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만 원의 '거대한' 장벽
세금 폭탄론이 승리한 것일까? 박근혜 정부가 수정안을 내놓았다. 세 부담 증가 기준선이 연봉 5500만 원으로 올라갔고 증가액이 연 2만-3만 원에 불과한 5500만-7000만 원 구간까지 포함하면 이번 수정안으로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사람의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28%에서 7%로 준다. 애초 원안에 비해 세입 감소분은 4400억 원이다. 사실상 서민 증세라며 세금 폭탄 공세를 편 민주당의 요구를 거의 수용한 수정안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승리한 것일까? 앞으로 보편 복지 세력이 복지 확대를 위력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근래 무상 급식, 무상 보육, 부분적 반값 등록금이 구현되고, 기초연금 인상과 고교 무상 교육도 시행될 예정인데, 3450만-7000만 원 소득자들에게 부가되었던 4400억 원이 무시무시한 세금 폭탄이라면, 어떻게 수십 조 원이 필요한 보편 복지 공약을 다음 선거에서 내걸 수 있을까?
보수 언론들이 퍼부을 논조가 떠올랐다. '이번 세금 파동을 겪지 않았느냐, 아직 우리나라는 보편 복지를 구현하기엔 조세 동의가 너무 약하다. 눈높이를 낮추어라. 복지 확대 속도를 조정하라. 대한민국에서 보편 복지, 복지국가는 시기상조다'. 혹시 대통령도 이를 복지 공약 축소의 이유로 삼아가지 않을까.
▲ 세금 폭탄론은 '복지 반대론자'들의 좋은 구실이 됐다. 사진은 뉴라이트 네트워크 주최로 2005년 10월 19일 성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세금 폭탄 저지와 알뜰 정부 촉구 대회'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경고 메시지를 뜻하는 노란 카드를 흔드는 모습. 박근혜 대표는 노무현 정부가 상위 1.3%를 대상으로 하는 종부세제를 추진하자 '세금 폭탄론'을 들고나왔다. 대선 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 기조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 질서는 세우고)'였다. ⓒ연합뉴스 |
주말의 반전, 세금 폭탄에서 복지 증세로
그런데 지난 주말을 보내면서 '반전'의 움직임을 보았다. 월 1만 원을 가지고 세금 폭탄론을 꺼내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 복지를 늘리기 위해선 증세 논의도 벌여야 하는 건 아니냐며 비록 일부이지만 복지 시민단체와 진보 언론들이 세금 폭탄론을 경계하면서 복지 증세를 강조했다. (관련 기사 : <"세금 폭탄론? 민주당, 보편 복지 정당 맞나"><세금 폭탄론, 민주당의 정치적 자살 행위!>)
세금과 복지를 함께 결합하는 안목이 등장했고, 이번 세법 개정안에서 우리가 제기할 논점이 소득세가 아니라 법인세 영역에 있다는 점도 주목했다. 세금 폭탄에 의연히 대하는 복지 시민의 균형감도 확인되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설명해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월 1만 원의 추가 부담이 있다. 무거운 가계 부채, 일자리 불안정으로 중간 계층도 생활이 힘든 요즘이라, 1만 원의 무게는 액면가보다 훨씬 무겁다는 걸 알고, 우리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중간 계층이 일부라도 세금 책임에 참여해야 복지 확대의 명분이 생긴다. 그래야 부자, 대기업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라는 실질적인 압박도 할 수 있다. 이번 소득세 개편도 우리가 월 1만 원을 부담하면 부자들이 수십만 원을 더내는 구조이다. 이를 통해 중하위 계층, 전체 근로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이웃들이 세금 감면과 자녀장려세액 지원을 받게 된다. 괜찮지 않은가? 이런 방식으로 세금들을 개혁해 가야 한다. 어쩌면 이번 소득세 개편은 하나의 모델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또 이야기해야 한다. '이미 무상 급식, 무상 보육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기초연금도 오르고 고교 무상 교육도 실시될 예정이지 않은가? 세금만 따지면 부담이지만 복지와 함께 생각하면 혜택이 더 많지 않은가? 지금처럼 중간 계층도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모든 걸 자력갱생에 맡기기보다는 세금 조금 더 내고 보편 복지를 누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이게 당신이 부러워하는 복지국가 아닌가!'
세금, 착취의 상징인가 연대의 씨앗인가?
절망과 기대를 함께 맛본 며칠이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지금 그러한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금은 오로지 '공공의 적'이었다. 세금을 제대로 거두는 공평성도, 세금을 사용하는 정부의 정당성도 취약하며, 제대로 된 복지도 없었던 까닭이다. 대다수가 세금에 저항하는 게 조세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3년 동안 보편 복지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라로부터 복지를 받는 것을 실패와 게으름의 딱지로 간주하던 시민이 이제는 복지를 요구하고 있다. 무상 급식에 이어 무상 보육, 고교 무상 교육, 병원비 국가 책임, 기초연금 인상 등 생애별로 복지를 말하고 있다. 복지를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새롭게 생겨나는 복지에 대한 권리 인식을 주목한다. 과거의 나를 판단의 준거로 놓는다면 조세 저항이 세금 정의이겠지만, 미래의 자식을 생각의 준거로 삼는다면 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증세도 의무라는 생각이 싹트고 있다. 여전히 세금이 권력자들이 국민에게 행하는 착취의 상징으로 위력을 발휘하지만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한 연대의 씨앗으로도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유산이 훨씬 강력히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달리다보면 결국 터널을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원점 재검토의 핵심은 대기업 과세여야
오늘부터 세법 개정안 논의는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정부가 원점에서 재검토했다며 수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도 세금 폭탄론을 더 이상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세법 개정안은 제자리로 가게 된 것인가? 아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노년유니온,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 4개 복지 시민단체는 이번 소득세 개편 원안을 하후상박 원리에 따른 전향적 조치로 평가했다. 지금까지 소득세를 누더기로 만들어 왔던 소득공제를 정비하는 작업이었고, 중간 계층부터 누진적 증세 효과를 발휘하는 방안이었다.
앞으로 소득세 영역은 원안과 수정안을 두고 진지한 토론이 이어져야 한다. 정기 국회가 세법 개정안을 확정할 때까지 시간은 있다. 세금 폭탄론이 가로막은 장애물을 걷어내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해당 소득자들이 논의를 벌이기 바란다. 지난주까지 우리가 경험한 게 조세 저항을 부추기는 과거 회귀적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세금과 복지를 결합하는 미래 지향적 토론이 펼쳐지길 소망한다. 내가 내는 1만 원이 어떤 방식으로 복지로 돌아오는지, 나에게 부가된 1만 원이 더 많은 세금을 책임져야 할 대기업과 상위 계층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세금과 복지, 그리고 증세 정치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국회는 그 논의 결과를 반영하면 된다.
대신 정부와 정치권이 지금 해야 할 숙제는 이번 조세 저항의 뿌리에 대한 고찰이다. 왜 근로 소득자들이 분노했는가? 1만 원인가? 아니다. 민주당이 세금 폭탄론으로 과장 포장했지만, 시민들이 말하고자 했던 건 세금 형평성이다. 소득세를 손보면서 왜 법인세는 그대로인가라는 항변이다. 우리는 내는데 왜 대기업은 부담하지 않는가라는 항변이다.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이다.
2라운드 세법 개정안 논의에서는 대기업의 조세 책임 강화가 다루어져야 한다. 대기업이 주로 특혜를 누리는 연구 인력 개발 세액 공제(연 2.7조 원), 고용 창출 투자 세액 공제(연 1.7조 원) 등을 정비해야 한다. 또한 여러 세금 감면 혜택을 받더라도 반드시 내야 하는 최저한세율을 올려야 한다(현재 대기업 최저한세율 16%를 18~20%로).
최고세율 인상할까, 사회복지세 도입할까?
이번 기회에 보편 복지 세력도 복지국가에 걸맞은 증세 전략을 짜나가야 한다. 이는 2017년 대선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세입의 삼총사는 부가가치세, 소득세, 법인세이다. 정부는 세법 개정안에서 우리나라 소비세 세입 비중이 낮다면서 향후 소비세 인상의 분위기를 띄웠다. 서구 복지국가에서 간접세 비중이 높다는 것도 강조한다. 하지만 이 나라들이 직접세를 튼튼히 갖춘 후에 늘어나는 복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간접세를 확대해 왔다는 점은 놓친다. 아직 직접세가 빈약한 우리나라에서 간접세 인상을 제안하는 건 곤란하다. 개혁의 핵심 대상은 소득세와 법인세여야 한다.
소득세·법인세 증세를 구현하는 경로는 두가지이다. 공제 축소와 세율 인상. 소득세는 이번 세법 개정에서 세액 공제 도입을 통해 합리화 조치가 일부 이루어졌다. 2라운드 논의에서 법인세도 대기업 감면을 축소하는 개혁 조치가 추진되어야 한다.
증세의 두 번째 경로는 세율 인상이다. 공제 축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동일하지만, 세율 인상을 두고는 보편 복지 세력 내부에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전통적인 입장은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을 인상하는 일이다. 민주당이나 참여연대 등의 입장이다. 또 하나의 의견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4개 복지 시민단체가 제안하는 사회복지세 도입이다.
두 의견은 과세 대상, 세목 원리에서 차이가 있다. 과세 대상에선 전통적 의견은 고소득자, 대기업의 최고세율만 인상하는 것이고, 사회복지세는 지금 세금을 내고 있는 개인과 기업들이 모두 누진적으로 더 내는 구조를 갖고 있다. 모두 고소득자, 대기업의 조세 책임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중간 계층의 소득별 과세도 담고 있다. 이번 세법 개정 원안의 소득세 개편 모델과 유사하다.
세목 원리에선 전통적 의견은 일반세목을 통한 증세이고 사회복지세는 목적세목을 통한 증세이다. 소득세·법인세의 세입은 모두 일반회계 수입으로 들어가기에 사용처는 예산안 논의를 거쳐 정해진다. 반면 사회복지세는 거둘 때부터 복지로 쓰임새가 정해진 목적세이다. 재정 지출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는 현실을 감안한 설계도이다.
▲ 복지를 늘리기 위해 일반세목을 올려도 그렇게 확보된 예산이 어디에 쓰일지 정해야 하는 반면, 사회복지세는 오직 사회복지를 위해서만 쓰이도록 용도가 정해진 '목적세목'이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
보편 복지 증세 전략 마련해 가자
나는 소득세·법인세 등을 병렬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복지국가를 위한 원포인트 증세, 복지와 세금을 결합한 복지 증세인 사회복지세를 지지한다. 조만간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지출 합리화, 지하 경제 양성화의 견적이 거의 나올 것이다. 이때는 정부도 증세 여부를 선택해야 한다. 부가가치세 카드가 유력하다. 이에 맞서는 카드로도 단일세목인 사회복지세가 제격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이 우리나라 최초 정책 의제 선거가 2010년 지차체 선거였다고 말했다. 월 5만 원짜리 무상 급식이 선거 전선을 갈랐다. 이번 세법 개정안은 보편 복지 담론이 등장한 이래 최초의 증세 논쟁을 불렀다. 2012년 대선이 보편 복지 담론을 확산하는 장이었다면, 2017년 대선은 보편 복지 재정을 실제로 마련하는 장이 될 것이다. 사회복지세가 다음 대선의 핵심 의제로 자리 잡는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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