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100명 중 겨우 10명이 노조에 가입해 있던 2010년, 축 쳐진 노조나 노조간부들에게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 즈음에 복지가 사회이슈로 떠올랐다. 나는 동료들에게 "네가 알아서 먹고 살아", "네가 그런 꼴인 것은 너의 경쟁력이 형편없으니까 그런 거야"라는 얘기보다 "함께 먹고 살자"는 사회로 바뀌고 있으니 힘내자고 했다.
복지가 사회이슈가 된 후 "노동 없는 복지"를 비판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노동문제를 빠뜨리고 있다는 지적이고 동의한다. 그런데 자주 듣다보니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삐딱하게 되묻곤 했다. "노동 없는 복지가 뭐가 문제야. 오히려 노동 있는 복지야 말로 문제 있는 생각이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 해. 그럼 애들이나 노인, 실업자는 죄다 굶어 죽으란 얘기잖아." 노동을 해야만 복지혜택을 주는 소위 '생산적 복지'와 같은 사고방식을 문제 삼은 거다.
심지어 "고용이 복지의 핵심이다"는 주장을 접하기도 했다. 일자리만 있다면 먹고 산다는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워킹푸어'라는 얘기가 나돌까. 일자리가 있어도 가난한 현실에서 설득력이 있는 얘기일까. 복지얘기가 나온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노동운동 안에 낡은 프레임들이 살아있다.
고용은 쥐약이다
"일자리 만세! 고용만세!" 이건 민주노총이나 <조선일보>나 똑같다.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친다. 바꿔 말하면 고용은 생명이다. 고용은 목숨이 되었다. 목숨 같은 고용을 위해서 뭔 짓을 못하겠는가. 실업자는 영혼을 팔아서 취직하려 하고 취업자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자리를 지키려 한다. 노동자들끼리 일자리를 놓고 '개 밥그릇 싸움'을 한다.
어제의 동료가 고용게임을 둘러싼 링 위에서 경쟁자가 된다.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가 적이 된다. 노조는 분열한다. 노동자계급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한다. 대기업 정규직에서부터 영세하청기업의 비정규직까지 격차가 너무 크다. 대기업의 사내하청은 중소기업의 정규직보다 임금도 노동조건도 더 낫다.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구체적 처지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러니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의 실체가 뭔지 찾아보기 어렵다.
복지가 있어야 파업 권리도 강해진다
지난 7월 27일, 경기 안산의 에스제이엠이라는 회사에 용역경비들이 쳐들어와서 노동자를 집단폭행했다. 이 사건 이후 국회청문회까지 열리면서 수많은 산업현장에 기업권력과 용역깡패, 노조파괴 전문컨설팅업체, 노동부와 경찰 관료들이 결탁한 폭력의 카르텔이 밝혀지고 있다. 그랬다. 노동자가 권리를 외치면 밟히고 깨져왔다. 노동인권은 땅에 떨어졌다.
헌법은 노동권을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했다. 자본주의에서 취직하지 못하면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니 노동은 권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무조건 해야 하는 의무다. 헌법은 쌩 구라를 깐다. 법률은 노동3권을 보장한다. 그런데 노조를 만들어서 파업을 하면 잘린다. 내가 일하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3700여 명의 조합원 중에 해고되어 길게는 10년 적게는 3년이나 싸우는 노동자들이 무려 106명이나 된다. 권리를 외치면 이렇게 모질고 길게 싸워야 하는데 겁나서 누가 노조를 만들겠는가. 이러니 노조 조직률이 10%에 불과하다.
매 맞는 아내가 '결혼으로부터 철수할 권리'인 이혼의 권리가 없다면 매 맞으며 결혼생활을 견뎌야 한다. 이혼하면 경제적 파탄에 이른다면 이건 이혼의 실질적 권리가 없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특정 기업에서 '노동으로부터 철수할 권리'인 파업의 권리가 없다면 노동자는 그냥 견디면서 일해야 한다. 진정한 노동권의 향상을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철수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설혹 일시적 해고가 되더라도 사회복지를 통해 '사회적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권리도 높아진다. 해고가 살인이 아니라 "해고는 조금 불편할 하게 할 뿐이다"는 정도가 되어야 "해고 할 테면 하셔"라고 버티면서 권리를 외칠 수 있다.
"복지국가를 외치는 것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떡고물을 주는 개량주의자들의 유혹"이라는 소아병적 좌파들의 얘기를 듣곤 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사회복지는 위험한 유혹이다. 이러니 노동운동은 세상이 외치는 복지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기 어렵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아무리 "해고는 살인"이라고 비분강개하며 투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자고 한들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또 하나의 쥐약, 기업복지
조직된 노동자들은 기업복지에 열을 올린다. 대기업 노조들이 따 놓은 기업복지 수준은 유럽의 사회복지에 비교해도 별로 손색이 없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은 대기업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자녀의 학자금이 회사에서 나온다. 의료보험 외에도 추기로 들어가는 병원비를 회사에서 보조한다. 주택자금융자도 해준다. 하지만 조직된 노동자라고 해도 영세업체에서는 기업복지가 별 볼일 없다. 노조를 만들지 못하게 기업복지를 제공하는 대기업을 빼면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는 기업복지 혜택이 별로 없다. 사회복지도 별 볼일 없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눈앞의 현금인 기업복지에 목을 매니 어음 같은 사회복지는 딴 나라 얘기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복지는 별나라 얘기다. 임금의 격차보다 기업복지의 격차는 더 크다. 노조나 노동운동이 기업복지를 키우는 쪽으로만 계속 나가면서 사회복지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으면 "노동자는 하나다"는 얘기는 헛소리가 될 뿐이다. 노동자가 단결하기를 원한다면 사회복지의 확대에 노조와 노동운동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기업복지의 확대는 노동자를 분열에 빠뜨리는 쥐약이다'는 심각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노동자의 격차는 점점 늘고 분열은 깊어갈 것이다.
사회 전체에 최면걸기?
최면을 걸 때 흔히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줄에 달린 눈앞에 대고 시계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년간의 사회현상을 보면서 마치 이와 같은 상황을 목격한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시장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경쟁과 효율성이 최고였다. 경제를 망가뜨린 원인은 과도한 기업의 빚잔치라며 기업이 범인으로 지목받더니 경제를 살리려면 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금방 바뀌었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쳤다. 기업은 경제를 살릴 슈퍼영웅이 되었다. 노조는 슈퍼영웅을 괴롭히는 악당 쯤으로 취급 되었다.
그런데 세계금융위기 이후에 망해가는 경제를 구원할 새로운 영웅이라며 국가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장과 기업을 통제한 새로운 영웅으로 국가가 떠올랐다. 착한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착한 국가가 필요하다면서 복지국가론이 대세가 되고 있다. 좌우를 오가는 최면술사의 줄 달린 시계처럼 시장과 국가, 기업과 정치를 오가는 슈퍼영웅의 신화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착한 국가, 시장과 기업권력을 통제할 새로운 슈퍼영웅에 대한 열망으로 총선을 거쳐 대선에 이르고 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중에 진짜 우리를 구원할 영웅은 누가될까.
국가에 대한 트라우마
나는 국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가진 기대감은 상처로 바뀌었다. 세계적인 정치거물 김대중 대통령은 바닥난 외환보유고에 협박당하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통분담을 앞세웠고 정리해고를 실행에 옮겼다. 그때 나는 98년 현대차 정리해고, 공권력을 투입한 만도기계, 전쟁터 같던 2001년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를 현장에서 겪었다. 당시 김대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 씨를 만났을 때 "대통령 침실에 비상등이 켜져 있다. 외환보유고나 주가가 빠지면 비상등이 울린다. 이런 판국에 일단 경제를 살리려면 인권과 노동자를 사랑하시는 대통령도 어쩔 수 없으니 좀 도와 달라"고 했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고 나서도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노조는 '배부른 귀족'들로 공격받으면서 점점 바닥으로 내려갔다. 청와대와 정부에 들어갔던 좀 진보적인 양 하던 사람들은 "모피아 권력에 당했다"면서 무기력했고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있다"고 했다.
아예 사장님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면서 노골적으로 기업권력의 파견자처럼 굴었다. 나는 '기업권력의 시대'인 2009년, 쌍용차의 77일 동안 하늘에서 최루액으로 땅에서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날아오는 기업권력을 경험했다.
MB정권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착한 국가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착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영웅들께서 납시셨다. 박근혜 후보 쪽에서는 김종인, 김광두, 이한구가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설왕설래 하고, 문재인 캠프에는 이정우와 박승이 정책을 짠다고 하고, 안철수 캠프에서는 이헌재, 장하성 등이 정책핵심이라는 등의 얘기들이 떠돈다. 모피아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과거의 기업권력의 지시를 받아오던 '모피아'와 시장에 머리를 조아리던 국가께서는 개과천선을 하신 것이 맞는 걸까. 도대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합창하던 분들께서는 기업권력을 통제할 어떤 무기를 들고 계신 걸까.
오히려 막강한 국가의 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박근혜다. 하지만 그건 총칼로 세상을 휘두르던 독재자인 아버지 밑에서 경험한 것이고 기업권력이 '제1의 권력'인 세상에서 가장 기업과 가까운 그녀가 뭘 한다는 건지 참 막막해 보인다.
'경제민주화'를 모든 후보들이 외치지만 대선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기시감만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김대중 정권도 외환위기 속에 기업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무력화되었고 노무현 대통령도 시장권력에 굴복했고 이명박 정권은 아예 기업권력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는데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막강 기업권력의 반격을 어떻게 이겨낸단 말인가. 벌써부터 르노삼성에서, 현대중공업에서 희망퇴직을 시작하고 있다. 새 정부를 길들이기 위한 기업권력의 반격들은 이미 경제민주화 논쟁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
한때 '닥치고 투표'하라는 얘기가 휩쓸었다. 물론 나도 투표 할 거다. 대선후보들 중에 누군가를 분명히 찍을 거다. 투표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한때 열렬히 환영받던 슈퍼영웅이자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는 기업권력과 요즘 슈퍼영웅으로 떠오르는 국가를 나의 영웅으로 환호하지 않는다.
기업권력도 국가권력도 아닌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드는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까. 내게는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가 더 그럴싸하게 다가오는 영웅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만복' 단체가 표방하는 활동이 외부의 영웅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주체가 되자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기업복지에 묶인 노조를 좀 더 사회적인 복지확대로 나서도록 노력하고, 기업복지도 국가복지도 별나라 얘기쯤인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께 공간을 열어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와 노동운동 안에 박힌 낡은 프레임과도 싸워 나갈 것이다.
"내가 하겠다"는 정치인들의 얘기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어쩌면 소박하고 진부할지도 모를 화두를 안고 그들이 만드는 복지가 아닌 내가 만드는 복지의 꿈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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