 벌어지고 유가는 1백달러로 폭등할 수도 있다는데, 그때 한국경제는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떨어지지 않을까? 미국은 전체 에너지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21%밖에 안되지만, 한국은 55%나 된다. 절반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 가격이 오르고 석유부족 현상이 나타난다면 결과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석유 이후'를 대비해야**
우리가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막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무고한 이라크 사람들의 희생을 막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좌절시킬 수만 있다면, 이는 세계평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이라크 다음 목표인 북한에 대한 공격도 결코 미국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정부에서는 미국을 돕기로 결정했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평화를 위한 시위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좌절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석유에 붙들려 있는 한 갈등과 분쟁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록펠러는 석유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어떤 평범한 이라크인은 석유만 없었으면 이라크가 저 지경까지는 안되었을 거라고 한탄했다. 북한핵 위기도 결국 석유가 끊어진 탓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이 기회에 우리도 석유와, 석유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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