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이 항변했다. 그는 '제품을 불법적으로 판 기업'이라는 오명을 벗고 싶어 했다. 회사는 "대승적인 결단"을 발표했다. '불량 재료'가 들어간 제품 8500개 중 일단 3500개를 리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나머지 4500개에 대해서는 '소송을 건 소비자가 최종(대법원) 판결에서 이겼을 때만' 리콜해 주기로 했다.
그는 3500개를 리콜 조치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그 숫자도 많다고 경영계에서)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는지 아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결정이 '대승적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대법원이 불법 결정을 내린 것은 소비자 A씨 하나뿐이라고 했다. "지금도 여러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불법으로 결론 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제품 전체를 리콜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3500개를 리콜할 돈으로 (차라리) 신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수도 없이 듣고 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8500개를 한꺼번에 다 바꿔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불량 제품을 사용했던 소비자들은 10년에 가까운 소송 끝에 이 기업이 내놓은 방침을 수긍할 수 있을까? 3500개만 리콜하면 '불법 상황'이 해결될까? 만약 모든 제품에 같은 '불량 재료'가 들어갔다는 정부 판정과 대법원 판결이 소비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라면?
노동부, '현대차 전체가 불법 사업장' 판정…불법 시정은 3500명만?
김억조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불법 파견 노동자 정규직화'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와 지난 9일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한 말을 '리콜'에 비유하면 위와 같다. 리콜을 요구하는 소비자는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소비자 A씨는 대법원에서 정규직이라고 판결 받은 사내 하청 노동자 최병승 씨다.
현실에서 자동차 회사는 제품에 결함이 생기면 같은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 전체'를 신속하게 리콜한다. 하지만 상대가 소비자가 아니라 노동자라면? 현대차는 지난해 말 '불법'을 시정하기 위해 사내 하청 노동자 8500명 가운데 3500명만 신규 채용(리콜)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불법 파견 문제에 대해 현대차가 내세운 논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불법 파견은 현대차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소송을 건 노동자들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내 하청 노동자 8500명 가운데 3500명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는 것이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노동부와 대법원의 해석은 다르다. 지난 2004년 노동부는 현대차 울산·아산·전주 공장 전체가 '불법 파견 사업장'이라고 판정했다. 2010년 대법원은 "현대차에서 2년 이상 일한 사내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이라고 판결해 쐐기를 박았다. 대법원 판결의 핵심 근거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합법 도급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일하는 자동차 생산라인 전체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현대차가 제품 8500개를 모두 '리콜'해야 하는 이유다.
비정규직 노조는 현대차가 대법원 판결을 인정하고 현대차 사업장 전체에 만연한 불법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현대차는 "소송은 개별적인 문제"이고 "정규직 전환은 최종 소송 결과에 따라서 진행한다"고 답했다. '최종 소송'까지, 다시 말해 대법원(혹은 현대차가 '파견법'을 대상으로 걸어놓은 헌법 소원) 결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 관련 기사 : "소송 결과 기다리다간 정년퇴직할 판")
대법원 판결이 나기까지 최병승 씨는 7년 동안 법적 싸움을 벌였다. 아산 공장 사내 하청 노동자 7명 또한 2010년 11월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무려 8년째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2005년 소송 시작). 사내 하청 노동자 1900여 명이 제기한 소송은 아직 1심 결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많은 해고자들이 생겼다. 해고자들이 하나둘씩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안, 현대차가 내놓은 방침은 매번 같았다.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지, 인정한 건 아니다."
▲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신규 채용안을 수용할 뜻을 내비치자 눈물을 흘리는 비정규직 노조 간부. ⓒ프레시안(김윤나영) |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 순이익의 3.6%
김억조 부회장은 불법 파견된 노동자 85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했다. 김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연 국정감사에 출석해 정규직 전환 비용으로 "4000억 원에서 1조2000억 원"을 불렀다. 환노위 위원과 증권계의 계산과는 다른 수치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심상정 의원은 2001년 11월 입사한 사내 하청 노동자의 임금 격차(월평균 288만 원)를 불법 파견 노동자 8270명(생산하도급 7382명, 한시하도급 888명)에 대입한 결과, 정규직 전환 비용이 연 2859억 원이라고 추산했다. 그마저 입사 10년 이상 노동자들만 있다고 가정해 추산한 결과다. 각종 복리후생비(연 363억530만 원)를 합쳐도 정규직 전환 비용은 3223억 원을 넘지 않는다.
증권계의 예측은 더 단순하다.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6000만 원, 비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3000만 원 수준이다. 따라서 사내 하청 노동자 8500여 명에 대한 정규직 전환 비용은 연간 2550억 원이고, 이는 지난해 3분기까지의 현대차 당기순이익 7조1638억 원의 3.6%다. 현대차 사내 유보금(지난해 3월, 33조6579억 원)을 기준으로 하면 0.75%에 불과하다(이명박 정부 들어 이전보다 1조 원가량 늘어난 재벌 법인세 감면액이 주로 사내 유보금으로 쌓일 뿐 고용 확대에 쓰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규직 전환 비용이 "회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아니라는 점은 지난해 정규직 노조와 현대차가 체결한 임금·단체협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지난해 임금 협상을 통해 "1인당 2728만여 원의 임금 및 성과급 인상 효과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현대차는 올해 정규직 노동자 4만5000명에게 총 1조2276억 원을 지급할 능력이 된다는 뜻이다.
재벌 총수는 불법 저질러도 '쇠고랑은 안 찬다'
노동부 판정에 따라 이미 2004년에 '정규직'으로 전환됐어야 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 상황에 수년간 방치됐다. 체불 임금도 덩달아 쌓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현대차에 '법과 원칙'에 따라 할 수 있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광주 하남공단의 에어컨 제조업체인 캐리어는 파견법 위반 혐의로 회사 관계자가 구속된 뒤, 2001년 7월 노동청의 지시에 따라 사내 하청 노동자 74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바 있다. 정몽구 회장은? 검찰이 '불법 파견' 혐의에 대해 2년 반째 기소 여부를 '검토 중'이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정부는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불법 파업에 대해서는 법원 판결도 나오기 전에 바로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노동부가 판단한 불법 파견에 대해서는 절대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노동자의 '불법 파업'에는 '법과 원칙'이 바로 적용되고, 경영자의 '불법 파견'에는 '노사 자율'의 원칙이 적용되는 셈이다.
불법 파견뿐만이 아니다. 기업 총수가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돈을 불법 정치자금으로 쓰고, 회사 돈을 불법적으로 횡령하고 회사에 수천억 원대의 손실을 입혀도 '법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정몽구 회장은 2006년 이러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지만 한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 정 회장은 2008년 8월 15일 '대통령 특별 사면' 대상자에 올랐다.
현대차가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에 일감을 몰아줘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현대차로서는 문제없다. 대법원이 판결한(2012년 11월) 과징금 550억 원을 물면 그만이다. 대기업의 불법 행위가 시정되지 않는 이유는 불법을 저질러도 적어도 총수가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 아닐까. (☞ 관련 기사 : 정몽구 회장, "반성했다"더니 또 법 농락하나?)
▲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2008년 6월 24일 법무부의 사회봉사명령의 일환으로 충북 음성 꽃동네에 있는 영유아 보육시설 '천사의 집'에서 아이에게 우윳병을 물리고 있다. 정 회장은 횡령 등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으며, 사회봉사를 하다가 2008년 8월 특별 사면됐다. ⓒ뉴시스 |
박근혜, 철탑 농성 가슴 아프다면서도 '불법 파견'엔 묵묵부답
정부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10일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를 "어버이의 마음으로 풀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당선인은 "비정규직 문제를 풀 때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비정규직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 그 마음으로 풀어달라"고 주문했다.
철탑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박 당선인은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해결책을 위해 고민하고 있으"며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박선규 대변인을 통해 말했다. 박 당선인이 가슴 아파하는 사이 현대차 사내 하청 노동자 천의봉·최병승 씨가 울산 공장에서 철탑 농성을 이어온 지 어느새 100일이 됐다(24일이 100일째).
사실 새 정부가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김태욱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는 "검찰이 원청과 하청을 수사해 기소할 수도 있고, 정부가 불법이 시정될 때까지 모든 업체를 폐업시킬 수도 있으며,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기업 대표자를 형사 처벌(3년 이하의 징역 혹은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더 쉬운 방법을 제안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게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작 박 당선인은 대통령 당선 이후는 물론 인수위가 출범한 뒤에도 '현대차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차 문제'를 포함한 거의 모든 노동 현안에 대해서는 아예 '나 몰라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법원에서 불법 파견 판결을 받은 사업장을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여 동일한 불법 파견 확인 시 원청업체가 직접 고용하도록 행정명령"(공약집 74쪽)을 내리겠다던 대선 때 약속이 무색한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 역시 크게 긴장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박 당선인의 '정리해고 자제' 발언에 대한 김 지도위원의 평가는 현대차 문제에서도 정곡을 찌른다.
"나는 당선인이 첫 행보로 재벌들을 만나서 그렇게(정리해고 자제)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재벌들이 당선인의 의중을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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