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적자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매년 대통령 업무 보고나 정권 교체 시기의 인수위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기되어 온 단골 메뉴다. 38년 전인 1975년 <동아일보> 6월 30일 자 기사는 연간 200억 원이 넘는 철도 적자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질타했다. 30여 년 전인 1982년 7월 24일 자 같은 신문에도 1298억 원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 문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1970년대나 1980년대에도 철도는 엄청난 적자를 안고 있었다. 정부 당국은 철도가 수십 년간 적자를 내온 이유를 경영 부실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정부 정책에 따라 일관되게 관리된 철도가 경영부실이라면 철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 정책이 부실하다고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노약자·장애인 할인, 벽지 노선 비용까지 적자로 떠넘겨
국토부는 '2011년 코레일 경영 성적 보고서'를 분석하면서 철도의 실질 적자액이 8303억 원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철도 부실을 부풀리기 위해 편법을 적용한 결과다. 적자면 적자지 '실질적 적자'라는 말은 왜 나왔나? 법적으로 보장된 철도의 공익 서비스 제공 의무(PSO) 보상비를 제외하지 않은 탓이다. 세계 각국 정부가 의무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PSO 보상비용을 적자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PSO 보상비용이란 노약자, 장애인 할인이나 지방 벽지 노선 운영에 따른 비용이다. PSO 보상비를 제외하면 철도 적자액은 국토부가 밝힌 액수보다 3000억 원 가까이 줄어든 5478억 원이다. 일반적으로 정부 부처는 자신들이나 산하 기관의 성과를 부풀리는데, 철도만큼은 부실을 강조하고 전면화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부실을 부각해 수서 발 KTX 민간 사업자 선정을 강행할 명분으로 삼겠다는 심산이다.
국토부는 철도공사의 경영 부실을 이야기하면서 그 핵심을 인건비에서 찾는다. 철도공사 직원들을 적자 기업임에도 고액 연봉을 받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실상은 다르다. 오랫동안 인력 충원이 되지 않아 철도공사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을 넘고 평균 근속연수는 18년이 넘는다. 사실 철도공사 직원들은 정부 산하 공기업 중에서도 하위그룹에 속하는 연봉을 받고 있다. 매년 임금인상률이 정부의 지침을 벗어난 적이 없다. 같은 논리라면 100조 원이 넘는 적자를 가진 토지주택공사나 다른 공기업의 임직원들은 구조조정을 하거나 급여를 삭감해서라도 적자를 메워야 하지 않겠는가?
국토부는 철도공사가 정부의 구조조정 지시를 어기고 인력 감축을 등한시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 때문에 초과 근무나 휴일 근무가 일상화되어있다. 게다가 철도공사는 공기업이 앞장서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게 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최근 2년간 인턴제를 거쳐 신입 사원을 채용했다. 이런 사정을 무시한 채 철도의 인건비 문제를 경영 부실의 핵심에 놓는 것은 역으로 철도의 적자가 부실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정책에 따른 문제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 KTX ⓒ연합뉴스 |
철도에 투자 안 하는 국토부, 부실 떠넘기기 말고 뭐했나?
국토부는 높은 인건비 비중 때문에 경영이 부실해졌다고 질타하지만 철도는 수요에 따른 탄력적 대응이 힘든 산업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처럼 수요에 따라 공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휴가철이나 명절 기간에 승객이 폭주한다고 선로를 늘릴 수 없다. 수요가 줄어드는 시기라도 선로나 역을 정상적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거대 장치산업인 철도는 일상적 유지비가 필요하고, 정비나 유지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이므로 인건비 비중이 다른 산업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다.
철도산업의 인건비 비중을 낮추려면 철도산업의 토양이 바뀌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철도산업이 경영상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업 거리가 4500km라고 말한다. 한국 철도의 총 길이는 3500km 남짓이다. 그런데 수서 발 KTX를 민영화 화면 영업 길이는 더 짧아진다. 결국 수서 발 KTX 민영화는 일부 재벌의 수익 창출을 위해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의 자생 능력을 제거하는 일이다. 기능 중복과 거래비용 증가 등 분할로 초래될 비효율이 철도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철도의 생산성은 노동자 1인당 수송량의 크기로 정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철도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5위로 상위권에 속한다. 협소한 철도 운영 거리와 낙후된 철도 환경의 한계를 그동안 철도 노동자들이 노력으로 극복해왔다는 의미다. 한국 철도는 또한 고속철도 건설과 개통을 전후로 각종 철도 발전지표(복선화율과 전철화율, 자동신호체계 등)들을 전반적으로 개선한 바 있다.
반면 철도 경영 부실을 질타하는 정부가 한 일은 무엇인가? 철도와는 관계가 먼 비전문가를 사장 자리에 낙하산으로 보내는 일을 반복해왔다. 경찰청장 출신의 허준영 전 사장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철도공사 사장의 경험을 살려 지역구에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해당 지역구(노원병)는 서울 북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에나 나올 만 한 일이다. 또, 국토부는 인천공항철도를 민영화해 효율성을 높여 철도 교통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장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철도의 부실이 심각해지자 이를 슬그머니 철도공사에 떠넘겼다. 이 과정에서도 민간사업자들은 매각 대금을 챙겨서 떠났고 부실은 고스란히 철도공사가 받아 안았다. 정부의 철도 정책과 철도공사의 경영 상태 중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국토부 주장의 하이라이트는 철도공사가 매년 내고 있는 KTX 매출액의 31%에 이르는 1100억 원(2010년 기준)의 선로사용료가 고속철도 건설 부채의 매년 이자 4600억 원도 갚지 못하는 수준이며 이런 부실 상태를 더는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토부의 주장대로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다. 철도공사가 내는 선로사용료로 고속철도 건설 부채를 감당하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 국토부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를 하나로 결합해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 철도 건설에 투자 왜?…철도 건설비 < 사회적 이득
세계 여러 나라는 미래의 대안 교통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철도시설 부분의 국가 투자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국가가 철도산업 정책을 통해 고속철도 건설비용을 상당 부분 부담한다. 한국 정부도 철도의 운영과 시설을 분리하면서 정부가 시설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운영기관의 부담을 줄여 철도산업을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시설 투자를 책임지지 않고 선로사용료를 거의 유일한 수익 구조로 고착화했다. 시설기관과 운영기관 간 불신과 갈등이 생겼음은 물론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KTX 매출액의 100%를 선로사용료로 내도 건설 부채의 이자를 갚을 수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흑자를 내고 있는 고속철도 부분의 매출액을 전부 갖다 바쳐도 재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라면 다른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87년 일본의 국철 개혁 당시 일본 정부는 국철의 누적 부채 37조 엔(약 310조 원) 중 31조 엔을 정부에서 인수하고 경영 안정 기금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했다. 2011년 한국의 국가 총 예산이 309조 원이다. 26년 전 화폐 가치를 생각해 보면 부채 31조 엔 해소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철도왕국 일본의 신화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어떠한가? 독일 정부는 1994년 구조 개편 당시 연방철도 자산관리국을 만들어 건설 부채를 포함한 철도 부채 680억 마르크(약 42조 원)를 전액 인수했다. 프랑스 또한 1997년 구조 개편 당시 누적 부채 308억 유로(약 37조 원)의 3분의 2인 205억 유로를 시설공단으로 이관하고 나머지 1/3인 103억 유로를 정부 특별 부채계정으로 처리했다. 이탈리아도 운영회사의 부채 35억 유로를 정부로 이관하고 매년 구조개편 기금으로 약 10억 유로를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는 한 발 더 나가 지난해 10월 '철도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명목으로 시행됐던 시설과 운영의 분리가 철도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통합을 선언했다. 통합적 체제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처럼 철도 선진국들은 정부의 적극적 재정 지원과 부채 인수로 만성적인 재정 악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는 왜 이렇게 철도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붇는 것일까? 철도가 창출하는 사회적 이득이 눈에 보이는 적자를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철도 교통은 철도 이용자뿐만 아니라 철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혜택을 준다. 만약 서울시에 지하철이 없거나 8% 수송분담률을 담당하는 경부선 화물열차의 수송을 도로로 전환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사회는 교통 혼잡비용, 사고 처리비용, 도로 유지보수비용, 도로 추가 건설에 따른 건설비, 국토 파괴에 따른 손실비용, 환경오염 비용, 유류비용 등을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은 철도 적자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스웨덴은 이런 비용을 계랑화해 '사회경제적 한계비용'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즉 철도의 사회적 기여도만큼 선로 사용료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도입하여 지속 가능한 경영을 꾀하고 있다. 우리 국토부도 수년 전 철도의 사회경제적 창출 비용에 대해 연구용역을 실시했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가 나왔음에도 이를 창고 한편에 버려두고 있다.
KTX로 철도공사 수익 창출한다더니, 이제와 민영화?
국토부가 철도 부실을 소리 높여 강조하면서 내놓은 대안은 결국 민영화다. 수서 발 KTX 민영화를 통해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 이에 자극받은 철도공사가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생력을 갖게 된다는 단순 논리가 철도 정책 담당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나 불과 2년여 전인 2010년 국토부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폈다. 국토부는 철도공사가 수서 발 KTX를 개통하면서 철도공사의 재정이 상당히 호전되어 철도 적자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했다.
철도공사의 재무구조를 호전시키려면 우선 수서발 KTX 개통으로 한계에 다다른 서울역 중심의 선로 포화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 이용객들을 분산해 새로운 수요를 촉발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민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수서발 고속철도가 창출하는 수익을 재벌기업이 독차지하는 순간 철도공사의 재무구조 개선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수도권 동남쪽의 열차 이용객 분산으로 철도공사의 수익성은 심각하게 떨어질 것이다.
철도 민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우선 영세한 영업 길이를 나누어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관제 우선권과 선로 배분권을 놓고 운영기관들도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다. 시설공단과 운영기관들은 선로사용료와 유지보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할 것이다. 영국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긴 뒤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결국 시민은 철도를 근심‧걱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적자를 줄이고 효율을 달성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되는 철도 민영화는 실상 한국 철도의 재앙이다. 분단으로 인한 고립으로 한국은 섬과 다름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겨우 3500여km의 영업 길이는 철도의 도약을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남북 평화협력, 대륙철도 연결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 철도가 내실 있게 발전해야 한다. 철도의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채 반도 남쪽의 철도 노선을 이리저리 쪼개어 재벌의 수익창구로 전락시키려는 국토부의 방침은 한국 철도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토부는 철도가 국민을 위해 거듭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 철도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맹목적인 경쟁 논리와 민영화를 통한 해법은 이미 유통기간이 지난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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