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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기업이 국가를 흔드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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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기업이 국가를 흔드는 세상

윤재석의 지구촌 Q&A <2>

Q) 세계화가 그 어느 때보다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요즘 ‘지구촌을 경영하는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국가라는 테두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또 정부의 장악력이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그 자리를 다국적 기업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형국인데요.

아직은 경제부문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만, 다국적 기업(Multinational Corporations), 또는 초국적 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이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례까지 종종 생기기도 해 이제 지구촌의 주역은 다국적기업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들 정도입니다.

A) 그러한 우려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최근 발표되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 13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공개한 2000년 기준 ‘세계 1백대 경제 주체’가 바로 그것인데요. 이 1백대 경제주체 가운데 29개의 다국적기업이 포함됐다는 것입니다.

Q) 경제주체라면 대부분 국가들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업이 3분의 1 가까이 포함됐다는 것은 의외이군요. 그런데 국가와 기업은 회계 처리 방식이 서로 다른데 어떤 기준으로 산정을 한 건가요.

A) 이번 평가는 국가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다국적기업은 세전 수익, 직원 급료, 분할상환 및 감가상각 등을 포괄한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경제 가치를 산정했습니다.

국가의 경제규모를 측정하는 GDP는 부가가치를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고,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데는 통상 매출액이 사용되는데, 매출액은 부가가치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매출액을 부가가치로 환산해 평가한 것이죠.

Q) 다국적기업들이 상위에 랭크됐나요?

A) 아직 그렇지는 않습니다. 1위는 역시 GDP 9조8천1백억 달러를 기록한 미국이 차지했고 2위 역시 예상대로 GDP 4조7천6백50억 달러의 일본이 차지했습니다. 이어 독일, 영국, 프랑스, 중국, 이탈리아, 캐나다, 브라질 및 멕시코가 10위까지의 순위에 랭크됐습니다.

Q)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인가요.

A) 11위인 스페인에 이어 GDP 4천5백70억 달러로 12위에 랭크됐고 서남아시아의 대국 인도가 뒤를 이었습니다.

Q) 다국적 기업 중에서 거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한 기업은 어느 기업이지요?

A) 미국의 다국적 에너지기업인 엑슨 모빌인데요. 2000년 한 해 동안 6백30억 달러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돼 기업으로는 가장 높은 45위에 올랐습니다. 엑슨 모빌의 경제 가치는 44위인 칠레(7백10억 달러)와 46위인 파키스탄(6백20억 달러)의 국가규모와 대등한 수준이죠.

Q) 나머지 28개 기업들의 면면도 관심이 가는데요.

A) 세계 최대의 다국적 자동차업체인 제너럴 모터스(GM)가 5백60억 달러로 파키스탄 다음인 47위에 올랐고. 이어 포드자동차가 헝가리 다음 순위인 55위, 독일의 다임러 크라이슬러(56위), 미국의 전기전자 회사 제너럴 일렉트릭(58위), 일본의 도요타자동차(59위)는 나이지리아(57위)나 쿠웨이트(60위)와 비슷했으며 로열 더치셸(62위)과 지멘스(65위)는 모로코ㆍ우크라이나ㆍ베트남 등과 엇비슷한 규모를 기록했습니다.

Q) 이번 조사에서는 또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이 10년 전에 비해 더욱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가 나왔다던데요.

A) 세계 1백대 경제주체에 포함된 다국적 기업의 숫자가 1990년 24개에서 2000년엔 29개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세계 1백대 다국적 기업이 전세계 각국의 GDP 합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0년 3.5%에서 2000년 4.3%로 크게 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다국적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 활동이 개별 국가에 비해 빠르게 성장함으로써 세계경제에서 다국적 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음을 뜻하는 것이죠.

Q) 어떤 존재이든 힘이 세지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문제가 되지 않나요.

A) 다국적 기업의 발흥은 이제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 위협의 수준, 아니 거의 폭력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해 세계를 한동안 시끄럽게 했던 에이즈치료제 가격 분쟁이죠.

Q) 작년 봄 아프리카와 에이즈 치료제 특허권을 보유한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간의 소송 사건 말이군요.

A) 값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둘러싼 다국적 제약업체들과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개발도상국들간의 다툼은 작년 3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국제 특허를 받은 치료제 대신에 값싼 유사품 수입을 허용하면서 촉발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글락소 스미스클라인, 베링거 잉겔하임 등 39개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남아공의 '약품 및 관련물질 통제법'이 불법 복제품의 수입을 정당화함으로써 국제 특허법률과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3월 5일 프리토리아 고등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지난 97년 제정된 이 법률에 대해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뒤늦게 소송을 제기한 것은 그 후 인도와 브라질에서 이들 제약업체들의 특허가 없는 유사 제품을 대량 생산, 헐값에 공급을 할 채비를 갖췄기 때문입니다.

인도 뭄바이(예전의 봄베이)의 제약회사인 시플라사는 2001년 2월 자사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의 환자 1명당 1년간 복용량을 판매회사에는 1천2백 달러에, 각국 정부에는 6백 달러에 각각 판매하겠다는 의향을 보였고 특히 국제 의료지원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MSF)에는 하루에 1 달러꼴도 안되는 단돈 3백50 달러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가격은 국제 특허를 받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기존 제품의 연간 복용량 가격 1만~1만5천 달러에 비하면 거저인 셈이었습니다.

2000년 한 해 25만여 명이 에이즈로 숨지고,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4백20만여 명이 에이즈 감염자인 남아공 정부는 에이즈 환자의 98%가 약을 사먹을 돈이 없는 극빈자라는 점을 감안해 줄 것을 재판부에 호소했고 MSF와 국제적십자사(ICRC), 옥스팸 등 구호단체들도 다국적 기업들이 에이즈 환자들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며 소송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남아공의 국내법이 무역관련 지적재산권(TRIPS)협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이 더욱 싼 값에 약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며 피고인 남아공 지지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렇게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기를 한 달여, 4월19일 소송을 제기한 39개 제약사들은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철회하기에 이릅니다.

Q) 에이즈 치료제 관련 소송의 경우는 다국적 기업들이 손을 든 경우이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A) 세계 최대의 다국적 담배제조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작년 여름 참으로 해괴한 보고서를 작성해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영국 BBC방송이 2001년 7월 1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 본부를 둔 필립 모리스는 “흡연가들이 빨리 사망하는 것은 국가경제에 이익이 된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체코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체코 담배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필립 모리스는 체코의 흡연가들이 빨리 사망함으로써 97년 한해 동안 의료보험이나 양로시설 비용 1억4천7백만 달러를 절약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었는데요. 이것은 달리 말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담배를 많이 피우도록 해서 백성들이 빨리 죽게 되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느냐는 어처구니없는 궤변인 셈이죠.

금연단체들은 필립 모리스가 체코정부에게 “자, 보시오. 우리가 비용이 많이 드는 노인을 처리하는 걸 도와주지 않습니까? 흡연 규제를 완화하슈”라고 유혹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필립 모리스 측은 “이 보고서는 흡연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기보다 흡연자들이 사망하기 전 들어가는 비용과 노인들을 장기적으로 부양하는데 드는 비용을 비교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전세계 1백50여 개국에 17만8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 최대의 담배제조업체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200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원으로부터 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흡연가에게 흡연의 위험성을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0억 달러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는 상황에서 그런 엉뚱한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Q) 국가를 상대로 노골적인 압력을 넣거나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있죠?

A) 작년 2월 중순 자동차 업체 포드와 닛산, 통신회사 마르코니, 화학회사 유니레버, 휴대전화업체 보다폰 등 다국적 기업 대표 및 은행 대표들은 유로화에 대한 파운드의 강세로 영국이 투자 매력을 잃고 있다면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유럽단일통화체제, 즉 유로 가입을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물론 올 1월부터 유럽 13개국에서 전면 통용되는 이른바 유로랜드에 영국이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정간섭 아닙니까.

멀리 갈 필요 있나요. 지난번 개각때 물러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약값 인하 방침을 밀고 나간 자신에 반감을 가진 다국적 제약사의 압력 때문에 밀려나게 됐다고 주장한 것도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개연성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Q) 다국적 기업들이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사례도 적지 않죠?

A) 다국적 기업들이 전세계에 걸쳐 점점 더 국가처럼 행동하게 된 것은 이제 기정사실입니다. 이들은 선거자금 제공 등을 통해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서조차 정치과정을 지배할 뿐 아니라 분쟁이 있는 중남미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경우는 게릴라 지도자들과 협상을 하고, 개발도상국의 경우 학교와 도로를 건설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정부가 할 수 없거나, 할 의지가 없는 나라에서 노동기준까지 설정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신발제조업체인 리복 인터내셔널은 1997년 아동 착취로 악명 높은 파키스탄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령기의 공장노동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리복은 자사 상표의 축구공이 어린이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규칙을 정해 지키고 있습니다.

마약 밀수와 관련, 게릴라와 미국정부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콜롬비아에서는 2000년 3월 미국 기업인 두 명이 미 국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게릴라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Q) 이 같은 추세가 앞으로도 더 심화될까요?

A) 앞의 예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점점 비대해져 국가를 대체하는 쪽으로 점점 옮겨가는 형세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들입니다.

전문가들은 국가의 권력이 점차 약해지는 대신 전세계를 네트워크로 연결한 다국적 기업들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은 세계화 과정이 21세기의 세계무대에서 민족국가가 아닌 기업을 주역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런 추세는 역전시키기 어려운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죠.

Q) 그렇다면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막을 적절한 대안은 없는지요.

A)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개별국가의 민족주의화, 또는 국수주의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주로 개도국에서 할 수 있는 방식인데 중국의 경우 지난 2000년 중국광고시장 10위권에 코카콜라나 프록터 앤 갬블(P&G) 등 다국적 기업들의 이름 대신 중국 국내기업들이 순위를 모두 휩쓰는 기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순전히 중국 국내기업들이 소비자들에 대해 국수주의를 가미한 대규모 마케팅 전략을 펼쳤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도 되구요.

현재로서는 민간 기구들의 국제연대를 통한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국적 기업과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국제기구 및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서방 강대국을 통틀어 한 묶음으로 놓고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을 통해 이들의 횡포를 질타하고 태도변화를 촉구하는데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효시가 지난 1999년 11월 30일 WTO 각료회담 개막전 전개된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라고 할 수 있죠.

프랑스의 농민운동가 조세 보베가 중심이 된 반세계화 연대 비정부기구 세력들은 각료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인 11월 30일 시애틀 시내를 점거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임으로써 다국적 기업과 그들의 옹호세력인 WTO, 그리고 회원국 참석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결국 본 회담에 들어가기도 전에 WTO각료회담이 서둘러 폐막하게 되면서 지구촌은 반세계화, 반다국적 기업 세력들의 저항이 일과성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하게 됩니다.

그후 ▷2000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2000년 2월 태국 방콕의 유엔무역개발위원회(UNCTAD)회의 ▷2000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 ▷2000년 6월 스위스 UN사회개발회의 ▷2000년 9월 체코 프라하의 IMF-IBRD 회동 ▷2000년 10월 서울 ASEM 총회 ▷2000년 12월 프랑스 니스의 EU정상회담 ▷2001년 1월 스위스 취리히 WEF ▷2001년 4월 캐나다 퀘벡 아메리카 정상회담 ▷2001년 6월 스웨덴 예테보리 EU-미 정상회담 ▷2001년 6월 24일 샌디에이고 바이오테크놀로지박람회 ▷2001년 8월 이탈리아 제노바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 ▷2002년 3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EU 정상회담 등 국제대회에서 비정부기구들의 연대로 반세계화 시위, 반다국적 기업 시위는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특히 올 1월 31일~2월 5일 미국과 브라질에서 각각 열린 WEF와 세계사회포럼(WSF)은 각각 선진국이면서 풍요의 상징인 미국의 경제중심지 뉴욕과 개도국으로 경제 및 각종 사회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렸다는 상징성 외에도, 서로 이해가 상치되는 세계화 옹호세력과 세계화 반대세력의 첨예한 공방이 아메리카 대륙을 진동시켰다는 점에서 관심거리였습니다.

이 두 포럼장 근처에서도 역시 다국적 기업과 국제기구의 일방적 세계화 횡포를 질타하는 시위가 예외 없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다국적 기업 대표들은 드디어 반세계화 세력들의 목소리를 서서히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다국적 기업과 세계화에 저항하는 이른바 '시애틀 맨(Seattle men)'과 다국적 기업가 및 세계화 옹호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다보스 맨(Davos men)'간의 격돌은 앞으로도 만만치 않은 대결구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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