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는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고의가 아니었다고 호소했지만 법은 냉정했다. 검사는 구형을 하면서 사정은 딱하지만 법 적용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세금 포탈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국가정의가 어찌 유지되겠느냐고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결국 김 씨는 벌금과 추징금을 내기위해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빚을 또 내야 했다.
도대체 국세청은 여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지난주 인터넷언론 뉴스타파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자료를 분석하여, 세계 각지의 조세도피처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이 245명이라고 밝혔다(지금까지 조세피난처로 불리고 있지만 조세도피처라 불러야 한다. 피난은 선량한 민초들이 재난을 피해 떠나는 것이지만, 세금을 회피하려는 자들은 피난자가 아닌 악질적인 도피자일 뿐이다).
그 중 많은 사람이 재벌 오너나 가족들이라고 한다. 1차로 밝혀진 명단 중 한 사람이 전 경총 회장인 이수영 OCI 회장이다. 이 회장은 개인재산이 9000억 원이 넘고 한국의 부자 40위 안에 드는 사람이다. 함께 발표된 조욱래 회장도 마찬가지로 효성그룹 재벌가의 거부이다.
김 씨는 지금 얼마나 억울할까. 영세한 기업가인 김 씨에게 삼엄한 잣대를 들이대던 법은, 조세 도피처에 거액의 재산을 숨겨둔 재벌들에게는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다가 언론이 오히려 이를 밝혀냈다. 드러난 재벌들의 후안무치한 세금 도피 행각에 이 땅의 수많은 김 씨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도대체 국세청은 여태 무엇을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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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외 섬에 아무 하는 일 없는 회사를 설립했을까?
조세 도피처로 유명한 국가에 유령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세금 도피 목적이 아니라면 왜 굳이 이름도 생소한 해외의 섬에 아무 하는 일 없는 회사를 법무 비용을 들여가며 설립했을까? 그들은 그 회사들 이름으로 해외에 수십억 원의 고가 부동산을 사들이고 시세차익을 남긴 뒤 파는가 하면, 회사에 자녀를 주주로 등록시켜 두고는 고가 부동산을 사들여 사실상 증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라면 모두 세금이 부과되는 행위들이다. 부동산 매입은 취등록세를 내야하고, 양도할 경우는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 고가 부동산의 경우는 보유세인 종합부동산세도 매년 내야 한다. 회사에 자녀를 주주로 등록시킨 뒤 고가 부동산을 사들인 행위는 우리나라 증여세법이 포괄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형식이 어떠하든 실질 '증여'로 인정된다면 증여세 부과 대상이다. 부동산의 매입 자금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소득세를 낸 소득인지도 석연치 않다. 게다가 일개 부동산 상속 문제를 넘어서 거대 기업 경영권 상속 고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눈 감고도 답이 나오는 뻔한 얘기 아닌가. 실제로는 한국에 기반을 두고 살면서도 행위는 해외에서 이루어져 세금을 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국세청은 이들 혐의자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고의로 탈세를 위해 해외에서 행위한 것인지 여부를 조사하고 내지 않은 세금은 철저히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세청은 무능하다는 비판과 재벌 봐주기 의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안내기 위해 조세 도피처를 악용한 것이 밝혀진다면 이 문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상속세 없이 기업을 물려주기 위한 일감 몰아주기와 마차가지로 조세 정의에 반할 뿐 아니라, 국가 재정을 위협하는 반국가적 행위이다. 국민들이 함께 돈을 내어 조성한 국가 인프라 혜택을 누리면서 합당한 비용은 내지 않는, 질이 좋지 않은 무임승차이기도 하다.
특히 조세 도피처 이용은 해외라는 점에서 아무나 활용하기 어렵고 방법도 상당히 복잡해서 비싼 전문가 그룹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한마디로 부유층의 탈세 기법이다. 서민들의 조세 저항과 성실 납부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생기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조세 피난처가 아니라 조세 도피처
조세 도피처(tax haven)는 소득세나 법인세를 물리지 않거나 낮은 세율로 과세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종류도 다양하다. 바하마·버뮤다·케이맨 제도같이 소득세를 물리지 않고 조세조약을 맺고 있지 않은 곳(tax paradise), 홍콩·라이베리아·파나마 등 외국에서 들여온 소득에 비과세하거나 저율 과세하는 곳(tax shelter), 룩셈부르크·네덜란드·스위스 등 특정 기업이나 사업에 세제상 특전을 인정하는 곳(tax resort) 등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조세 도피처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나라 누군가가 조세 도피처에 외국 국적의 법인을 만든다. 사무실과 직원을 두고 사업을 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법인이 아니라 이름만 있는 유령회사, 즉 문서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다. 이때부터 이 법인 명의로 하는 자산 매입행위, 계좌를 통한 자금 이동행위는 모두 외국인의 행위가 된다. 법인이 외국 법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득세법과 법인세법은 납세 의무자를 '거주자'로 한정하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우리국민과 우리나라에서 수익을 얻는 외국인에 대해서만 과세한다. 즉, 우리나라 국민이 조세도피처에 외국 국적의 법인을 세울 경우 외국인이 외국에서 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과세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이 조세도피자는 법인 명의로 각종 재산을 사고팔고, 계좌를 열어 주식거래를 하지만 소득세, 법인세, 증여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조세 도피처는 어차피 세금을 걷지 않는 나라이므로 조세 도피자는 세금을 그 나라에도 내지 않고 우리나라에도 내지 않는다. 만약 그 법인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재산을 사고파는 경우라면 그나마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소득을 얻는 경우에 해당하여 과세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소득세법과 법인세법보다 국가 간 조세조약이 우선 적용된다. 이를 악용해 우리나라와 맺은 조세조약상 과세를 하지 않거나 적게 과세하는 나라를 조세 도피처로 선택하면 역시 세금을 피해갈 수 있다.
법인격 부인 원리로 숨은 도피자 책임 물어야
조세 도피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문제의 핵심은 결국 실질에 맞게 과세해야 한다는 점, 즉 어떻게 '법인', '국적'과 같은 형식을 뛰어넘어 과세할 것이냐에 있다.
먼저 '법인격 부인(法人格 否認)' 원리를 세법에 도입하자. 법인을 설립하는 경우 원래는 법인과 그 법인 운영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현재 상법에서는 한 명의 사람이 여러 개의 법인격을 창조할 수 있고, 만약 그 법인 이름으로 벌인 사업이 잘못될 경우 법인 이름으로 가진 재산에 한해 책임지도록 한다. 법인을 세운 개인은 책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회사 제도를 장려하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이와 반대로 '법인격 부인' 제도라는 것은 법인과 법인 운영자를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법인을 세워 빚을 진 뒤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재산을 빼돌린 경우, 원래는 법인 재산이 없으므로 빚을 받아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까지 법인을 인정해주면 법인제도 취지에 어긋나므로 법인의 인격을 부인하여 법인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법인 운영자가 빚을 진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법인의 채권자들은 법인 운영자의 재산을 압류해서 돈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법인제도를 악용하는 자를 응징하기 위한 이론으로 영미에서는 널리 인정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제한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번에 보도된 것 중 탈세 고의가 명백히 추정되는 부동산 매매와 주식 증여 행위에 대해서 법인격 부인 이론을 사용해서, 조세 도피처에 세운 유령회사의 법인격을 부인하고 법인 소유주인 한국 재벌 오너의 행위로 본다면 소득세와 법인세 및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세법 해석으로도 실질과세원칙이 도입되어 있으므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모델 조약 규정 반영해 조세 조약 정비해야
둘째, 조세 조약 남용 방지를 위한 조약 개정이나 국제적 정보 교환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조세 도피처는 결국 세계적 차원에서 조세 납부 총액을 줄인다. 그래서 OECD는 조약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실질에 맞게 과세할 수 있는 내용의 '모델 조약 규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조세 조약이란 국제적인 과세에 있어서 조세의 중립성과 공평성을 유지하고 이중과세를 방지하기 위해 당사자 국가 간 일정 부분은 한 국가만 과세를 하고 다른 국가는 과세권을 포기하기로 한 약속이다. 조세 도피처 문제는 이러한 조세 조약을 남용하여 조세 조약을 맺은 국가 중 과세권을 포기하기로 한 국가에 유령 자회사를 세워 허위 거주자가 된 뒤, 조세조약 상대방 국가에서 부동산 매입 행위나 돈 거래를 한다. 정부는 조세 조약을 맺을 때 조약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미 맺은 조약도 전면 재점검해서 모델 조약 규정을 삽입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
실질 소득 귀속자 과세 규정 적극 적용해야
셋째, 국세청이 우리 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소득의 실질 귀속자에게 과세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세기본법 제 14조 3항과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제2조의 2 제3항에서는 조세 도피 행위에 대해 형식이 무엇이든 실질에 따라 과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국제 거래에서 조세 조약 및 법의 혜택을 부당하게 받기 위하여 제3자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거래하거나, 둘 이상의 행위 또는 거래를 거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경제적 실질에 따라 당사자가 직접 거래한 것으로 보거나 연속된 하나의 행위 또는 거래로 보아 조세 조약과 법을 적용한다. 따라서 이 규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조세 도피자들에게 과세할 수 있다. 과세를 당한 조세 도피자는 형식 뒤에 숨어서 소송을 걸겠지만, 과세를 계속 하는 것 자체가 조세 도피 억제효과가 있다.
국세청 입증 책임 부담 덜어줘야
넷째, 조세 도피처에서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국세청의 입증 책임을 덜어줄 필요도 있다. 우리 판례는 과세 요건이 성립되었다는 모든 점에 대해 국세청이 전부 증명할 책임을 진다고 해석한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타당한 얘기다. 그러나 조세 도피처를 악용한 탈세의 경우 해외에서 일어나고, 그 수법 또한 매우 복잡해 국세청에게 모든 입증 책임을 요구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국세청이 뻔한 의심이 들어도 과세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과세한 뒤에 소송이 들어올 경우 입증 책임을 모두 져야 하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 유령법인을 설립한 개인의 경우에 한해, 입증책임을 국세청이 아닌 개인에게도 일부 지우는 식으로 법을 개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의지
언론에 따르면 국세청은 미국과 영국, 호주 국세청이 공동으로 확보한 조세 피난처 정보 중 한국인 관련 부분을 넘겨받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고 한다. 국세청은 이르면 다음 달까지 한국인 탈세 정보를 확보해 하반기 중에 해외 탈세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국세청은 기획재정부 산하 기관이다. 기획재정부는 그동안 복지 정책에 대해 여러 차례 재정난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국세청에서 이번 사건을 제대로 세무조사하지 못한다면 기획재정부는 앞으로 복지를 확대할 재정이 없다는 말은 할 자격이 없다.
뻔히 탈세하고 있는 자들도 잡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면 없는 살림에도 묵묵히 납세하고 있는 우리 '김 씨'들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제시민단체인 조세정의네트워크에 따르면 지난 40년간 한국에서 조세 도피처로 빠져나간 자금이 87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올해 우리나라 중앙정부 예산 342조 원보다 두 배 넘게 큰 돈이 조세 도피처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돈에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는 한 한국에서 조세 정의를 내세울 수 없다. 정부는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각오로 조세 도피자를 잡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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