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죽음 ① 대중문화 잡지 연쇄 '사망'…누가 죽였나 |
문화 콘텐츠 전문 잡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있는가. '돈 생각 하지 않고' 좋은 콘텐츠에만 집중하는 오너 덕분에 재정적 기반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잡지를 만들거나, 혹은 일간지 등 기존 매체에서 전문 기자를 양성하여 '보도 자료를 베끼지 않는' 특집 및 기획 기사를 양산하는 방식이 우선적인 대안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 불가능해 보인다. 전자의 경우, 의욕적으로 시작한 매체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적자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폐간했다. 후자의 경우, 경제나 의학 등 특정 지면을 제외하고는 전문 기자를 양성할 의욕 자체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문화 전문 기자'는 없다
태상준 영화 저널리스트는 "한국의 일간지는 기자들을 철저하게 '돌린다.' 한 분야를 한 기자에게 1, 2년 이상 맡기지 않고 다른 분야로 계속 돌리며 일을 시킨다. 전문 기자 혹은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를 필요로 하는 방식이고, 이 중에서도 문화는 뒷전으로 밀리는 게 사실이다. '문화 전문 기자가 필요한가'라는 질문 자체에 윗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한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성우진 대중음악 평론가(<파라노이드> 필진, 전 <핫뮤직> 편집장)는 "이제는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시대다. 쉬운 것만 얘기해주는 평론가를 원하는 시대고, 잡지를 보기 위해 몇 천 원을 투자할 사람이 사라진 시대"라며 "많이 보는 영화, 많이 듣는 음악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유료 전문지가 설 자리는 없다"고 단언했다.
비평의 전성기가 과연 얼마나 길었느냐를 반문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스타 평론가' 한둘에 의존하는 시대가 아니라 비평 환경이 폭발하고 그에 따라 잡지 시장이 팽창했던 시기는 극히 짧다는 게 요지다. 즉, 애초에 우리는 대중문화 비평 토양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이제 시작을 모색해야 한다는 반론이다.
서정민갑 대중음악 의견가는 "대중문화 폭발기가 사실 1990년대 중반의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매우 짧은, 이례적이었던 시대를 전성기의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무리"라며 "우리보다 대중문화 비평의 역사가 훨씬 오래된 영미권의 상황을 그대로 우리 상황에 등치시키는 건 현실과 맞지 않다. 우리에겐 대중문화를 진지하게 고민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더 빈곤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당장 대중문화 평론가들이 받는 원고료 수준은 15년 전과 동일하다는 게 정설이다. 해외 팝 음반 해설지의 경우 소니, 유니버설, 워너 등 '메이저 3사'의 국내 배급사 모두 원고료 수준이 10만 원이 되지 않는다. 한 웹진 관계자는 "한 달에 필자에게 원고료 30만 원을 줄 수 있는 대중음악 웹진은 한국에서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강일권 편집장은 "안 좋은 상황이 한꺼번에 맞물려서 악순환을 낳고 있다. 돈이 돌지 않으니 대중음악 평론가들의 원고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매당 원고료가 5000~6000원 수준으로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전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논란이 된 허지웅 영화 평론가와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의 원고료 관련 마찰도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문지의 몰락과 더불어 대중문화 관련 글이 제값을 받기 힘든 현실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됐다.
장기적으로 대중문화 잡지의 몰락이 대중문화 담론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문지 시장이 여전히 살아 있는 영미권에서 대중문화 비평은 흔히 사회학, 철학과 맞물려 학계에서도 활발히 일어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마땅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지만, 지적인 고통을 즐기려는 사회적 에너지는 분명 부족해 보인다"며 "진지한 고민이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인문학마저 쉽게 쓴 게 잘나가는 시대가 됐다. (이 시대에) 대중문화를 산업적·정치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한국에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대중문화의 위상은 한국 언론에서도 가장 떨어진다. 잡지시장이 갈수록 위축됨에 따라, 진지한 담론을 기대할 창구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어졌다. 영화 <늑대소년>의 한 장면. ⓒ뉴시스 |
해외 잡지들은 어떻게 '생존 중'인가
국내의 척박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해외의 예를 찾아보더라도 일대일 비교가 쉽지 않다. 문화 자본이 자생적으로 대중문화 비평 잡지를 꾸리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를 들어 영국영화협회(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발간하는 영화 월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and Sound)> 같은 형태만이 지속 가능한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예측도 오랫동안 떠돌았다. 일종의 학술 매체만이 살아남고, 대중과 담론의 창구는 사라질 수 있지 않겠냐는 전망이다.
비슷한 사례로 한국에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법인인 영상자료원에서 만드는 기관지 <영화천국>이 있다. 이 얇은 격월간지는 기존의 대중적인 잡지들에서 한동안 소화하지 못했던 깊이 있는 영화 담론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같은 '기관지'가 태생적 한계 때문에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학술적' 경향을 띤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국의 경우도 2000년대 초반 잡지 시장의 활황이 정점을 찍었고, 현재는 종이 매체와 태블릿용 디지털 잡지 시장으로 광고가 점차 분산되면서, 종이 매체의 상황이 결코 쉽지 않다. 산업 전문 인터넷 매체 <데일리 파이낸스(Daily Finance)>의 2013년 3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최대 규모의 종합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에서 <타임> 지를 비롯한 잡지 출판 부문을 분리했는데, 여기에는 종이 잡지 광고 수익의 지속적인 하락이 큰 몫을 차지했다. 출판 부문의 광고 수익은 2004년 정점을 찍은 이래 2012년에는 무려 38퍼센트 하락한 34억 달러에 그쳤다고 한다.
또 다른 거대 종합 미디어 그룹 뉴스코프 역시 <월스트리트저널>, <타임스>, <선>, <뉴욕포스트> 등 인쇄 매체를 분리할 계획이다. 주간지 <뉴스위크>는 작년 말 80년 역사의 종이 잡지를 포기하고 온라인으로만 발행키로 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여전히 높은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는 럭셔리 잡지 시장과 패션지 등은 태블릿용 디지털 잡지로 재빠르게 확장하는 데에도 앞서 나가며 새로운 수익 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그만한 재원과 역사,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종이 잡지의 불안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한국의 문화 전문 잡지가 이 사례들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대중성'에 연연하지 않고 소수의 전문가와 충성심 강한 열독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잡지의 가격이 올라가게 됨을 뜻한다. 한국 경제의 오랜 불황과 더불어 문화 콘텐츠의 높은 가격에 거부감을 표하는 환경이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 역시 쉬운 선택은 아니다.
결국 자생적 문화 자본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대중문화의 각 장르를 안정적으로 아카이빙하고, 분석하고, 새롭게 소개하는 잡지 본연의 의무를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계속 제시되는 것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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