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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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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 안 돼"

이건희, 하루 전 이맹희·이숙희 씨 발언에 격한 반응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자신과 재산 상속 분쟁을 벌이는 이맹희 씨와 이숙희 씨를 향해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이 회장은 24일 오전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으로 출근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이맹희 씨에 대해 "우리 집에서는 퇴출당한 양반"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그 양반(이맹희 씨)은 30년 전에 나를 군대에 고소를 하고, 아버지를 형무소 넣겠다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을 했던 양반"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회장은 "(이맹희 씨가)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이러지만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이 사람이 제사에 나와서 제사 지내는 꼴을 내가 못 봤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회장은 "아버지는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이 아니다'고 했다"며 "이맹희 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삼성家의 그늘, 이맹희는 누구?, 삼성 vs CJ…'가문의 전쟁' 어디로 가나? , 삼성家 자식들의 낯 뜨거운 이전투구)

ⓒ연합뉴스

이는 하루 전인 지난 23일 이맹희 씨가 소송 대리인인 법무법인 화우를 통해 밝힌 입장에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고(故)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씨는 "최근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라며 이건희 회장을 향해 "현재까지 형제지간에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늘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 한 푼도 안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했다"라고 밝혔다. "최근에야 숨겨왔던 그 엄청난 차명재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라는 발언도 곁들였다. (☞관련 기사: 직격탄 날린 이맹희 "건희가 어린애 같은 말 하는 것 듣고…")

이건희 회장의 둘째 누나인 이숙희 씨 역시 지난 23일 입장을 내놨었다. 이숙희 씨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이 회장이 한 '수준 이하의 자연인'이란 발언은 자신의 형과 누나를 상대로 한 말로는 막말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라며 이건희 회장을 향해 거칠게 비난했다.

이건희 회장은 24일 출근길에서 이숙희 씨 발언에 대한 생각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이숙희 씨가) 결혼 전에는 아주 애녀였다. 근데 금성으로 시집을 가더니 같은 전자 동업을 한다고 시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우리 집에 와서 떼를 쓰고 이런 보통 정신 가지고 떠드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이)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 하고 내친 자식이고, 숙희는 '이건 내 딸이 이럴 수 있느냐. 니가 그렇게 삼성전자가 견제가 된다면 삼성 주식은 한 장도 줄 수 없다'고 이십 몇 년 전에 이야기를 하셨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그걸로 끝난거다"라며 "(이맹희 씨는) 날 쳐다보지도, 바로 내 얼굴을 못 보던 양반이고 지금도 아마 그럴거다"라고 말했다.

- 이병철의 3남 5녀, 어떻게 살아왔나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고(故) 박두을 씨와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뒀다. '인희-맹희-창희-숙희-순희-덕희-건희-명희' 순이다. 이밖에도 일본인 부인들 사이에서 자녀들을 뒀다. 세상에 주로 알려진 것은 고(故) 박두을 씨와의 사이에서 둔 자녀들이다.

이맹희 씨는 둘째이자 장남이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일곱번째이자 삼남이다. 당초 이맹희 씨가 삼성 주요 계열사를 물려받기로 돼 있었고, 삼남인 이건희 회장은 동양방송(TBC) 등 미디어 계열사만 물려받기로 돼 있었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의 첫 직장이 동양방송이었다.

삼성그룹 후계자가 장남에서 삼남으로 바뀐 데는 사생활 문제 등 복잡한 사연이 있다. 결정적인 변수는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경제 범죄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을 계기로 이병철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또 차남인 고(故) 이창희 씨가 모든 법적 책임을 떠안고 감옥살이를 했다. 이맹희 씨와 이창희 씨는 사카린 밀수 현장을 지휘했었다. 이병철 회장이 칩거하고 이창희 씨가 구속되면서 이맹희 씨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 하지만 감옥에서 풀려난 이창희 씨가 청와대에 투서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의 조직적인 경제 범죄에 대한 내용이 담긴 투서였다. 여기엔 '외화 밀반출'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특히 엄중한 처벌이 따르는 범죄였다. 또 이병철 회장이 영원히 삼성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투서는 당시 육군 중령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병철 회장은 진노했고, 이창희 씨와 이맹희 씨에 대해 정을 떼게 됐다. 투서를 한 것은 이창희 씨지만, 이맹희 씨와도 관계가 있으리라는 게 이병철 회장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24일 이건희 회장의 발언을 보면, 이 회장 역시 같은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1971년 삼남인 이건희 현 회장에게 그룹을 맡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장남 맹희는 경영에 뜻이 없고 차남 창희는 많은 기업을 하기 싫어한다. 3남 건희는 처음에 사양하다가 맡아보겠다는 뜻을 가졌다.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다시 5년 뒤인 1976년,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에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 부부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삼성그룹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 이맹희 씨 부부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이병철 회장이 사망 뒤인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룹 경영권 경쟁에서 밀려난 이맹희 회장은 제일제당 경영에만 관여했고, 그조차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현재는 CJ그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창희 씨는 투서 사건 이후 오랫동안 미국에 체류하다 부친과 화해했다. 그는 새한미디어를 창업해 경영하다 1991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새한미디어 그룹이 부도를 맞아 공중분해 되면서, 이창희 씨의 자제들도 불운해졌다. 이창희 씨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고(故) 이재찬 씨는 지난 2010년 투신 자살했다. 이병철 회장의 손자이며 이건희 회장의 조카에 해당하는 그는 사망 직전까지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서 동정 여론이 일었다.

한편, 이병철 회장의 다섯 딸 가운데 기업 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장녀)과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막내)뿐이다. 나머지 세 딸은 출가 후 기업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이숙희 씨는 LG 구인회 회장 가문으로, 이덕희 씨는 경상남도의 한 대지주 가문으로 각각 출가했으며 이순희 씨는 대학교수와 결혼했다. 이 가운데 재산 상속 소송에 참여한 이숙희 씨의 경우, 결혼 당시에는 삼성 가문과 LG 가문이 사이가 좋았었다. 그러나 LG가 하고 있던 전자 산업에 삼성이 뒤늦게 뛰어들면서 삼성 가문과 LG 가문이 사이가 틀어졌다. 사돈 사이가 경쟁 관계가 되면서, 이숙희 씨는 상당한 마음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숙희 씨를 가리켜 "근데 금성으로 시집을 가더니 같은 전자 동업을 한다고 시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우리 집에 와서 떼를 쓰고 이런 보통 정신 가지고 떠드는 정도가 아니었다"라고 한 이건희 회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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