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30초 진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의대생 시절까지만 해도 그는 다짐했다. "난 친절한 의사가 될 거야."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레지던트 2년차 A 씨 이야기다.
현실은 달랐다. 병원은 전쟁터였다. 환자들은 밀려왔고 업무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친절한 설명도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지, 시간이 없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A 씨가 일하는 내과에는 암 환자가 30~40%에 달한다. 초를 다투는 응급상황도 많다. 그런데도 의료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궂은일과 야간‧주말 당직은 병원의 '막내급'인 레지던트 1, 2년차의 몫으로 돌아왔다. 산부인과에 출혈 환자가 생겨도, 응급실에 심장마비 환자가 와도 A 씨는 불려갔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생활, '친절한' 의사 가능케 한 건…
다른 과에 응급환자가 생겼을 때 일이다. 급히 호출돼 응급상황은 끝났지만 A 씨는 정작 수십 명에 달하는 담당 입원환자 관리를 못했다. 병동으로 돌아왔더니 담당 환자에게 달려있어야 할 링거가 없었다. 보호자가 항의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을 반납해가며 일해도 항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러웠다. "진료 돌아가는 데도 의사가 부족할 판이라 응급실 의사를 빼서 다른 데 돌려쓰는 상황이거든요."
로테이션을 돌아 지금은 알레르기 내과에 있는 A 씨는 "지금 있는 과에는 입원환자가 3명이어서 환자 한 명에게 쏟는 정성과 설명하는 시간이 늘었다"며 "환자들도 다들 좋아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잠이 부족하지 않아서 좋다"고 덧붙였다. 의사의 업무환경이 의료서비스의 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시간 잔 의사가 항암제 투입하다 실수한다면…"
ⓒ대한의사협회 |
대학병원 안과의 3년차 레지던트인 B 씨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잠은 안 오지만 멍한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한다"며 "졸음 운전할 때 사고가 많이 나는 것처럼 나도 쓰러질 정도로 피곤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중증환자가 많은 대형병원에서 위험은 도처에 있다. A 씨는 "외과의사가 밤을 새고 다음날 수술한다면 그 환자 예후가 어떻겠느냐"며 "지금의 병원 시스템이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제가 환자나 보호자 입장이라면 지금 시스템이 이해가 안 돼요. 1~2시간밖에 못 자는 전공의가 보호자의 어머니, 아버지의 항암치료에 투입됩니다. 항암제는 투여량 1~2mg의 작은 차이로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면서 진료하는 것과 여유 있게 하는 것은 다르거든요."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은 "외국 논문을 보면 당직을 서고 난 뒤 의사는 운전면허 정지 사유인 혈중알콜농도 0.05%의 알콜을 섭취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며 "과연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황이 주 100시간 일하고, 하루 24시간 연속 일하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절반은 주 100시간 근무
전공의의 노동시간은 실제 어느 정도일까. 대한전공의협의회가 2010년 전국의 전공의 94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42.2%가 주 100시간 이상 근무했다. 주 80시간~100시간 근무자도 26.2%에 달했다.
전공의의 67%는 휴일에 상시 출근해 '주 7일 근무'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휴일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응답자는 2%에 불과했다. 전공의의 74.4%는 자신의 업무량이 '과다'하거나 '매우 과다'하다고 답했다.
B 씨는 1년차일 때는 3~4일을 병원에서 24시간 상주했다. 그가 병원에 머문 시간은 일주일에 144시간. 하루 평균 20시간씩 환자들의 콜을 대기하거나 일한 셈이다.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는 그는 외과나 내과, 소아과는 더 힘들다고 했다.
전공의는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와 대한병원협회가 합의한 연 14일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전공의는 64.1%에 달했다. 응답자의 40.4%는 '과도한 업무로 인해 서로 휴가를 안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답했다.
"입덧 참아가며 병원에서 주말근무"
B 씨는 올해 들어 법으로 보장된 출산휴가 90일을 가지 못했다. 근로계약서를 체결해 본 적도 없다.
B 씨는 임신 초기에 유독 입덧이 심했다. 하루에 10번 이상 구토를 하면서 야간근무, 주말근무를 했다. 임신한 상태에서 몸무게 3~4kg이 빠졌다. "주말 당직을 하러 병원에 가는 길에 운전하다가 구토가 나온 적이 있어요. 입 안에 토를 머금고 병원까지 가서 환자를 다 보고 집에 간 적이 있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열악한 과에서는 수련을 포기하는 전공의도 나온다. 산부인과의 2년차 레지던트 C 씨는 "올해 1년차가 7명이었는데 3명이 그만둬서 4명밖에 안 남았다"고 호소했다. 남은 전공의들의 업무강도가 더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전공의 주 80시간 근무제·48시간 연속근무 금지법 도입해야
전공의가 적정 시간 일해야 환자 안전이 보장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2008년 미국의 의료센터연구팀이 외과학회지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외과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하면 담낭수술을 받은 환자의 후유증 발병율이 5%에서 2%로 절반 이상 감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계기는 의료 사고였다. 1984년 미국에 고열과 오한 등의 증세로 응급실을 찾은 대학생 리비 시온(Libby Zion)은 병용 처방 금기약물을 처방 받아 사망했다. 18시간 이상 근무하던 인턴이 약을 잘못 처방했기 때문이었다. 리비 시온의 죽음을 계기로 2003년 7월 미국에서는 전공의의 근무시간을 주 80시간으로 제한하고 24시간 이상 연속 근무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효됐다. 유럽에서는 전공의 근무시간이 주 48시간으로 제한된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연속당직을 금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0년 설문조사에서 이 법안은 전공의 86.8%의 지지를 받았다.
전공의들의 요구에 대한병원협회는 침묵하고 있다. 한 해 진료수익이 1조 원이 넘어가는 소위 '빅5 병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은 "병원이 수익이 없어서 전문의를 덜 고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병원이 수익을 많이 내도 인력을 늘리거나 임금을 인상할 돈이 있으면 병상을 올리지, 사람에 투자하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수가 올리면 노동시간 줄어든다? 상업적 시스템 완화해야!" "(대한의사협회가) 전공의에게 전면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총알받이로 이용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지난달 28일 대회원 서신문을 통해 밝힌 내용이다. 대전협은 '대정부 투쟁'을 지휘하는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가 '불참하는 교수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편 가르기를 부추기고 전공의들에게 앞장설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의협은 '수가(국민건강보험공단과 환자가 의사에게 지불하는 돈)' 인상을 내걸고 1일 제 2차 '주 40시간 준법 파업'에 돌입했다. 저수가로 의사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주말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의협 회원들이 의원을 경영하는 '자영업자'라면 대학병원 등에서 일하는 전공의들은 '학생(수련의)이면서 동시에 근로자'다. 개원의들의 가장 큰 불만이 진료수익이라면 전공의의 가장 큰 불만은 근무시간이다. 두 단체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나는 이유다. 의협은 "수가가 올라가야 대형병원들도 전공의를 더 고용해서 노동강도가 완화될 수 있고, 전공의도 자신의 노동에 걸맞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전공의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형병원의 한 의대 교수는 "병원이 상업적 운영방식으로 과도하게 경쟁을 하도록 설계돼 있는 것이 의사들의 과도한 노동시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수가를 올리면 일시적으로 고용된 사람들의 수입이 일부 증가할 수는 있겠지만, 장시간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대형병원에서는 전공의뿐만 아니라 의대 교수들도 '수익성 논리'에 따른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일부 대형병원은 고가의 진료와 검사를 많이 한 의사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거나, 교수들의 수익실적을 1등부터 꼴등까지 발표하기도 한다. 병원의 진료수익은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교수들은 새벽까지 수술 실적을 내야하는 이유다. (☞관련 기사 : '돈독' 오른 병원의 속살, 현직 의사의 '카메라 고발') 이 교수는 개원가에 대해서도 "전 국민 건강보험을 도입하기 전에 의료가 완전히 시장에 내맡겨져 있을 때에도 평범한 개원의들은 초과 수익을 위해 늦은 시간까지 일했다"며 "수가를 인상한다고 해서 개원의들이 진료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해법으로 그는 "경쟁을 완화해 무리하게 환자를 유치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형병원이 적정 환자 수를 유지하면서 환자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대형병원은 응급환자나 중증환자를 주로 다루고, 지역사회 1차 의료기관(동네병원)은 만성질환자와 경증환자에게 포괄적인 1차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노동강도가 줄어들고 개원의들도 적정 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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