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력은 아니었다. 친언니 셋은 모두 자녀가 둘씩 있었다. 회사를 쉬고 시험관 아기를 다시 시도해 볼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3월 우연히 임신이 됐다. 결혼한 지 5년 만이었다. 김 씨는 꿈에 부풀었다. "그때는 진짜 천국이었어요."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아이에게 이상이 있을 확률이 80% 이상이라고 했다. 임신 중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상 임신이 아닌 것 같다고,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아기집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큰 병원으로 옮긴 김 씨는 '악성 포상기태 임신' 판정을 받았다. 태반이 될 융모가 변해서 자궁 안에 작은 수포가 포도송이처럼 증식해 태아가 초기에 소멸하는 증상이다. 지난해 3월 30일 김 씨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그 심정은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요."
지난해 4월 15일 그는 악성 포상기태 치료를 위해 회사를 그만둬야만 했다. 수술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4월 25일, 이번에는 '융모암' 진단을 받았다. 포상기태 임신을 한 산모에게 드물게 발생하는 암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김 씨가 '특이 케이스'라고 했다. 4차면 끝난다는 항암 치료를 10차까지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유산·난임으로 고통받는 반도체 노동자들
김은희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15년간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합격해 20세가 되던 1997년부터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화성공장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김 씨가 투입된 공정은 반도체를 최종 테스트하는 공정인 EDS 공정이다.
EDS 공정에서는 웨이퍼 박스를 개봉하고 웨이퍼를 정렬한 뒤, 100℃-300℃에 달하는 고온에서 웨이퍼 위의 칩이 견디는지를 수차례 검사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김 씨는 웨이퍼가 든 박스를 손으로 열 때면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고 했다. 웨이퍼 정렬 작업은 2003년부터 기계화됐지만, 이후에도 고온 테스트는 사람이 했다.
김 씨는 화학약품 처리가 된 웨이퍼를 손으로 직접 만졌다. 고온 테스트를 하는 설비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나왔고, 설비에 손도 자주 데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에 8-12시간씩 야간 노동을 포함한 주야 교대 근무를 했다. (관련 기사 : 사람 잡는 야근…제주의료원 간호사 집단 유산)
김 씨는 "회사에 유산하거나 임신이 잘 안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60-70명으로 꾸려진 김 씨의 조에서만 유산한 동료가 4-5명이었다. 다른 조 동료까지 합치면 7-8명이 유산을 했다고 했다. 대부분은 두세 달 사이에 자연 유산됐다. 다만 "출산을 2주 앞둔 임신 38주에 아이가 사망한 후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심하게는 아이가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애기를 낳고 나서 잘못되는 사례를 한두 번 봤어요. 아는 후배가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나서 갓난아이가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심장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또 아는 동료가 아이를 낳고 며칠 만에 아이가 죽었어요. 다만 그 아이는 유전으로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작업 환경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반올림에 따르면 1990~2000년대 초반까지 노후화된 반도체 공장 수동 설비에서 일했다가 백혈병 등 희귀병에 걸렸다는 제보자는 20여 명에 달한다. 사진은 현대화된 반도체 공장. ⓒ뉴시스 |
"12년 전 아이 떠나보내고 이제는 유방암"
1991년부터 7년 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다가 퇴사한 박영희(가명·40) 씨도 12년 전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이에게 18번 염색체가 하나 더 많다고 했다. 그렇게 결혼 3년 만에 어렵게 가진 아이를 임신 12주 만에 떠나보냈다. 당시 박 씨의 나이는 28세였다.
반도체 공장에 다니는 동료 중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생리통과 생리 불순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박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련 기사 : "나 요즘 월경을 안 해"…16년을 떠도는 공장의 유령들)
"그런 소문은 있었어요. 반도체 라인 다니면 아이가 잘 안 생긴다, 임신해서 라인에 있으면 아이가 기형아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1998년에 결혼하고 퇴사했어요. 당시에는 막연히 (업무) 환경이 태아에게 좋지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아요."
박 씨 역시 난임 클리닉에 다녔다. 생리통이나 생리 불순은 퇴사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임신 중절 수술을 받고 6개월 만에 아이도 들어섰다. 박 씨는 두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11년을 보냈다. 지난해 2월 유방암 판정을 받기 전까지 박 씨는 삼성전자에서 일한 기억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2월 28일 박 씨는 오른쪽 유방 제거술을 받았다.
"설마 이 환경 때문에 제가 암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열아홉 살, 스무 살, 사회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그 작업 환경이 전부인 양 세뇌시킨 거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불쌍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 나가서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때부터 반도체 환경 속에 갇혀 있다 보니 몸이 좋아지겠어요?"
▲ 반올림이 23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전자에서 일한 노동자 10명에 대한 산재를 신청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20여 명 중 13명이 암 등 질병 앓거나 난임 피해자"
박 씨는 뒤늦게 재직 중이거나 퇴사 후에 아픈 동료의 이름을 하나둘 떠올렸다. 제일 먼저 고(故) 이숙영 씨가 떠올랐다. 박 씨는 2011년 1심에서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받은 고(故) 이숙영·고(故) 황유미 씨와 같은 3라인에서 일했었다.
"2007년쯤에 어느 날 후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언니, 숙영이 알아?' 저도 애들 키우고 정신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 후배 때문에 (소식을) 알았어요. '언니 근데 이상해. 숙영이랑 같이 일했던 애(황유미)가, 걔도 백혈병이래. 왜 이렇게 아픈 거야?' 그래서 그때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1995년, 1996년경에 선미(가명)가 융모암이어서 항암 치료를 받고 머리가 다 빠져서 복귀했는데 얼마 못 버티고 퇴사했어요." 융모암은 김은희 씨가 걸린 바로 그 병이다.
박 씨는 동료 가운데 3~4명이 난임으로 고생했다고 말했다. 퇴사 후에 낳은 아이가 심장 질환을 앓는 후배도 있었다.
"수희(가명)라고 후배가 있어요. 폐가 안 좋았어요. 수희가 최근에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언니, 나 폐가 안 좋은 것도 이유가 있나?' 근데 수희 아이가 심장 질환이거든요. 출산 후 아이 때문에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고 했어요. 걔가 '언니 이것(심장 질환)도 (근무 환경과) 연결이 되나?' 하고 묻는 거예요. 수희는 자기가 몸이 안 좋은 것 때문에 아이가 아프게 태어난 것 아니냐고 자책했어요. 나도 근무할 때 사내 커플이 있었는데, 아이가 아파서 병문안 간 것도 기억나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박 씨가 일했던 기흥공장 3라인 엔드팹 동료 20여 명 가운데 13명이 질병을 앓고 있거나 난임 피해자"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백혈병 1명, 위암 2명, 유방암 1명, 두개강 내 저혈압 1명, 갑상선 질환 1명, 갑상선암 1명, 자녀의 심장 질환 1명, 자녀의 백혈병 1명, 난임 4명 등이다.
박영희 씨와 김은희 씨는 지난 23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반올림은 "지난 6년간 생리 불순, 무월경, 무정자증, 불임(난임), 유산, 자녀의 기형 등 다양한 생식독성 피해 제보가 이어졌으며, 이번에 처음으로 불임(난임)에 대한 산재를 신청하게 됐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 : 삼성 반도체·LCD 암 발병자 등 10명, 추가 산재 신청)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그밖에도 포토·식각공정에서 일한 부부가 서너 살 난 자녀의 재생불량성빈혈을 제보한 적이 있었고, 자녀의 백혈병 제보도 한 건 더 있었지만 둘 다 연락이 끊겼다"며 "자녀의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할 수 있는 나라는 덴마크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대만 반도체 공장서 유산, 난임, 자녀의 심장 질환 보고돼
임신예 경희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반도체 산업 연구가 먼저 이뤄진 미국이나 대만 사례를 보면, 반도체 근로자의 유산, 난임, 자녀의 심장 질환 등이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된 바 있다"며 "하지만 자녀의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등 혈액 질환에 대한 근거는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던 대표적인 생식독성 물질로는 에틸렌글리콜에테르가 있다. 이 물질은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모두 쓰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생식독성 피해가 알려지면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임 교수는 "기업들이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사용 물질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반도체 공장들이 이 물질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야간 근무를 포함한 교대 근무 또한 생식 보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 : '이너서클 위험'에 빠진 삼성, 그게 파열되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유산이나 난임에 대해 임 교수는 "화학물질, 야간 근무를 수반한 교대 근무, 장시간 서서 일하는 환경, 업무상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줬을 수 있다"면서도 "다만 사례가 충분히 축적되기 전까지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반도체 노동자의 난임와 유산 사례에 대해서 삼성전자 관계자는 "특별하게 공식적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가족 친화적인 회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올해 3월 11일부터 기혼 여성 임직원을 대상으로 난임 휴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최소 1개월부터 최대 1년까지 총 3회까지 분할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몇 명이 이 제도를 신청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밝히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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