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대·비전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0여 년 근무해 왔습니다. 99년 이전에는 전주대·비전대 정규직이었던 이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용역업체인 (주)온리원의 매장청소와 물건운반, 김장 담그기 등에 동원되어 억울한 삶을 살다가 2011년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측은 이들 노동자들과 하는 일이 전혀 다른 온리원 매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복수노조를 만들고, 전주대/비전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한 노동조합과의 성실교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온리원은 2000년에 신동아학원과 전주대·비전대 교직원들이 공동출자하여 만든 용역업체이고, 신동아학원의 온리원에 대한 지분율은 30%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신동아학원도 전주대/비전대도 문제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온리원과 신동아학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온누리교회 등 기독교 신자입니다. 온누리교회 로비에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는 성경 내용이 적혀있지만, 온누리교회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물도 마시지 말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누리교회는 여성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교회 앞에 집회신고를 낼까봐 먼저 집회신고를 내고 있습니다.
현재, 단식농성 중인 이태식 지부장과 여성노동자들은 현재 신동아학원과 밀알복지재단 홍정길 이사장(전 남서울은혜교회 목사)에게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강남구 일원동 밀알교회(3호선 일원역 7번 출구) 앞에서 노숙농성 중입니다. 여성노동자들은 밤에 소복과 비닐 한 장을 덮고 잠을 자며 작은 희망이 이뤄지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태식 지부장은 단식농성 40일 차가 넘어가면서 '아침을 맞는 것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단식농성 하는 하루가 전주에서의 이틀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주말에는 많은 비가 온다하여 걱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필자>
학생들이 잡부라고 할 정도야
"온리원에서 천냥 백화점이라는 데를 차리더니 거기에 우리를 데려다가 일을 시킨 거예요. 가게 전단지도 우리가 다 접고, 글씨 잘못 쓴 거 정정 테이프도 우리가 다 붙였어요. 우리가 물건 진열하고 포장하고 청소하고. 서울, 광주, 부산도 갔어요. 매장에 물건 들이기 전에 청소를 우리가 다 하고, 물건 들일 때는 가서 정리하고 그렇게 했어요. 다른 일꾼을 안살라고 학교 다른 직원들도 불러다가 일을 시켰어요. 매장 꾸밀 때 목수도 데려다가 일 시키고."
2000년 8월, 경비업과 청소용역 등 위생관리 용역업 허가를 받아 2001년 근로자 파견사업 허가를 받은 온리원은 2001년 '천원상점 온리원 고사점 1호점' 오픈으로 생활잡화 도소매업을 시작한다. 2011년 11월 현재 기준으로 직영사업장 27점, 전문가맹점 15점, 프랜차이즈매장 9점을 갖고 있는 온리원은 천원상점 오픈과 운영 과정에서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전주대·비전대 청소·시설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학교 근무시간에는 무상으로, 학교 근무 외 시간에는 낮은 인건비(전주 매장의 경우 2만 원)로 일을 시켜왔다. 이는 온리원과 전주대·비전대·신동아학원 측과 긴밀한 관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근무 끝나고, 저녁 한 끼 사주고 김제랄지 정읍, 부안 같은 데를 가요. 도착하면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장사 끝나고 9시 반부터 청소를 시작해요. 물청소 하고 왁스칠을 하죠. 한 번에 다 안 되니까 시간도 많이 걸리더라고요. 일주일에 두 번 갈 때도 있고 그랬어요. 돈 쬐끔 주니까 안 갈라고들 해요. 끝나면 새벽 두세 시 돼요. 그렇게 해서 받는 게 이삼만 원이에요. 집에 와서 씻고 나면 잠이 오간요. 많이 자야 한 시간 두 시간. 그 이튿날 나와서 또 일하고."
▲ 전주오거리 온리원 매장. ⓒ연정 |
올해로 근무 21년 차가 되는 정옥주(가명) 씨는 부산 매장에까지 매장 청소를 다녀온 경험도 갖고 있었다. 학교 근무가 끝난 후에 새벽까지 매장에서 일을 하고 그 다음날 올 때도 있었고, 다음날 까지 일을 하고 오기도 했다. 정옥주 씨는 전북지역보다 보수는 조금 더 주지만, 전주에서 부산까지 왕복시간을 감안할 때 많은 금액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 원래 업무도 아니고 시간도 너무 많이 소요되는 일이라 희망자가 별로 없었단다. 심지어 온리원은 교내에 운영하는 식당에 청소노동자들을 불러다가 김장 담그는 일까지 시켰다.
"저는 그 건물에 있다는 이유로 3일 내리 김장을 담갔어요. 따로 사람 구해 돈을 주기 싫으니까 우리를 근무시간에 데려간 거죠. 한 건물에 5명이 있으면 3명은 건물청소하고, 2명은 김장하러 가는 거예요. 김장하러 가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힘들고, 남아서 건물청소 하는 사람은 5명이 하던 걸 3명이 해야 되니 그 사람들대로 힘든 거예요."
본 업무와 사측에서 부당하게 시키는 매장 일, 잔디심기 등을 하느라 어깨와 무릎 등 관절이 망가진 여성노동자들은 물리치료를 받아가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학교는 우리가 다 만들었어
"○○는 맨 날 매장에 불려나가니까 나 혼자 건물 청소를 다 했어. 화장실 열었다 닫았다 하는 칸이 아흔 아홉 칸이여. 그걸 나 혼자 다 했다니께. 화장실 청소 해야지, 쓰레기 걷어야지, 복도 밀어야지, 강의실 청소해야지."
여성노동자들이 전주대와 비전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살아온 이야기는 끝이 없다. 학교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어 한 번이라도 덜 오르내리려고 쓰레기 포대를 한 손에 2개씩 총 4개를 들고 내려오기도 했다.
▲ 전주대학교 구 정문. ⓒ연정 |
"수능 끝나고 나면 고등학생들을 불러다놓고 학교 안에서 일일개방이라고 행사를 해요. 학교 안에 매장을 차리는 거죠. 고등학생들한테 물건을 사라고 3000원짜리 상품권을 주는데, 우리가 거기 나가서 장사를 하는 거예요. 학교 홍보도 하고."
"우리 막둥이가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갔어요. 전학 시켜야겄는디 여기서(온리원에서) 안 빼줘요.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우리 막둥이가 지 혼자 가서 전학을 했어요."
"우린 조경일도 했어. 풀도 베고. 그걸 산에다 버리고. 난로에다 석유 다 붓고. 잔디도 우리가 다 심었어. 학교는 우리가 다 만들었어."
주말에 학교 측은 행사 등을 하고자하는 외부 기관에 운동장을 대여료를 받고, 대여해 주기도 했다. 이 행사가 끝난 뒤에 청소는 월요일 날 아침에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몫이었다. 행사가 끝난 월요일 아침이면 청소노동자들은 자신의 본 업무를 두고, 운동장에 와서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부터 해야 했다. 대여료에는 청소비도 포함되어 있건만, 자신의 본 업무를 하면서 운동장 청소까지 한 노동자들은 정당한 노동력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출퇴근 할 때, 학교에서 운행하는 차량과 코스가 맞지 않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하는 노동자들은 교통비를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최저임금 + 10원
이렇게 힘겹게 일을 하고, 4대보험 등을 공제하고 청소노동자들이 받는 현재 급여는 92만 원 정도 된다. 2012년도 최저임금은 시급 4580원이다. 전주대와 비전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의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더 많은 4590원이다. 법에 보장된 최저임금이라도 받게 된 것은 참다못한 여성노동자들이 2011년 노동조합에 가입을 했기 때문이다.
"근속수당이 있긴 해요. 3년 된 사람이나 10년 된 사람이나 똑같이 2만 원 줘요. 그것도 2007년 들어온 사람부터는 없어. 그래봐야 2만원 차이 밖에 안 나니까 20년 된 사람이나 어제 온 사람이나 똑같애."
▲ 이윤엽 판화가의 판화 '비정규직 없는 세상'. ⓒ이윤엽 |
전주대와 비전대 청소노동자들에게 근속연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점심은 온리원에서 식권을 주면 학생식당에 가서 식권을 내고 먹는데, 여성노동자들은 노조 가입 전에 학생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가 푸대접 받은 경험을 이야기한다.
"처음엔 식권 금액이 적어서 푸대접을 받았어요. 그 전에는 2500원 짜리를 온리원에서 2000원 만 쳐서 줬어요. 2000원 할 때는 1500원만 쳐주고. 항상 온리원이 식당에다 돈을 적게 주는 거야. 돈이 적으니까 김치하고 밥하고 국 가져오면 식권하고 맞아. 작년에 투쟁하고 나서 3000원씩 쳐주니까 좀 먹을 만 한 거지. 지금은 우리가 식판에다 먹을만치 갖다먹지."
리어카도 노조 들고 나서 없어진 거여
"학교 일 끝나고, 매장 청소하고 와서 잠을 얼마나 잤겄어요. 애들 챙기고 멕일 거 해놓고 일 나오고 그랬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았어. 제 청춘을 여기다 바쳤어요. 우리가 나빠요? 인제 와서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라는 식으로 그러는데. 우린 억울해서 못 떠난다고."
30대 중반에 입사해서 올해 50대 초반이 된 박영신 씨는 18년 동안 그렇게 부려먹고 노조 가입해서 자신의 권리 찾겠다는데, 그걸 막냐면서 분개한다. 박영신 씨는 이사하는 건물 청소를 위해 직원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차 문에 발가락이 들어가 다쳤는데도 한나절 내내 아픈 발을 끌고 다니면서 일을 했다.
"애려서 못살겠더라고. 진짜. 총무처에 가서 '나 아파서 못살응께 약을 사다주든가 나 병원 가야겠다' 그랬더니 가라 그러더라고. 약을 사먹긴 했는데, 안 듣더라고. 병원 갔다와가지고 그 이튿날 그놈을 짬매고 와갖고 나 좀 셔야겠다고 그랬더니 이틀인가 밖에 안줘요. 산재처리는 안 해주고."
결국 박영신 씨는 사과 한 마디 못 듣고, 이틀 쉬고, 자신의 돈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일을 해야 했다.
▲ 6월 28일, 화물연대 파업과 철탑 고공농성이 진행 중인 의왕 ICD '공공운수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여한 전주대·비전대 청소 노동자들. ⓒ연정 |
"우리는 휴가가 몇 갠 지도 몰랐어요. 방학 때 몇 개 쉬라고 하면 쉬는 걸로 알았지. 휴가라고 하는 거는 내가 필요할 때 써야 휴가 아니에요? 근데 노동조합 만들고는 내가 필요하면 휴가 쓸 수 있어요. 대체 인력을 안 써주니까 같이 일하는 짝꿍이 힘들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는 노동조합이 있어서예요."
"처음엔 쓰레기 담아갖고 리어카 끌으라고 하는데, 놀랬어. 저걸 어떻게 끌어야 된다냐. 어떡해요. 일을 해야 되니까 돈 벌어야 되니까 했죠. 하루 두 번씩 하는데, 소각장이 상당히 멀어. 경사도 지고. 얼마나 힘들었는가 몰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끌어야 했으니까. 눈이 쌓이면 미끄러져. 리어카도 노조 들고 나서 없어진 거여."
그건 관리자 맘잉께
온리원의 노무관리는 원칙과 일관성 없이 신동아학원과 온리원 관리자들의 개인적인 성향 등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다.
"학교나 온리원 창립기념일 연말 같은 때 상을 주거나 할 때도 일 잘하는 사람을 주든가 아니면 오래된 사람을 주든가 해야 되는데, 여긴 관리자 맘에 드는 사람만 줘요. 온지 1년 반 된 사람은 상을 타는데, 10년 된 사람은 한 번도 못 타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관리자 맘잉께. 공로상을 돈으로 주는데, 상급을 50만 원 줬단 말도 있고 80만 원 줬단 소리도 있어. 상은 모여 갖고 공개적으로 줘야 되잖아. 근데 알도 못하게 비밀이여. 떳떳한디 같으면 그렇게 안 할티지."
여성노동자들은 온리원 측이 복날에 '하림 냉동 포장 닭'을 마음 내킬 때 주다가 언제부터인가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신동아학원 김홍국 이사가 회장으로 있는 하림그룹 회장과의 연관성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조가 없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요
"옛날에는 억울해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어요. 옳은 말 하면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해요. 이력서가 이렇게 쌓였다고. 예쁘고 젊고 날씬한 사람 뽑는다고. 노조가 없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요."
한 여성노동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한다. 결혼 이후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하면서 사회와 담을 쌓고 지내다가 일을 시작하려다보니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오윤임 평등노조 전주대·비전대 현장대표는 아이들과 시간대가 맞는 일을 찾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경우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했던 오윤임 씨는 올해 초 현장대표를 맡아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 여성노동자들이 농성하던 전주대 총장실. ⓒ연정 |
"저 같은 이유로 일을 하게 된 젊은 엄마들이 많아요. 그런데 막상 현실을 부딪치다 보면 이건 아닌데,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조를 찾게 되었던 거죠. 언니들이 50대 중반을 넘으신 분들이 많아요. 싸움이 길어지다 보니까 건강상의 어려움도 있고, 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인 분들은 금전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저희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지금 최선을 다해 하고 있거든요. 저희의 권리를 찾는 거 그거 단 한 가지를 위해서 이 싸움을 1년간 하고 있는데요. 저희의 권리 작은 권리지만, 그걸 찾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겁니다."
"거리 위 지나는 걸음 아래 이름 없는 들풀일지라도
언젠가 당신에 손길이 가냘픈 내 손에 닿기를......"
- 전주대·비전대 청소노동자 합창 UCC <작은 희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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