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20대부터 14년 일한 뒤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에 걸린 이윤성(41) 씨의 산재를 불승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씨가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된 사실은 인정되나 그 노출량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씨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즉각 반발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 4단독 정재우 판사는 지난 23일, 이 씨가 청구한 '산재 요양급여 불승인 취소 소송'에 대해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이 사건 질병과 원고 업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산재의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재해 당사자)이 입증해야 한다"며 "루게릭병은 현대 의학상 아직 그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 질병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아직까지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살충제, 중금속(납, 수은), 전자기장 등이 루게릭병의 발병 위험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상반된 연구 결과가 존재하는 등 아직 의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원고가 작업 시 이소프로필알코올, 실란, 포스핀, 디클로로실린, 염화규소, 암모니아, 육불화텅스텐, 불화수소, 트리메틸포스파이트, 오존 등과 같은 화학물질과 전자기장에 노출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노출 정도'가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국내 반도체 사업장에서도 이 질병에 걸린 사례가 없어서 인과관계를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반올림은 "이 씨는 14년 동안 검증도 되지 않은 수많은 독성 화학물질과 부산물, 전자기장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다"면서 "노동자가 노출된 사실이 아니라 노출 정도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해서 산재 불승인 근거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노출된 화학물질이나 전자기장에 노출된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주와 국가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또 "루게릭병의 발병 원인이 현대 의학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산재를 불인정한 것은 지나치게 판단 기준이 협소하다"면서 "루게릭병에 걸린 노동자 가운데 납이나 농약(살충제), 전자기장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바 있다"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삼성 반도체에서 일한 중증 질환 피해는 반올림에 제보된 것만 110여 건이지만, 어떤 물질이 어떤 병을 일으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며 "더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병들어 그에 따른 연구 결과가 축적돼야 산재를 인정한다는 법원의 판결은 사후약방문이자 끔찍한 논리"라고 비판했다.
반올림은 "루게릭병은 이 씨밖에 없지만, 루게릭과 같은 신경계 질환인 뇌종양, 다발성 신경염증, 다발성 경화증 등 피해자는 알려진 것만 14명"이라며 "이번 판결은 신경계 질환 환자의 수를 고려하지 않았고, 희귀 질환이 그 특성상 극소수의 노동자들만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윤성 씨는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삼성전자 기흥 공장에서 가장 위험한 업무 중 하나로 꼽히는 화학기상증착 공정의 설비엔지니어 업무를 맡아 20대 초반부터 14년간 일했다.
그러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굳어가는 등 건강이 악화돼 회사를 그만뒀고, 2009년 3월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신경계에 마비를 일으키는 루게릭병은 1년에 10만 명당 약 1-2명에게서 발병할 정도의 희귀 질환이다.
이 씨가 일하면서 접했던 포스핀, 육불화텅스텐, 불화수소 등 화학물질은 신경계, 호흡기 이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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