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담론이나 프로그램을 반박하는 것조차 그쪽에서 깐 멍석 위에서 싸우는 것이어서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시켜줄 위험이 있다. 2000년대 초 부시의 공화당에 연패하고 '멘붕'에 빠졌던 미국 민주당원들은 이 책을 탐독하며 전열을 정비했고 결국 2008년 오바마의 역전을 일궈낸다.
우리나라에도 보수층이 그들의 언어로 세상을 규정하는 담론과 프레임이 정치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담론은 '아르헨티나 복지 포퓰리즘' 담론일 것이다. 2차 대전 전만 해도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페론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에비타의 '퍼주기 복지'를 만나 3류 국가로 전락했다는 내용이다. '복지= 포퓰리즘 = 경제파탄'으로 생각이 흘러가면서 우리 사회에 복지 확대론이 나올 때 마다 이를 견제하는 강력한 '진리효과'를 발휘한다.
'세금폭탄', 새누리당에는 당연히 강조하는 말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탄탄대로를 걷다 포퓰리스트 대통령을 만나 거덜 났다는 주장은 사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광대한 라 팜파스의 농축산물 수출만으로 부자가 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29년 미국발 대공황으로 보호무역주의가 발흥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치명상을 입었다. '좋은 시절'이 끝나갈 무렵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에 맞춰 수입대체 공업화를 추진하고 국내 경제를 구조조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농산물 수출로 부자가 된 대지주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농업 입국'만이 살길 이라며 수입 대체 산업화에 사사건건 반발했다. 그들은 불합리한 토지 구조나, 대중의 빈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민중이 페론이란 인물을 통해 '한풀이 정치'를 하게 됐고 이 때 둘로 쪼개진 사회가 페론 이후에도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페론의 포퓰리즘은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어냐 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금폭탄' 이란 담론도 이에 못지않게 강력하다. 세금에 살상 무기인 폭탄이란 말을 붙인 것부터가 세금을 싫어하는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기호학적 조작이다. 세금부담이 계층별로 차이가 나고, 세금을 통해 정부가 재분배와 공적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이 폭탄 한 방에 날아간다. 세금은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이미지가 각인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 부과에 대해 보수 언론과 박근혜 대표의 한나라당 (새누리당)은 '세금폭탄'이란 용어를 만들어내 강력하게 비판을 했다. 이게 얼마나 잘 먹혔는지 임대아파트에 사는 서민들조차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싫어했다. 큰 집을 지녀 납세대상이 된 사람이 전 국민의 1.3%에 지나지 않았지만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은 마치 모든 국민에게 세금이 더 부과되는 것처럼 생각도록 만들었다.
레이코프는 담론을 둘러싼 싸움에서 '미끄러운 비탈'에 일단 발을 올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미끄러운 비탈이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이후의 정책들이 줄줄이 영향을 받는 담론이나 정책을 말한다. '세금폭탄'이란 공격은 이런 점에서 대표적인 '미끄러운 비탈'이다. 세금폭탄이란 말을 써서 증세하지 못하게 하면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에 증세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일하기 어렵다. 복지 확대 주장은 자동으로 위축되게 된다. 작은 정부와 복지 대신 경쟁과 효율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삼는 새누리당으로서는 '세금폭탄' 이란 말을 당연히 강조할 만하다.
▲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세금폭탄' 차용한 민주당, 재미 볼까?
그런데 새누리당에 저작권이 있는 이 '세금폭탄' 담론을 이번에는 민주당이 차용했다. 서울광장에서 농성 중인 김한길 대표는 "8일 발표된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대단히 잘못됐다"며 " 세금폭탄 저지 서명운동을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민주당과 보수 신문이 증세 저항을 이끌어내는 데 편이 됐다. 어제(12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제개편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한다고 했으니 민주당이 승리한 것일까? 곧 있을 재보선에서 재미를 좀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실 민주당은 정부의 이번 세제개편안을 전략적으로 수용하되 고소득 자산가나 대기업의 증세 확대와 같이 미흡한 부분을 보완토록 요구하는 것이 맞았다. 사실 소득공제를 줄이고 세액공제로 전환한 이번 세제개편안은 바람직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또 상위 소득자 28%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지만 하위 72%는 세금을 오히려 적게 내도록 돼 있다. 연소득 4000만 원 초과 7000만 원 이하인 중산층은 연간 16만 원 세금이 늘어나지만 큰 부담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부담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이를 지렛대 삼아 상위계층의 세금 책임을 좀 더 많이 요구하는 '증세 정치'를 해야 했다. 이렇게 가는 게 결국 이득이라고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게 민주당이 할 일이었다. 실제 국민들은 준비가 돼 있다. <한겨레>가 2년도 전에 한국사회여론연구소와 함께 벌인 조사에서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 수준을 지금보다 늘리자"는 주장에 53.1%가 동의하고 45.9%가 반대했다.
보편적 증세 없이 제대로 된 복지는 없다. 국민들이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복지세력'을 찍지, 살림살이가 팍팍할 때는 '성장세력'을 찍게 돼 있다. 지난 대선에서도 덜 배우고, 수입과 재산이 적은 국민들이 대다수 여당을 찍은 것을 민주당은 목격하지 않았는가? 한 번에 안 되더라도 한발 한발 복지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민주당이 집권에 다가가는 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런 점을 찬찬히 살펴 대응하기보다 세금을 싫어하는 대중의 감정에 영합해 과거 한나라당이 했던 용어까지 차용해 단기적인 정치적 소득을 올리려 했다. 자신들이 무슨 프레임을 만들어 어떤 담론과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정당이 총선-대선에서 거푸 헛발질을 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 원문은 한겨레경제연구소 사이트 (http://heri.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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