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 <프레시안>에 게재된 김종철 교수의 '수돗물 불소화 전국 확대, 꼭 막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에 대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측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싼 논란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 별로 여론조사를 통해 수돗물의 불소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구강보건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 진행됨에 따라 재점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불소화' 반대 입장을 주도한 김종철 교수가 해당 법률 개정작업에 대한 반대를 호소하는 서한을 전국 사회단체에 보내고 <프레시안>이 이를 기고로 소개함에 따라 역시 '불소화' 찬성을 대표하는 '건치' 측에서 반론문을 보내 온 것이다.
<프레시안>은 국민 건강에 다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이 문제가 보다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그 결과 법률개정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길 바라는 입장에서 이 반론문을 전문 소개한다. 앞으로 보다 진전된 논의가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공산당 음모로 불소 수돗물을 안 마시는 러브 박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나오는 장면이다. 박사는 부하에게 공산당이 수돗물에 불소를 탔으니 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과거 중요했던 수돗물 불소화의 반대 논리 중의 하나다). 모든 것을 냉전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과도하게 정치화된 예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수돗물불소농도조절사업(수돗물 불소화의 정확한 이름은 이것이다)이 시행된 지도 사반세기가 된다. 그러나 그에 버금가게 수돗물 불소화를 반대하는 집단의 반발도 이제 10년이 가까워진다. 사실 수돗물 불소화는 우리 사회의 민중 사회단체가 서로 대치하며 나뉜 최초의 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세력들 간의 대치는 그것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전력 사유화 반대 투쟁, 물 사유화 반대 투쟁 등에서 비슷한 모습들을 우리는 이미 보아 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수시로 비슷한 사례들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굳이 나쁠 것도 없다. 그것이 소모적 정치적 논쟁으로 전개되지 않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갈등을 어떻게 푸느냐는 중요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입장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모든 사안이 정치적 차이로 귀결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어선 안 되는 측면도 있다. 어떤 정책 사안에 대한 정치적 시각은 그 정책 사안에 대한 판단의 한 기준이다. 그렇지만 정책에 대한 판단은 다른 정치적 입장의 인정 속에서,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벗어나 그 정책이 갖는 고유한 구체성을 고려하는 입체적인 것이어야 함도 당연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만 편가르식 흑백논리의 정치적 무능력에서 벗어나, 생산적이며 현실적인 개혁을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적'이지 않은, 그러나 '반생태적'이지도 않은 수돗물 불소화**
수돗물 불소화의 경우도 그러하다. 수돗물 불소화 자체가 생태주의적 시각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수돗물 불소화 자체가 처한 조건이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수돗물 불소화는 도시 상수도 시스템이란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산업화의 결과로 초래된 도시화 속에서 (이 얼마나 반생태주의인가!) 도시인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기 위한 공종보건 및 위생이 발생한 것이며, 수돗물 불소화 역시 그런 사업의 하나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수돗물 불소화는 생태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는 수돗물 불소화의 한 측면일 뿐이다. 정책은 그 정책의 근저를 이루는 정치적 관점뿐만 아니라 고유한 실천적인 차원의 정책적 판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즉 수돗물 불소화가 생태주의적이지 않지만 과연 그것이 반생태적인 것이냐는 반성이다.
생태주의적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 중 수돗물 불소화에서 제기되는 것은 사전 예방의 원칙, 예기치 못한 위험이란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수돗물 불소화는 수 억 명을 대상으로 한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수돗물 불소화는 60년의 역사에서 위험성을 제기하는 수많은 반대 논리와 싸우면서 확대되고 있다. 그에 반해 환경을 훼손했거나 건강을 저해했던 단 하나의 현실적 결과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으로 그만큼 수돗물 불소화가 반생태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수돗물 불소화의 반생태적 결과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전 예방의 원칙을 이야기하기에는 60년 역사가 너무 길다.
선택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선택권은 수돗물 불소화의 문제가 아니라 상수도 급수 체계 그 자체의 문제일 뿐이다. 선택권이 문제라면, 대중을 대상으로하는 공중보건 및 위생 측면에서의 수돗물 공급 자체를 동의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상수도 급수체계가 반생태적인 것인가? 상수도 급수는 반생태주의적인 시스템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각자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보다 덜 환경 파괴적이다.
우리는 수돗물 불소화를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공중보건의 시각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충치에 의한 국민 건강 문제의 심각함(건강보험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치료가 이것이다)을 인정한다면, 중요한 것은 수돗물 불소화가 정치적으로 생태주의적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라, 60년 결과를 통해 그것이 현실적으로 반생태적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반생태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모르겠으나, 생태주의적 원리에 맞지 않기에 반대한다면, 이는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개정안과 주민자치**
열린우리당의 장향숙 의원이 주축이 되어 구강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상수도 사업본부의 임의에 맡겨졌던 수돗물 불소화를 이제는 각 단체장이 지역 주민의 의견을 물어 반대가 적으면 수돗물 불소화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한 것이 주 내용이다.
개정안의 필요성은 그간 수돗물 불소화 사업의 동향을 통해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수돗물 불소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80년대 초였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80년대 말 지방자치제가 이뤄져 주민자치운동의 하나로 수돗물 불소화란 의제가 형성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반대론이 몇몇 생태운동 진영에서 제기되면서 전국적 확대가 지체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여론조사의 결과, 반대가 많아 사업이 무산되는 곳에 대해, 보건의료적 시각에서는 아쉽지만, 주민자치의 원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찬성이 많을 경우에도 자치단체장들이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사업을 시행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면, 이는 주민자치의 윈칙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포항과 전북 등지에서 그런 예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NHS라는 선진적인 보건의료체계로 잘 알려진 영국에서도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예가 있다. 영국에서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사유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 물 공급을 사업자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개인사업자들이 지역보건책임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수돗물 불소화를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수돗물 불소화의 확대를 위해 영국 정부, 그것도 환경 보호를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환경부가 'WATER ACT 2003'이란 법률을 발의해 시행하고 있다. 법안 중 수돗물 불소화에 관련된 주요 내용은 지역보건책임자가 주민 여론을 수렴해 수돗물 불소화를 요구하면 수돗물 사업자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 측에서는 주민조사 방법에의 불신을 지적한다. 그러나 개정안은 조사가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주민 의사를 충분히 수렴할 수 있도록, 수돗물 불소화의 찬반 양 진영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조사방법을 마련해 법제화한다면, 개정안은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주민자치에 입각한 결정을 존중한다면 그 결과에 겸허히 동의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수돗물 불소화' 위험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몇 년 전 웃지 못할 소극 하나가 있었다. 수돗물 불소화 반대 진영에서 수돗물 불소화 반대에 앞장서 온 야무야니스를 추모하며 양심적인 시민과학자로 치켜세운 일이다. 그러나 야무야니스의 경력을 보면 너무 황당하다. 야무야니스의 저서를 보면 "에이즈 : HIV가 에이즈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희소식", "High Performance Health"(이 책에는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노화인자 불소 : 불소의 파괴적인 효과를 어떻게 알 수 있고 피할 수 있는가" 등이 포함돼 있었다.
수돗물 불소화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이런 자를 양심적인 시민과학자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사람은 <전미건강연합(NHI)>의 과학책임자로 근무했는데, 이 조직은 이름과 달리 불법 건강식품과 기구를 팔던 곳이었다. 그리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수돗물 불소화의 안전성에 대한 반대 논리 대부분이 야무야니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니 반대의 증거는 없고, 반대의 허술한 논리만 있을 뿐이다.
김종철 교수는 수돗물 불소화에 대한 논란을 제기한 최근의 한 기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CDC(미국 질병통제국)는 이 연구가 아직 정밀심사과정을 거치지 않아 학술지에 게재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연구의 질이나 의미를 평가할 수 없는 상태라고 발표하며, CDC는 여전히 수돗물 불소화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밝혔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의혹이라면 당연히 엄정하게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다. 수돗물 불소화의 60여 년에서 의혹의 제기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수돗물 불소화 기사가 나온 며칠 뒤 바로 같은 대학(하버드)에서 진화론과 창조과학(지적설계론)을 검토하기 위해 수 억 달러의 연구계획을 발표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100여 년이 넘는 과학 논쟁(사실 창조론은 과학 논쟁도 아니며, 마치 과학 논쟁이 있는 것 처럼 만드는 것 자체가 창조론이 바라는 것일 뿐이다)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또한 일부 주장처럼 공교육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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