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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텐아시아>의 오늘에 외로워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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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텐아시아>의 오늘에 외로워진 이유

[모 피디의 그게 모!] 안목 있는 친구를 보내는 이의 황망함

안목 있는 친구를 곁에 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코앞의 일에 파묻혀 시야를 잃어버렸을 때, 안목 있는 친구는 한 발짝 물러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도와준다. TV 업계 종사자로서 <텐아시아>는 그런 친구였다. 적어도 강명석 편집장을 비롯한 6명의 기자들이 사표를 제출하기 전까지는.

이 사건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생각도, 정보도 없다. 다만 안목 있는 친구를 잃은 황망함 정도를 표현할 뿐이다. 2006년 오프라인의 <드라마틱>과 온라인의 <매거진t>가 시작했을 때의 흥분이 생각난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얻은 기분에 빗대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안목 있는 친구들이 모이는 것 아닌가.

1990년대의 영화 비평, 2000년대의 정치 비평에 이어 이제 TV에도 합당한 비평이 자리하리라는 희망. 이 일이 점점 더 의미 있어질 수 있다는 기쁨. 그러나 그 희망과 기쁨은 지나치게 섣부른 것이었다. <드라마틱>은 이듬해 폐간했고 <매거진t>는 <텐매거진>, <텐아시아>등으로 명칭과 소유관계의 부침을 겪다가 결국 정체성의 핵심인 기자들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TV 비평 시대'의 진행 방향은 나의 예상을 거슬렀다. 왜 그랬을까? 대중이 안목을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대중문화의 특징은 '안목이 모자란 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클래식을 들을 때, 미술 작품을 볼 때,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훈련 받은 안목이 필요하다. 입문자들은 전공자들의 안내에 따라 그 세계를 읽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다르다. 누구나 드라마에 대해, 가요에 대해 쉽게 품평할 수 있다. 훌륭한 식견이 있다면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주관적 느낌으로 그냥 좋은 걸 좋다고 하면 되는 것을.

블로그와 인터넷 게시판에 오르는 대중의 감상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안목의 옥석을 가리는 재미, 곧 TV 비평으로까지 발전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노래에 지나치게 섬세한 칼날을 들이대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 철학, 심리학, 정치학 등등 평자들의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한 유려한 비평은 대중의 안목과 수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높은 기준으로 평가의 칼날을 들이댔을 때, 대중문화는 날카로운 비판에 서게 될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성장기를 같이한 가요에 순정을 바치곤 한다. 그 순정에다 대고 '이 곡은 영·미 팝의 어떤 장르적 흐름을 뒤늦게 본떠 만든 곡이며 음악적으로는 별게 없는 어쩌구' 하며 평해봤자 듣는 사람의 마음만 불편할 뿐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한 영화 비평과 수많은 문화 평론들이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기 시작한 이유는, 대중은 폄하 당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안목이 모자란 대중을 평가'하는 듯한 느낌을 대중이 받아버렸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풍요로운 지적 성찰이 아니라 재미였다. 재미를 증폭하기에는 패러디나 농담, 뒷이야기 같은 것들이 더 좋았다. 안목의 권위는 있으면야 나쁠 것 없겠지만 굳이 찾아볼 것도 없었다. 대중은 '안목을 차별하지 않는 놀이터'를 원했다. 그리하여 비평은 줄어들고 그 자리엔 클릭 수 유도가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 낚시성 연예 기사가 들어섰다.

▲<텐아시아>의 온라인 지면. ⓒ<텐아시아> 홈페이지에서 캡처

<텐아시아>의 훌륭한 점은 그 안에서 보여준 균형 감각이었다. 지적 통찰에 골몰한 나머지 대중이 느낄 불편함을 무시하지 않았다. 비판의 날을 세우느라 제작자들의 서운함이나 억울함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클릭 수에 신경 쓰느라 낚시용 홍보 기사로 지면을 채우지 않았다. <텐아시아>는 공감했다. 대중과, 제작자와, 시장과. 왜 대중의 사랑을 얻었는지, 외면 받은 자리에 주목할 부분은 없었는지, 제작자들의 상황적 한계는 무엇인지, 시장의 흐름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텐아시아>가 만든 것은 한국 대중문화 비평의 독보적인 태도였다. 겸허하고 성실하며 위트 있는 태도.

그러나 이미 대중문화는 안목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비평 문화의 위축은 작품성을 논할 토대의 축소로 이어졌다. 대중의 취향은 이제 안목 있는 사람으로부터 검증되지 않았다. 대신 놀이감의 경제적 효과가 입증되는 취향만이 살아남았다. 한류 배우만이 일본 수출을 보장할 수 있게 되면서 경력이나 연기력에 무관하게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무엇이 좋은 작품인가를 논하는 것이 머쓱해지면서 시청률은 다시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가치가 떠난 자리엔 수치만 남았다. 시청률, 해외 판매가, 포털의 클릭 수. 대중문화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대중의 취향은 더욱 협소해졌다. 안목의 권위가 불편하다 했더니 수치의 파쇼가 시작된 셈이었다.

'경제적 성공의 보증'이 대중문화 상품 제작의 선결 조건이 되는 현실에 가치판단을 들이댈 수는 없다. 그런데 수치를 근거로 제작되는 상품, 혹은 작품이 얼마나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빵집에서 이 빵 저 빵 먹어보며 식감을 습득하고 취향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제일 잘 팔리는 팥빵과 소보루 중 하나만 먹어야 되는 상황이라면? 누군가 이것저것 먹어본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취향에 빗대어 설명해주는 일은 오히려 흥미롭지 않은가. 어떤 상품, 혹은 작품의 심미적 가치를 따져보고 즐기는 일은 사실 대중의 재미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우리는 어린이의 놀이터에 어른이 참견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더 크면 이런 걸 재미없어하게 될 거야.' 이런 태도는 진상이다. 그렇다고 놀이터에 시소와 미끄럼틀 대신 파친코 기계를 들여놓는 것은 아예 놀이터를 파괴하는 짓이다. 필요한 건 어른의 계도도, 중독성 있고 돈 잘 버는 기구도 아니다. 몰입할 만한 가치가 있는 놀이다. 안목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니다. 이건 왜 재미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이런 거다. 다만 많이 공부하고 훈련 받은 안목이 더 넓게 멀리 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많이 놀수록 재미의 섬세한 지점을 알아가고, 그 섬세한 지점을 느끼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는 재미를 증폭시킨다. '훈련 받은 다양한 안목의 교차.' 이것이 대중문화라는 놀이터를 재미가 있고 미래가 있는 곳으로 만든다.

어린이들이 미끄럼틀보다 파친코를 더 자주 사용했다고 해서 파친코가 더 좋은 놀이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면 왜? 혹은 어린이들이 파친코를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정할 수 있을까? 없다면 이는 또 왜 그런 것일까? 누가 이런 문제 제기를 하면서 같이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물론 대중은 어린이가 아니다. 나는 여기서 대중이 어린이와 같아 심의와 검열을 강화해서 대중문화를 뽀로로 동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폐기되어야 할 권위다. 그저 대중문화를 즐길 때, 우리는 복잡함과 근심을 내려놓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즐기고 싶어 한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즐김을 위해 안목이 필요하다. 안목이 떠난 자리에 취향의 민주주의가 아닌 파친코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오히려 안목만이 다양한 취향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과연 한국 드라마 산업이, 아니 다 집어치우고 내가 다시금 <텐아시아>와 같은 안목 있는 친구를 든든하게 곁에 둘 수 있을까. 갑자기 외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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