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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기표는 부메랑을 던졌다"

'노무현 언론관' 관련, 강준만 교수의 반론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의 언론관에 대한 강준만 교수와 장기표 푸른정치연합 대표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강 교수는 지난 달 말 프레시안에 장 대표의 반박문에 대한 반론의 요지를 보낸 데 이어 당시 약속한 대로 최근 발행된 월간 ‘인물과 사상’ 6월호에 장기표 대표에 대한 장문의 반론을 제기했다.

<사진>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는 ‘김대중과 장기표: 한국 민주화 투사들의 비극’이란 제하의 반론을 통해 장 대표의 비판이 강 교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관련해 큰 충격을 주었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충격의 원인을 “내가 알고 있던 장기표의 글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에, 나로선 왜 장기표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 점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공적 인물이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여건에서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할 때에 그의 판단력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강 교수는 이는 ‘장기표는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강 교수 자신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면서 다소 착잡한 명상에 사로잡혔었다’고 말했다.

장 대표에 대한 강 교수의 비판 골자는 첫째, 장 대표는 과거 민주화투쟁과 민중운동 경력이 오늘날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를 면책시켜 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해야 하는데 스스로 강 교수가 김대중 정권의 여러 실정을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부메랑을 던지고 있다.

둘째, 장 대표는 ‘조중동’과의 싸움이나 호남차별 등의 문제에 대해 자신과 강 교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편향 대 편향’의 이분법적 구도로 단정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김대중 광신도’라는 망언을 통해 폭력성의 극을 치닫고 있다.

셋째, 장 대표는 자기중심적인 단순성, 즉 지식인의 정서와 행태로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차악’ 또는 ‘차선’ 비판에 몰두하면서 결과적으로 ‘최악’을 돕고 있다.

넷째, 장 대표는 강 교수의 ‘김대중 비판’과 수구신문에 대한 책임론 등에 대한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비판하는 ‘파렴치의 극치’를 범하고 있다.

다섯째, 장 대표는 ‘김대중’이라는 괴물을 하나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을 재단하는 기이한 형태의 우상 숭배자이며 “노무현 후보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된다”고 규탄하는 신념의 소유자다. 그의 사고방식이 무섭다.

여섯째, 장 대표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선악 이분법은 안된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전면적 지지나 반대는 있을 수 없으며 선별적 지지와 반대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 대표의 금욕주의적 수준의 도덕성이 균형감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강 교수는 결론으로 "장 대표의 현명한 처방을 기대한다"며 끝을 맺었다. 장 대표의 재반론이 기대된다.

다음은 ‘인물과 사상’ 6월호에 실린 강준만 교수의 장기표 대표에 대한 반론 전문.

***김대중과 장기표: 한국 민주화 투사들의 비극**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

장기표 푸른정치연합 대표(이하 존칭 생략)께서 나에게 <강준만 교수의 ‘수법’이 참으로 놀랍다!>는 제목의 비판을 주셨다.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공정성의 차원에서, 내가 받은 충격을 되돌려 드리고 싶다. 제발 여기서 나이나 과거의 투쟁 경력을 따지는 ‘편파성’을 개입시키는 분들이 없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앞으로 그렇게 당할 것이므로 이건 크게 보아 매우 공정한 게임이다.

그러나 내가 받은 충격은 사적(私的)인 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거니와 개인적으로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나의 충격은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글은 내가 알고 있던 장기표의 글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에, 나로선 왜 장기표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그 점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한 공적 인물이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여건에서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할 때에 그의 판단력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나는 이 의문이 장기표는 물론 김대중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앞으로 노무현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아니 나 같은 사람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 다소 착잡한 명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를 우리 모두의 숙제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장기표는 내가 『한겨레』 4월 24일자에 기고한 <노무현 씨의 언론관>이라는 칼럼을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선 그 칼럼을 여기에 그대로 싣겠다.

***노무현 씨의 언론관**

“너네들, 내일 모레면 끝이야. 국민회의ㆍ국민신당 너희는 싹 죽어, 까불지 마. 내일 모레면 없어질 정당이…….”

이 명언(?)은 1997년 12월 16일 『조선일보』의 대선 왜곡 보도에 항의하는 국민신당 당원들을 향해 김대중 주필이 취중에 내뱉은 말씀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김 주필의 ‘권력중독증’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3월 4일 김 주필이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김 주필이 일선에서 물러나 ‘권력 금단’ 증상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 편집인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칼럼을 써댔으며 어느 강연회에선 노무현 후보의 부상에 대해 이른바 ‘김심 음모론’을 제기하는 등 맹렬한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 대통령은 야당 시절부터 김 주필에게 너무 소심하게 굴었다. 그는 김 주필의 ‘김대중 죽이기’에 정면 대응하지 않고 늘 ‘포섭’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청와대에서 두 번씩이나 김 주필을 독대하면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김 주필과 『조선일보』를 그렇게 몰랐을까?

나는 김 대통령의 수구신문에 대한 이런 소심한 태도가 오늘날 김 정권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대통령 아들들과 친인척 비리 의혹을 낳게 했다고 믿는다. 집권 초부터 수구신문과 무서운 긴장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제일 먼저 ‘집안 단속’부터 철저하게 했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처럼 국민을 배신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게 아닌가 말이다.

김 대통령만 수구신문에 대해 소심하게 군 게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 지난 1991년 노무현 씨가 조선일보사와 법정 투쟁을 벌였을 때 김영삼 씨도 “노 의원 그 사람은 무슨 정치를 그렇게 하지?”라고 폄하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 여태까지 정치인들은 속된 말로 수구신문들의 ‘밥’이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구신문과는 무조건 사이 좋게 잘 지내야 한다는 게 철칙으로 통용됐다. 『조선일보』 김 편집인의 ‘권력 중독증’은 바로 그런 토양에서 배양된 병인 것이다.

노 후보의 언론관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가 지닌 언론관의 핵심은 한국정치판의 그 ‘철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수구신문들의 보복이 이만저만 거센 게 아니다. 최근 수구신문들의 노 후보에 대한 광기 어린 공격은 그들의 ‘자작극’이라는 게 분명해졌지만, 수구신문들은 앞으로 계속 치열한 ‘노무현 죽이기’에 나설 게 틀림없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이는 축복이다. 가끔 이상한 말도 하긴 하지만, 이부영 한나라당 후보가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정말 옳은 말을 했다. “조선, 동아가 노 후보와 싸우는 와중에 유념해야 할 사실은 조선, 동아가 형편없는 신문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수구신문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범했던 것과 비슷한 착각이다. 그들은 다수 국민의 김 정권에 대한 혐오와 분노의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걸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의 '노무현 죽이기' 시도가 잘 먹혀 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 후보의 언론관은 그가 기존의 때묻은 '3김 정치'의 틀을 뛰어넘은 사람이라는 걸 잘 말해 주고 있다. 김 정권에 대한 혐오를 아무리 노 후보에게 덮어씌우려고 해도 틀을 뛰어넘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른바 '노풍'은 김 정권의 '계승'이니 '부정'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선 '틀의 초월'인 것이다.

***장기표가 던진 부메랑**

위 글에 대한 장기표의 비판을 조금씩 인용해가면서 답을 드리겠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강준만 교수가 한국언론의 '김대중 죽이기'에 맞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은 좋지만, 자기 입맛에 좀 안 맞는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험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권의 여러 실정에 대해 교묘한 수법으로 호도하는 것을 보면서 저래서는 안 될 텐데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험한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장기표는 "노무현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했다. 이건 '험한 말'이라기보다는 '무서운 말'이다. 나는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회창을 좋아하진 않지만, 감히 "이회창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대(對)수구신문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생기면 이회창의 편을 들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다. 나는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는 식의 절대적 언어가 무섭다. '무서운 말'을 하는 분이 나의 '험한 말'을 꾸짖다니, 나로선 당혹스럽다.

내가 "김대중 정권의 여러 실정에 대해 교묘한 수법으로 호도"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장기표의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수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누가 장기표를 전면 부정하는 식으로 비판한다면 '장기표를 위한 변명'에 적극 나설 것이다. 그럴 때에 누가 나에 대해 "장기표의 여러 과오에 대해 교묘한 수법으로 호도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한다면, 나는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 것인가?

장기표를 김대중과 비교하는 건 장기표에 대한 모독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기표가 부메랑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장기표는 민국당 입당을 비롯하여 그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행보를 보여 왔다. '변절'했다고 해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 김대중의 과거 민주화투쟁 경력이 오늘날 그가 저지르고 있는 과오를 면책시켜 주지는 못한다. 나는 그 점에서 장기표와 생각이 같다. 그렇다면, 장기표 역시 자신의 과거 민주화투쟁과 민중운동 경력이 오늘날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를 면책시켜 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해야 하리라 믿는다.

***장기표의 '폭력'**

<그는 한때 나에 대해서도 험한 말을 해서 내 나름으로 해명을 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여 막무가내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조중동'의 왜곡된 보도가 우리 사회의 양심적이고도 진보적인 세력을 음해하고 있는 터에 강준만 교수 같이 이들 언론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사람(세력)이 있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또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강준만 교수의 글이 너무 편향되어서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어도 '조중동'과 같은 편향된 언론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중동'의 왜곡된 보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내가 보기에 너무 편향되어 있는 '강준만식'의 관점도 없어지기 어렵겠구나 싶어, 어떻게 하면 이런 편향 대 편향의 대결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 본 적이 있으나 합리적 정권이 나와 사회를 전체적으로 정상화하기 전에는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장기표에게 했다는 험한 말은 '호남 차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나는 내 말이 너무 험했다는 걸 인정하며 나의 그런 문제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전히 장기표가 '호남 차별' 문제를 비교적 중요하지 않게 본다는 나의 판단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라는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장기표가 강조하는 나의 '편향성'이라는 건 그러한 개념 정의의 차원에서 빚어진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장기표가 생각하는 '진보'의 개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지만, 그의 생각에 대해 '편향'이라는 딱지를 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나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나와 장기표의 차이를 평화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표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나에게 '편향'이라는 딱지를 선사하고 나와 '조중동'을 동시에 양극에 놓여 있는 '편향 대 편향'의 구도로 단정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광신도'라는 망언**

<하여튼 나는 강준만 교수의 글들이 우리 사회에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더 많이 하고 있어 시정되기를 바라왔으나 잘 시정될 것 같지 않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만 지적해두면 강준만 씨 같은 극단적인 김대중 선생 지지자들이 결국 김대중 선생을 오늘과 같이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하면 강준만 씨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자기도 김대중 선생을 많이 비판해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말하건대 강준만 씨야말로 김대중 선생 광신도들을 많이 만들어 왔고 그것이 오늘의 김대중 선생을 만들어 왔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장기표의 '폭력성'은 여기서 극을 치닫고 있다. 장기표는 진정 민중을 사랑하는가? 나는 그가 추상의 민중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균 처리되고 박제화돼 그 어떤 추태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활자로 된 민중이라는 단어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평생을 민주화투쟁과 민중운동을 위해 헌신해 온 장기표에게 매우 폭력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공정한 발언이라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왜? 적어도 민중을 사랑한다는 사람이라면 '김대중 광신도'라는 표현은 절대 써선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건 망언이다.

서울에 사는 민중다운 민중의 다수는 차별받은 호남인들이다. 그들은 민중이 아닌가? 단지 '김대중 광신도'일 뿐인가? 나는 '김대중 광신도'라는 표현을 경멸적으로 쓰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내가 장기표에게 했던 험한 말이 역시 타당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민국당 입당이라는 최악의 패착을 범했던 장기표의 상태는 비참하지 않은가? 극단적인 장기표의 지지자들이 결국 장기표를 오늘과 같이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은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게다. 그 책임은 장기표 혼자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기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극단적인 '장기표 광신도'들인가? 그렇진 않을 게다. 장기표의 공과(功過)를 따지면서 그래도 장기표의 과거 투쟁 경력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장기표의 지지자들을 향해 "당신들이야말로 장기표를 망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장기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과연 동의할 수 있을까?

장기표는 "자기도 김대중 선생을 많이 비판해 왔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답해 주기 바란다. 나의 김대중 비판을 얼마나 읽었는가? 나는 장기표가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신뢰는 갖고 있기에 묻는 말이다. 나는 장기표가 나의 김대중 비판을 거의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글 읽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 이거 우리가 꼭 피해야 할 일이다.

***장기표의 특권 의식**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강준만 씨가 노무현 씨에 대해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어 이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아침 『한겨레』를 보니 <노무현 씨의 언론관>이란 제하에 강준만 씨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아무리 노(무현) 후보에게 덮어 씌우려 해도 틀을 뛰어넘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른바 '노풍'은 김 정권의 '계승'이니 '부정'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선 '틀의 초월'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조중동'이 김대중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지 않는 노무현 씨를 아무리 죽이려 해도 그것은 노무현 씨에게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무현 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가 국민적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도 "내가 말할 시기는 조금 이르고, 대통령의 입장 표명도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하면서 "검찰에서 원칙적으로 잘 처리하면 되고, 조사처리 과정이 잘못되면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만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씨의 이런 태도는 바로 강준만 씨가 말하는 노무현 씨의 '틀의 초월'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은 온 나라가 김대중 대통령 세 아들 문제로 들끓고 있는데도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다시피한 사람이 "말할 시기가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하지 않고 또 대통령의 입장 표명도 아직 이르다고 말해서 되겠는가? 이런 잘못된 태도를 합리화해주는 것이 강준만 교수가 말하는 "'계승'이니 '부정'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선 '틀의 초월'"인가? 즉 '틀의 초월'이란 이름 아래 부정부패에 대해 눈을 감아도 된단 말인가?

결국 강준만 씨는 노무현 씨의 이런 잘못된 행태를 합리화해 주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바로 이런 잘못된 '옹호'가 노무현 씨로 하여금 잘못된 정치를 하게 하고 말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런 맹목적인 옹호가 자기를 면책시켜 줄 줄 알고 잘못된 정치를 하다가 오늘 이 지경에 처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중동'의 '김대중 죽이기'가 김대중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강준만 씨 같은 맹목적 추종자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장기표의 단순함이 부럽다. 대통령의 아들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선 『노무현과 자존심』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문제에 대해선 장기표의 분노보다는 나의 분노가 몇 배 더 뜨거울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정권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걸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걸 그 책에서 주장했다는 걸 아울러 말씀드린다.

나는 장기표가 좀더 솔직해지기를 바란다. 장기표는 "노무현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분이다. 그는 그 신념의 실천 차원에서 노무현이 몰락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닌가?

'틀의 초월'은 장기표가 의심하는 바와 같은 수준의, 저급한 '김대중 면책론'이 아니다. 아니 그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하다고 생각하는가? 노무현이 나서서 한 마디 하면 김대중이 면책되지 않고, 노무현이 침묵하면 면책되느냐 이 말이다. 김대중이나 장기표와 같은 민주 투사들 덕분에 이 나라는 민주화되었다. 그 누구건 '면책'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장기표는 그걸 모르는가? 행여 김대중이 면책될까봐 불안한가?

매 정권마다 계속 반복되는 일이라면, 무언가 좀 크고 넓게 봐야 할 것 아닌가? 원인 규명과 대안 제시에 주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만의 하나, 장기표가 대통령이 되면 그런 의미의 '틀의 초월'을 하지 않을 생각인가? 장기표가 하려고 하는 걸 노무현이 하면 안 되는가?

장기표는 김대중이 저지른 과오의 원인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겨우 김대중을 지지하는 '광신도'들 때문에 김대중이 그렇게 되었다는 수준의 망상만을 반복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박정희 잘못된 것도 '박정희 광신도'들 때문이었고, 전두환 잘못된 것도 '전두환 광신도'들 때문이었고, 김영삼 잘못된 것도 '김영삼 광신도'들 때문이었고, 장기표 잘못된 것도 '장기표 광신도'들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광신도'는 오직 김대중만 거느리고 있는 것인가?

과오의 원인에 있어서 '김대중의 비극'과 '장기표의 비극'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김대중은 나름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장기표는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장기표로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겠으나, '한국 민주화 투사들의 비극'이라고 하는 관점에선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자기 중심성'이다. 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하는 독선이다. 그 점에서 김대중과 장기표는 다를 바가 없다. 그건 일종의 특권 의식이기도 하다. 김대중의 특권 의식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지만, 지금 장기표가 문제삼는 건 그의 도덕적 해이다. 내가 문제삼는 장기표의 특권 의식은 '현실 정치인' 또는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명백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자기 중심의 정치 담론으로 일관하면서 급기야 "노무현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누구 좋으라고? 이회창 좋으라고? 아니다. 장기표는 자기 좋으라고 한 소리일 게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이회창과 노무현의 비교 평가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대한민국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그 처절할 정도로 나이브한 그의 단순성은 김대중의 도덕적 해이 못지 않은 비극인 것이다.

장기표가 개탄해 마지않는 노무현의 문제는 노무현이 나이브하지 않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단지 그 정도다. 타락의 징후는 아니다. 김대중 스스로 '김대중 죽이기'를 하게끔 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다소의 시차는 있을 망정 그 사건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게끔 돼 있다. 노무현이 채찍을 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다. 장기표는 노무현이 자기처럼 김대중을 공격하기를 바라겠지만, 그러는 장기표는 과거 다른 정당 활동하면서 직면했던 숱한 문제들에 대해 그런 왕성한 내부 비판을 공개적으로 했었는지 자문자답해 보기 바란다.

장기표의 잣대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지식인의 잣대다. 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장기표는 존중할 수 있지만, 그가 자꾸 지식인의 정서와 행태로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차악' 또는 '차선' 비판에 몰두하면서 결과적으로 '최악'을 돕는 것에 대해선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장기표는 글을 읽지 못하는가?**

<결국 강준만 교수와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결국 '조중동'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강준만 교수의 잘못된 태도는 이 글의 윗부분에서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강준만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수구신문에 대한 이런 소심한 태도가 오늘날 김(대중) 정권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대통령 아들들과 친인척 비리 문제를 낳게 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 세 아들의 부정비리 등의 문제가 수구언론 때문이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기표는 글을 읽지 못하는가? 나는 김대중의 '태도'를 문제삼았는데, 왜 장기표는 그걸 '수구언론 때문'이라고 바꿔치기를 하는가? 자기가 바꿔치기 해놓은 말에 자기가 놀라다니 그것 참 이상한 버릇이 아닐 수 없다.

장기표는 수구신문들이 처음부터 진실로 성역 없는 김대중 비판에 임했다고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신범이 김홍걸의 문제를 폭로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홀로 외롭게(?) 뛰고 있을 때에 수구신문들은 구경만 했지 그 어떤 신문도 그걸 직접 파헤쳐 보겠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수구신문들이 진실로 성역 없는 김대중 비판에 임하는데도 김대중이 아들 문제를 그렇게 방치하는 도덕적 해이를 범할 수 있었을까? 어찌 된 게 현실 정치를 한다는 장기표가 나보다 더 현실 정치판을 모르는지 안타깝다. 장기표는 남들이 보기엔 원수처럼 으르렁대며 싸우는 사이일지라도 상호 묵계된 최소한의 '양해 사항'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가? 왜 역대 정권들의 모든 주요 비리가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지 장기표는 그 이유를 정녕 모르는가?

김대중의 수구신문에 대한 소심한 태도는 장기표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외람되지만, 나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일단, 논의의 편의를 위해 내가 '험한 말'을 한다는 장기표의 비판을 수용하겠다. '험한 말'을 하기 위해선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다. 예컨대, 가급적 언행일치를 하려고 애를 써야만 한다. 내가 '험한 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통제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화기애애 이데올로기'라는 게 있다. 털면 피차 먼지 나는 사람들끼리 서로 고운 말이나 주고받으면서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 살 듯이 죽을 때까지 화기애애하게 살자는 게 이 나라 제1의 처세술이다. 아닌가? 그게 바로 이 나라가 자랑하는 총체적 부패구조의 최대 안전판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의 소심한 태도는 수구신문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다. 평생 정치나 행정만 한 고위 공직자들이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진 것에 대해 김대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왜? 자신도 그렇게 축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선 소심해지는 것이다. 나는 김대중의 그런 구린 구석을 완곡하게나마 지적하고자 했던 것인데, 장기표는 어이하여 함부로 상상의 날개를 펴고 그렇게 못된 창작에 임하는가?

***파렴치의 극치**

<강준만 교수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자.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부터 수구신문과 무서운 긴장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제일 먼저 '집안 단속'부터 철저히 했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처럼 국민을 배신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게 아닌가 말이다"라고 질타 아닌 질타,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고 있다. 강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언론과 무서운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집안 단속'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집안 단속'을 하지 않은 원인이 언론에 있단 말인가? 굳이 무서워 집안 단속을 해야 한다면 언론보다 국민이 더 무서운 것이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이 이토록 부끄럽게 되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지 그 책임을 '수구신문'에 돌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파렴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장기표는 집권 전의 김대중이 매우 청렴결백한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왜 이렇게 시치미를 떼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아니 다시 궁금한 게 있다. 장기표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가? 내가 언제 김대중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모든 책임은 수구신문에게 있다고 말했는가? 장기표는 내 칼럼의 제목은 보았는가? 그건 김대중과 김영삼과 노무현의 언론관을 비교하는 성격의 글이었다. 왜 우물에 와서 숭늉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가? 파렴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누가 진짜 '김대중 광신도'인가?**

<나는 강 교수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김대중 정권은 집권 후 '수구신문'과 무서운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인가? 요즘은 내가 보기에도 '조중동'이 김대중 정권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비판적인데 김대중 대통령은 왜 '집안 단속'이 아니라 '집안 정리'를 하지 못하는가? 수구신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데 왜 김 대통령은 언론은 물론 국민 모두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가?>

장기표는 '엎질러진 물' 앞에서 웃는가? 물이 엎질러지기 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걸 두고서 왜 그런 식으로 억지를 쓰는가? 김대중의 미온적인 대응에 대해선 나는 장기표의 생각보다 더 강경하다. 내가 '언론관'을 다룬 그 칼럼에서 나의 그런 생각을 밝히지 않은 게 그렇게 억울한가? 내가 장기표의 어떤 과오에 대해 어떤 이유 한 가지를 제시하면 그게 장기표를 무조건 옹호하는 게 되고 맹목적인 '장기표 광신도'가 되는 건가? 그리고 장기표가 자신의 과오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것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가? 긍정이건 부정이건, 과연 누가 진짜 '김대중 광신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장기표의 우상 숭배**

<결국 강준만 교수는 '수구신문'이란 괴물을 하나 만들어 놓고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을 재단하고 있다. 기이한 형태의 우상 숭배가 아닐 수 없다. '수구신문'이 김대중 선생과 '무서운'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 '김대중 죽이기'를 한다고 야단이고, '수구신문'이 김대중 선생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김대중 선생의 실정에 대한 책임(원인이라 해야 할 것 같지만)이 '수구신문'에 있다고 야단이다. 결국 자멸하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장기표는 '김대중'이라는 괴물을 하나 만들어 놓고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사물을 재단하고 있다. 기이한 형태의 우상 숭배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네티즌은 내가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더니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장기표가 나에 대해 말하는 '우상 숭배'가 겨우 그 수준이라니 내가 봐도 안타깝다.

장기표는 '정책 비판'과 '비리 비판'조차 구분 못하는가? 수구신문들이 김 정권의 '정책 비판'에 주력해 왔는가, 아니면 '비리 비판'에 주력해 왔는가? 전자의 비판에 대해 '김대중 죽이기'를 한다고 비판하는 것과, 수구신문들이 후자의 비판을 제대로 하지 않는 걸 비판하는 게 모순이고 '자멸하는 길'이라는 것인가? 사람이 왜 이렇게 단순한가?

***장기표의 사고 방식이 무섭다**

<그런데 어쨌든 강준만 교수도 지금 김대중 정권이 '국민을 배신하는 짓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규탄해야지 난데없이 그 원인을 '수구신문'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잘못이 '수구신문'들 때문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설사 그런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혹 개혁을 하려는데 '수구신문'들이 개혁을 저지해서 개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집안 단속' 못한 것을 '수구신문'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장기표의 글 읽는 솜씨는 아무래도 소가 웃을 일이다. 왜 자꾸 자신의 입맛에 맞게 창작을 하는 걸까? 앞서 지적했기에 더 이상 반복하진 않겠지만, 앞으로 장기표가 누구의 글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그 글을 서너 번 읽어 보거나 인터넷에 올리기 전에 제3자로 하여금 미리 읽어 보게끔 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보기엔 장기표도 나와 같은 다혈질이다. 다혈질은 인터넷에 곧장 글을 올리는 것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찌됐건, 여기서 장기표는 자기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는 앞서 나를 김대중의 '맹목적 추종자'라고 규정했다. 그래놓고선 "어쨌든 강준만 교수도 지금 김대중 정권이 '국민을 배신하는 짓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하는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나? 세상에 어떤 '맹목적 추종자'가 감히 자신의 추종 대상을 향해 '국민을 배신하는 짓'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장기표의 뜻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는 그가 평생을 원인 분석이나 대안 제시보다는 '규탄'에 바쳐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규탄'에 몰두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장기표의 규탄 대상은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나의 김대중 비판을 인정하면서도 나의 노무현 지지가 영 못마땅해 자기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억지 비판을 해댄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는 "노무현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신념의 실천을 위해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일 망정 한 인간을 향해 그토록 '무서운 말'들을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장기표의 사고 방식이 나는 무섭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의 '김대중 죽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의 실정이야말로 '수구신문'들을 고무하는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구신문'들의 횡포가 미워서라도 정치를 잘했어야 한다. 아니 수구신문들의 근거 없는 왜곡과 비방이 악의에 찬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도 김 대통령은 정치를 잘했어야 한다. 즉 적어도 아들들의 비리라도 막았어야 한다. 강준만 씨에게 바란다. 김대중 선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바로 그 방법으로 또다시 노무현 씨를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수구언론의 조폭적 횡포가 있는 한 강준만 씨의 주장이 먹혀들 여지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수구언론'의 '왜곡적' 행태를 답습해서야 어찌 수구언론을 이길 수 있겠는가? 나의 이 점잖음이 별로 힘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수구언론'의 '조폭성'을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강준만 교수의 현명한 처방을 기대한다.>

"노무현 후보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분이 "노무현 씨를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씀이다. 진실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노무현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장기표가 원하는 일이 아닌가?

수구신문의 왜곡적 행태와 '조폭성'은 내가 아닌 장기표가 저지른 것임을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제발 다시 말씀드리지만, 앞으론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 주시기 바란다. 독한 말을 많이 해서 나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장기표의 '폭력적 언어'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음을 믿는다. 나는 장기표의 민국당 입당 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건 그만 두기로 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나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각기 성격은 크게 다르지만 김대중과 장기표의 비극을 한국 민주화 투사들의 비극으로 이해하면서 역사와 세월의 비정함에 대해 몸을 떨게 된다. 이 비판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나는 독자들께 약속드린다. 나는 나의 모든 활동에 대해 그 어떤 기득권도 주장하거나 누리지 않겠다. 기득권을 가지고 누리려 드는 건 일종의 습관이다.(이 표현은 브라질 노동자당의 대선후보 룰라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원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만일 우리가 기득권을 가지는 습관이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켄 실버스타인ㆍ에미르 사데르, 최규엽 옮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브라질 노동자당에서 배운다'(책갈피, 2002), 226쪽.) 그 습관을 깨부수자. 나에겐 '역사와 전통'도 없다. 나는 늘 오늘부터 다시 시작한다. 어느 순간 내가 큰 과오를 저지르게 되면 나는 그걸로 끝이다.

나는 대통령 김대중도 그런 자세를 가져 주기 바란다. 이제 자신의 과거에 대한 특권 의식을 버리고 스스로 무서운 '김대중 죽이기'에 임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드린다. 설사 임기를 못 채우는 한이 있더라도 답은 '투명성' 이외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그것이 김대중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거름 삼아 새로운 꽃이 피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걸어온 인생의 정신에 부합되리라 믿는다.

김대중의 역사적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는 부당한 비판에 대해선 누군가가 주장하는 '김대중 광신도'의 정신으로 나부터 적극 옹호하겠다. 김대중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역사적 가치를 소중히 하면서 피땀을 흘려온 사람들을 위해서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김대중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추상처럼 엄격하길 바란다.

***금욕주의적 선악(善惡) 이분법은 안 된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다. 나는 장기표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선악(善惡) 이분법을 버려주기 바란다. 이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나는 『조선일보』를 격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신문에도 많은 장점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조선일보』는 악(惡)이고 나는 선(善)이라는 식의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아주 존경받는 진보적 인사가 한 분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공적(公的)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적(私的) 삶에선 대단히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장기표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그 사람을 단칼에 베는 식의 평가를 내릴 수 있겠는가? 그의 공적 활동에 대해선 지지와 찬사를 보내면서도 그의 사적 삶에 대해선 비판을 하는 건 모순인가?

나는 김대중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알고 있다. 어쩌면 장기표가 아는 이상으로 더 많이 알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점에 관한 한 김대중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면서 민족의 화해를 위해 애써 온 것에 대해 지지와 더불어 존경을 보낸다. 요즘 노동ㆍ진보 진영은 김대중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고 있지만, 나는 그런 평가에도 전면 동의하진 않는다. 김대중이 사회적 약자(弱者)를 위한 애정과 철학이 있다는 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가 한국 민주화를 위해 큰 기여를 해왔다는 것도 감히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나는 장기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균형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전면적 지지나 전면적 반대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선별적 지지와 선별적 반대만이 가능할 뿐이다. 사안의 대소경중(大小輕重)을 따지는 슬기도 꼭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장기표와 나의 차이는 바로 그런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차이에 대해 논쟁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논쟁이라는 것이 겨우 '광신도'니 '맹목적 추종자'니 '파렴치'니 하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이루어져야 하겠는가?

나는 장기표의 엄격한, 내가 보기엔 거의 금욕주의적인 수준의, 도덕성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것을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장기표의 균형 감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총체적인 정세 및 상황 판단 미숙은 그런 도덕성 문제를 능가하는 결함일 수 있다. 나는 장기표가 이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앞으로 그의 현명한 처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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