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노무현 죽이기’와 ‘이회창 띄우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은 노무현 신드롬에 대해 마땅한 대처방안이 없어 그동안 고민하던 조선일보가 더 이상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몰락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듯 23일자 사설과 김대중 칼럼을 동원하며 본격적인 한나라당 코치에 나선 것이다.
조선일보가 노무현 태풍을 막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수세에 몰린 이인제 후보측이 제기한 '김심 배후설'과 반DJ 정서. 23일자 조선일보 사설 ‘민주 주자들 왜 ‘진짜’엔 말이 없나?’를 보자.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주자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중 있었던 각종 정책실패와 측근비리, 친∙인척 논란, 인사정책, 이른바 게이트 시리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말이 없으니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인가?”라며 “‘DJ시대 4년’의 그런 적폐와 유산들의 승계자나 옹호자가 되려 하는가, 아니면 단절자나 척결자가 되려 하는가?”라고 질책한다.
조선일보가 제기한 문제의식 자체를 부정할 일은 아니다. 현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식상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에 대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경선주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는 있다.
문제는 조선일보의 의도다. 조선일보와의 적대관계를 천명한 노무현 후보에 대한 폭발적인 대중적 지지가 반가울 리 만무한 조선일보가 노풍 차단을 위해 노무현과 DJ의 단절을 부추기며 교묘한 방법으로 민주당의 분란과 한나라당의 단합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일보가 동원한 것은 예의 ‘국민’. “국민은 알고 싶다”는 조선일보의 질문은 “DJ 시대의 연속이냐, 수정이냐, 극복이냐, 단절이냐?”로 압축된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국민적 관심사’가 과연 대한민국 국민의 관심사일까.
노풍의 핵심은 현실 정치인들의 구태에 지친 국민들의 정치환멸이 희망으로 바뀐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인물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구나’라는 예상밖의 기대가 폭발적인 호응과 지지를 바뀌며 노무현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고비용 정치제도라는 우려를 낳았던 민주당의 국민경선제가 축구경기보다 더 재미있는 정치게임으로 반전된 이유가 바로 노풍의 확산에 있다.
폭넓은 지지로 확인되고 있는 노풍을 통해 한국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국민적 관심사는 차라리 헌정사상 처음 시행되는 민주당 경선이 과연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정치축제’가 될 수 있을까, 이인제와 노무현 중 누가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민주당 경선주자들에게 DJ와의 단절을 촉구한 조선일보의 속내는 한나라당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주 주자들 왜 ‘진짜’엔 말이 없나?’ 사설 바로 밑에 배치한 ‘창∙반창 왜 ‘국민’은 보지 않나?’라는 사설은 조선일보가 불편부당이라는 원칙을 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에게 주는 훈수로 일관하고 있는 이 사설은 “(한나라당 내분이 지구전 양상으로 바뀌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회창 총재에게 필요한 덕목은 정치적 상상력”이라며 “정치적 에너지의 계산법을 ‘덧셈의 차원’에서 ‘곱셈의 차원’으로 비약시키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리더에게 당 안팎의 애정과 응원은 흘러 고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부총재 지망자들과 비주류에게는 “명분은 ‘당의 민주화’지만 속내에는 또다른 실리타산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며 “그런 의심의 눈길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은 사익과 사적 감정을 뒤로 밀치는 것”이라고 타이른다. 왜 이 총재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쳐 정권을 잡아야지 쓸데없이 당내 민주화 같은 명분을 내세워 혼란을 부추기느냐는 준엄한 비판이다.
지난해 민주당 쇄신파 의원들이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박지원 특보의 퇴진을 요구하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할 때 ‘김대중 칼럼’(2001년 11월 3일자)을 통해 ‘DJ의 무장해제’라고 반겼던 조선일보의 태도와는 180도 다르다.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에는 당내 민주화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공교롭게도 23일자 ‘김대중칼럼: 대권과 당권 사이’가 제시하고 있다. 노풍의 배경에 ‘김심’이 있다는 말을 공개석상에서 할 만큼 용기있는 김 편집인은 이 칼럼에서 우리나라의 70년대 이후 현대사중 71년과 97년 대선을 회고하며 대권과 당권이 합쳐졌을 때 정권장악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즉 71년 대선 당시 당권이 분리됐던 “신민당이 거당적으로 그(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를 밀었다면 오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그런 관점에서 최근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측이 97년 당과 후보가 따로 놀았고 이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한 것에는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 편집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민주당 경선을 예로 들어 “누가 후보가 되든 당권이 다른 경선주자 또는 다른 당권경쟁자에 넘어가는 순간부터 당의 모든 기능을 선거전으로 집중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즉 민주당이 대권과 당권을 분리해 올해 대선을 치를 경우 정권 장악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민주당의 정권장악이 어렵다는 김 편집인의 대안은 분명하다. 바로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다. 따라서 당권을 내놓고 집단지배체제를 도입하자는 한나라당내 쇄신파 의원들의 주장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라는 것이다.
김 편집인의 글을 보자. “일부에서는 지금은 민주화 시대이고 또 한나라당에는 대안이 없어 이 총재가 천선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목적치고는 지금 당장 총재직을 내놓으라는 것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정권 장악보다는 후순위의 것이다. 민주당도 당권과 대권의 분리가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이번 대선도 두 후보의 대결일 뿐 두 정당의 경쟁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게 김 편집인의 정치전망이자 바람이다.
마치 이회창 총재의 제왕적 리더십을 인정해야 한나라당의 정권장악이 가능하니 한나라당내 비주류와 쇄신파는 민주화라는 명분을 걷어차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충고다.
사설을 통해 민주당 경선주자들과 DJ의 단절을 꾀하고 한나라당의 내분 수습방안을 충고한 다음, 김대중 칼럼을 통해 당내 수습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지난해 연말 노조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신문에 대해 ‘대통령 만드는 신문’ ‘권력의 편에 선 신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새해엔 정치뉴스를 다루면서 그런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다가올 각종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통해 선택의 틀만 제공해야지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공격하는 보도는 곤란하다. 조선일보는 앞으로 어떤 ‘정치의 해’가 되든 엄정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정치중립을 강조한 바 있다.
노골적으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조선일보의 사설과 칼럼, 그리고 방 사장의 정치중립 선언이 상징하는 불협화음은 예상치 못한 노풍의 확산에 대한 조선일보의 자기 정체성 드러내기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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