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권이 진심으로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지난 정권이 추진했던 수서발 KTX 민간 경쟁 체제 도입 문제가 왜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고 시민사회나 전문가를 포함한 다수의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했는지 먼저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철도 정책을 바꾸겠다고 천명했던 새 정권은 지난 정권에서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였던 담당자들이 만든 안을 기초로 철도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오판과 졸속으로 추진됐던 정책의 당사자들이 철도 개혁이란 수술실에 들어가는 끔찍한 모습이 시연되려 하고 있다.
▲ 제2철도공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뉴시스 |
민영화가 능사인가?
국토교통부가 KTX 민영화나 제2공사를 이야기하는 뿌리는 현재 한국 철도의 낙후성과 비효율의 원인이 독점에 있다는 진단 때문이다. 당연히 독점 문제를 해소하려면 경쟁을 도입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민간이 효율적이니 민간 경쟁 체제, 즉 민영화가 최선의 대안이라는 게 국토교통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민영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예상외로 높게 나타나자 민영화로 가기 위한 우회로를 설정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2공사 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 업무 보고 과정에서 민관 합동 방식이라는 안을 살짝 끼워놓은 것은 국토교통부 안에 집요할 정도로 철도 민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세력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한국 철도는 독점에 따른 근본적 문제 때문에 엄청난 적자를 양산하는 비효율 집단인가? 현재 한국 철도가 안고 있는 문제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독점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정부가 철도의 문제를 독점으로 진단하고 대책을 세우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철도 정책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울 수밖에 없다.
외면당한 철도 투자, 이제 좀 발전할 만하니 쪼개기?
한국 철도는 눈물의 역사로 시작됐다. 최초의 근대적 육상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철도는 나라의 균형적인 발전과 미래 지향적 전망을 갖고 출발한 게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도구로, 지하나 삼림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자리 잡은 한국 철도망은 식민지 백성의 한을 짊어진 채 건설되고 운영됐다. 일본이 물러가고 맞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은 철도망을 황폐화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먹을 것조차 없어 굶주리는 상황에서 철도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변변한 사회 기반 시설이 없는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지만, 한국 철도는 유일하게 전국적 교통망을 갖고 있었기에 서민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70년대 들어 한국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자 드디어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적극적 투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철도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지만 운이 나쁘게도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는 철도에 대한 투자를 외면하게 했다. 도로 교통이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자동차 산업이 팽창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철도의 수송 분담률이 하락했다. 사양 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데다 거대 장치 산업으로서 특징을 갖고 있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철도는 국가의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 명절 연휴 기간의 서울역. ⓒ프레시안(최형락) |
따라서 한국 철도가 그동안 갖고 있던 문제는 독점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 경제적 상황에 따른 철도의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특히 철도청 시절부터 현재의 코레일은 철도 운영이라는 현장 업무 중심의 기관이었고, 철도 정책이나 투자, 경영의 문제는 정부의 일관된 지시와 지침을 따랐다. 부실의 책임이 있다면 운영 기관보다는 정부 철도 정책의 무능함을 먼저 따져야 한다.
정부는 졸속 정책, 재벌은 '먹튀', 비용은 코레일에 떠넘기기?
국토교통부는 코레일의 비효율을 질타하면서 고속 전철 건설 부채도 제대로 갚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고속 전철 건설 비용도 정부의 졸속 정책과 정치 논리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철도공사와 시설공단의 경영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 1987년 정부가 발표한 경부 고속 전철 예상 건설비는 1조8775억 원이었다. 이후 구체적으로 설계가 실시되고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추정된 건설비는 공사 기간 6년에 5조 원으로 늘었다. 그러나 워낙 졸속으로 진행되다 보니 부실 공사에 따른 문제, 잦은 설계 변경, 문화재 훼손 논란 등으로 공사가 지연됐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지역구의 역사 건설 방식에 대한 공약을 내걸었다가 당선된 뒤 예산 부족을 이유로 슬그머니 뒤집는 일들이 되풀이되면서 공사가 지연되고 공사비는 급증했다. 결국 예상 공사 기간의 두 배인 12년이 걸리고 건설비는 추정치의 네 배에 가까운 18조 원이 소요됐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들어간 것은 설계에 참여하고 노선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철도에 대한 무지도 한몫했다. 철도 운영 기관의 의견을 반영하고 철도에 대한 사회·경제적 전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만 구했어도, 이용자도 없는 곳에 13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어 광명 역사 같은 건물은 짓지 않았을 것이다. 민간 경쟁 체제로 철도 경영의 신기원을 열겠다던 인천 공항 철도도 재벌 기업은 손을 털고 매각 대금을 챙겨 떠나버렸고 수조 원에 이르는 적자는 고스란히 코레일에 넘겨졌다.
이렇게 철도 운영 기관의 경영과는 무관한 거액의 건설 부채와 운영 부채가 코레일과 시설 공단에게 떠넘겨졌고 이를 근거로 부실과 비효율의 온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정부 당국의 잘못을 산하 기관에 떠넘기는 파렴치한 짓이다.
제2공사 생기면 일반 열차 낙후된다
철도 산업에서 경쟁 체제는 유일한 선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정책 담당자들에게는 수서발 KTX 개통을 계기로 어떻게든 한국 철도의 주간선 노선에 경쟁 체제를 도입해야만 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생각과 달리 이렇게 가는 순간 비효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서울이나 용산발 열차와 수서발 열차는 경쟁 관계가 아니다. 경쟁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 체제를 도입했는데 그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중복 비용으로 인한 손실은 결국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경쟁을 촉구하고 이를 통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산업이 있는 반면 경쟁보다는 상호 조화와 보완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산업이 있다는 것을 국토교통부는 모르고 있다.
또 경쟁을 통한 효율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경쟁만 시켜놓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큰 오산이다. 경쟁 체제의 그늘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만약 경쟁 자체가 높은 효율을 발생시킨다면 무한 경쟁 사회로 진화해온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코레일과 제2공사가 경쟁하게 되는 순간 두 회사 간의 수익성 확보 경쟁은 결과적으로 이용객들의 피해로 돌아온다. 수익성 우선 원칙에 따라 코레일은 가격이 싼 일반 열차의 운행 횟수를 늘리지 않을 것이고, 또 일반 열차의 시설이나 운행 속도 개선 같은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은 뒤로 미룰 것이다. 제2공사는 코레일보다 수익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나쁜 일자리 창출이다. 국토교통부가 입만 열면 인건비를 대폭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해왔듯 연봉 2000만 원 이하의 1년짜리 계약직 채용이나 외주 하청을 통해 수익성을 올릴 것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공기업의 사회적 역할 같은 대통령의 공약은 현장 정책 부서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일인가?
더 큰 문제는 두 기업이 경쟁에 지치면 얼마든지 담합을 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다. 서로 적당한 선에서 담합해 손쉽게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정부가 규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통신 시장의 예만 보더라도 정부의 규제는 쉽게 무력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뜩이나 짧은 노선 쪼개기? '규모의 경제'가 더 효율적
국토교통부는 공공연히 수서발 KTX까지 코레일에 맡기면 거대 공기업이 탄생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철도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국토교통부의 철도 정책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수서발 KTX라고 해봤자 기존의 고속선에서 분기한 평택에서 수서까지의 짧은 노선이고, 이 분기를 통한 선로 용량 확대는 그동안 손발이 묶여서 완결적 기능을 못했던 한국 철도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다. 특히 코레일이 담당하고 있는 한국 철도의 영업 거리는 3500km로 이 정도의 철도 연장은 OECD 가맹국이면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수준에 이르렀다는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협소한 철도 노선이다.
한국보다 열 배에 가까운 노선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나 독일과의 비교는 그렇다 치자. 6개로 분할된 일본의 여객 회사 중 하나인 JR동일본도 한국 철도의 두 배에 이르는 7000km의 철도망을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의 빈국 버마(미얀마)도 한국보다 많은 3995km의 철도망을 갖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두 배가 넘는 7985km의 노선을 갖고 있다. 인구가 한국의 4분의 1이고 경상도 정도의 국토 면적을 갖고 있는 벨기에도 한국과 비슷한 3500km의 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코레일의 거대 기업화를 우려하는 것은 철도의 실정을 모르는 국민들을 의도적으로 호도하는 것이거나, 국토부가 세계 철도 현실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규모의 경제가 작용해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도 철도는 경쟁 체제를 도입해 쪼갤 게 아니라 더 많은 노선 확장과 기존선 개량으로 네트워크의 완결성을 확보해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밝혔듯이 2015년 수서-평택 노선의 개통을 앞두고 시급히 철도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전체 고속노선의 일부에 불과한 연결선을 빌미로 제2공사를 만들고 민영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진기지로 삼고자 한다면, 박근혜 정권과 국토교통부 철도 정책 담당자들은 한국 철도를 끝내 희망이 없는 깊은 계곡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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