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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유시민은 좋지만 진보정당은 싫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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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중권 유시민은 좋지만 진보정당은 싫다. 왜?"

[길 잃은 '노동정치', 좌표는?·④] '화이트칼라'가 보는 노동정치

- 길 잃은 '노동정치', 좌표는?
☞①"자본가는 피를 빨고 진보정당은 표를 빨았다"
☞②"쓰레기차에 실려간 영정사진들이 남긴 숙제"
☞③"이준석, 김재연이 청년대표?… 취업 걱정 해봤나"

한 대기업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이석호(35, 가명) 씨.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말하면서도 기업을 옛 독재정부처럼 움직이려는 현 정부에 실망한 지 오래다. '나꼼수'를 즐겨 듣고, 재벌 총수의 독선적인 경영방식은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재벌 개혁을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진보정당은, 그래서 이 씨에게 매력적일까.

이 씨는 "진보정당에 투표할 생각은 없다"라고 했다. "진보정당이 (사무직) '월급쟁이'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월급쟁이, 하지만 노동자는 싫다"?

해외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직장인 이준형(32, 가명) 씨 역시 '나꼼수'를 즐겨 듣고, MBC <100분 토론>과 <PD수첩>은 녹화를 해서라도 꼭 챙겨본다. 진중권 동양대 겸임교수의 책을 좋아하고, 유시민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에게 호감이 있다. 새누리당은 "일단 꼰대 같아서" 싫다. 그는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야권을 지지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노동자'라는 단어 자체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진보신당의 당원이며 출판사에서 일하는 김민경(31, 가명) 씨는 자신에게 "노동자 정체성은 있"다면서도 "다른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연대의식은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당 모임에서, 공부하는 책에서 "노동자의 연대의식"을 접하곤 있으나, 이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진 못"하는 것. 그는 진보정당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 돼 보였다.

집토끼에겐 진정성을 의심받고, 산토끼에겐 외계인 취급

노동정치의 성장, 곧 진보정당의 대중화는 민주노동당 창립, 나아가 1995년 민주노총 출범 당시부터 해묵은 과제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진보정당은 '운동권 세력' 혹은 '생산직 노조'를 위한 정당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고,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능력은 없는 정당으로 여겨져 왔다. "과거 민노당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란 슬로건을 내건 이유에는 '노동자'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주는 부정적 어감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노동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 생산직 노동자들이 '집토끼'라면, 상대적으로 노동자 정체성이 약했던 사무직, 전문직 노동자들은 '산토끼'였다. 그리고 지금, 노동정치가 겪고 있는 위기는 '집토끼'에게선 진정성을 의심받고, '산토끼'에게선 외계인 취급을 받는데서 상당 부분 비롯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와는 상관 없는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한 상당수 국가에서 노조는 정당에 강력한 발언권을 갖고,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나선다. 노동자가 그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요구는 곧 소수 사용자가 아닌, 대다수 서민들의 요구가 된다. 지난 17일 서울 시내버스 노조의 파업 출정식 장면. ⓒ뉴시스

"그쪽이 더 괜찮은 사람들이란 건 알지만…"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약 30%가 자영업자다. 70%는 월급쟁이, 곧 노동자다. 생산직 노동자뿐 아니라 대기업 사무직, 연구원, 대학교수, 기자도 노동자다. 앞서 언급한 '산토끼'가 전체 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늘어왔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질 당시부터 노동운동은 '산토끼'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팔뚝질'로 대변되던 노동운동가들과 자신의 노동자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는 보통 서민의 접점을 만들어내면 노동정치의 성장이 가능하리라는 이유였다. 해답은 대부분 국민이 노동정치가 제기하는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가 국민 대부분의 바람과 맞닿는 지점은 많다. 당장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언론노동자들에게 편집권 독립,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한 노동환경 개선 문제다. 기자, PD 등이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편집권 독립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요구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쟁점을 가진다. 언론이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성역 없는 감시가 가능하며, 여론 왜곡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수 국민이 원하는 개혁 방향이기도 하다.

만일 언론노동자의 요구를 제대로 소화해 줄 힘과 인식공감대를 가진 정당이 있었다면, 언론노동자들의 요구는 파업 이전에 의회 안에서 소화 가능했을 것이다. 단단한 노조가 제기한 직업 환경 개선 의제를 상급 단체가 끌어안고,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정책 의제를 노동정치를 긍정하는 정당이 입법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노동정치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란 말이 불편하다'는 이준형 씨도 정당이 이와 같은 고민을 해준다면 그들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벌 구조에서 생기는) 공과 사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우리도 안고 있다. 다만 노조가 없고 당장 업무 환경이 생산직 노동자에 비해 좋으니 불만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라며 "진보정당이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왜 지지하지 않겠나. 그쪽(범 진보진영)이 더 괜찮은 사람들이란 건 나도 안다"고 밝혔다.

"진짜로 '복지'하겠다고 한다면야…"

미국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뒤, 국내 대기업에서 5년째 연구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최재성 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나도 노동자"라고 선선히 수긍했다. 하지만 진심어린 반응은 아니었다. 말투에서 자조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공학박사가 되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꿈을 이룬 셈이지만, 이후의 현실은 팍팍했다. 교수는 되지 못했고, 직장에선 끝없는 야근과 격무, 살벌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사표를 생각하지만, 전업주부인 아내와 두 자녀를 생각하면 대안이 없다. 급여가 지금과 비슷하면서 보다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직장을 찾기란 불가능해보인다. 그냥 다니는 수밖에.

그는 요즘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저술에 푹 빠져 있다. 장 교수의 책은 모조리 읽었다. 장 교수가 주장하는 대로, 복지국가가 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지금 직장을 관둘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보육, 교육, 의료, 노후 보장, 실업 대책 등이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지금보다 급여가 확 줄어들어도 삶이 불안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중소기업에도 실력있는 인재가 몰리고,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전체 국가 경제 역시 성장하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진보정당 찍어야겠네." 대답은 단호했다. "그 사람들(진보정당)이 그런 이야기(사회안전망 강화)를 진지하게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라는 게다. 과거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치 세력은 사회복지 강화를 주장해 왔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줬다. 그래도 반응은 같았다. "그냥 구호일 뿐"이라는 게다.

아파트를 소유하고 자동차를 굴리며 살아가는데 충분한 급여을 받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늘 불안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이른바 첨단기술이지만, 그래서 실용성은 적다. 당장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연구하는 분야가 '사업성이 적다'는 결론이 난다면, 그는 회사를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 평생 연구만 하던 그가 회사를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그는 막막하다고 했다.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몰두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어쩌면 현실도피일지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그에게 복지국가는 "실현가능성 없는 꿈"일 뿐이다. 만약 실제로 복지를 강화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온몸을 던져 지지하겠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런 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성 노동자도 노동자다…보육에 무관심한 진보정당은 노동자 정당 아냐"

진보정당의 구호나 정책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대답은 곳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는 여성 김미애 씨는 이른바 워킹맘이다. 아이를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에 출근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심스럽다. 그는 "보육 문제에 무관심한 정당이라면, 노동자 정당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여성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냐"라는 게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의 최대 고민거리가 보육 문제라는 것.

그는 매번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에 투표했지만,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나 믿음은 커보이지 않았다. 김 씨는 세칭 명문대를 나와서 사무직으로 일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는 생각이 견고하다. 여느 대기업 사무직들과는 다른 면모다. 이런 그가 보기에도, 진보정당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고민과 동떨어진 이야기만 해 왔다.

▲지난 2월 19일 저녁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으랏차차 MBC' 콘서트. MBC 노조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은 많은 시민들의 공감대를 낳았다. ⓒ프레시안(최형락)

결국 이야기는 다시 '정치'로 모아진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생산직과 사무직, 여성과 남성 노동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수렴하는 일, 그래서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정하는 일 등은 모두 의회에서 이뤄진다. 의회에 진출해야만 이런 과정에 참가할 수 있고, 그게 바로 정치다.

현실의 진보정당에 믿음은 가지 않지만, 제대로 된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고 대답했던 이른바 '산토끼'들의 대답을 모아보면, 답은 선명해진다. 노동정치를 일궈온 세력은 노동자와 서민이 원하는 진보적인 민생 의제를 구현할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 '팔뚝질'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노동정치, 시민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박상훈 대표는 "(아무리 노동운동을 열심히 한들) 정치가 약하다면 약자는 결국 다 죽는다"며 "결국 정치적 힘을 키워 정부 정책을 바꾸고, 입법안을 마련하고, 사회 모순을 일으키는 이들을 법의 지배를 통해 수사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했다.

자칫 기존 운동 논리를 '버리는 듯' 보이는 정치력 강화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취약한 노동의 시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노동이 과감히 시민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영국 노동당도 '페이비언 사회주의(의회 정치를 통한 점진적 사회 개혁)'를 표방해 중산층 엘리트를 흡수하고, 그 힘으로 집권하지 않았느냐"며 "노조가 노동정치(노동자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의 성공을 위해서는 의회민주주의에 적극 관여하고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의 권력을 보여주겠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4년, 원내진출 목표를 내건 민주노동당의 선거 포스터. 노동정치의 현실화는 노동자 정당의 중요한 목표였다.

하지만 이런 '대중화' 논리는 4.11 총선 이후 몸살을 앓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태를 통해 힘을 잃을 수 있다. "정체성을 모르겠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색의 세력이 모여 만든 통합진보당은, 노동자성을 희석시키는 과감한 대중화 노선을 취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 후에는 정파 갈등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통진당 사태, 오히려 기회다"

박 대표는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노동정치가 무너진 걸 비판만 한다면 의미를 찾기 어렵다"라며 "노골적으로 말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한들,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그나마 통진당 사태가 터지면서 노동정치의 중요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노동정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전부터 논란이 됐던 민주노총 내 정파 갈등,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문제 등이 오히려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제대로 조명받을 기회를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오히려 노동정치가 조용히 고사했을 것"이라며 "중요한 건 이번 진통을 지혜롭게 극복해 한국 사회가 진보가 없는, 노동이 없는 정치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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