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삼성과 CJ그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실제로 이맹희 씨는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 부인인 손복남 고문과도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탓에 이번 소송은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라는 게 이들 그룹의 공식 입장이다. 정황을 봐도, 이런 입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번 소송에 관계한 이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번 소송이 차명으로 관리돼 왔던 삼성 계열사 주식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소송을 통해 차명주식 실태가 새로 드러나는 게 있다면, 이건희 회장에겐 타격이 된다. 또 삼성 그룹 지배구조의 투명성이 조금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맹희 씨가 소송을 건 의도와는 다른 결과일 게다.
사카린 밀수 사건과 이병철의 세 아들
▲ 이맹희 씨. |
1931년생인 이맹희 씨의 삶이 변곡점을 맞은 것은 1966년 9월이다. 혹독한 경영수업과 함께 삼성전자 부사장 등 그룹 내에서 온갖 요직을 겸직했던 그였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 밀수 사건(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잠시 경영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이맹희 씨가 그룹 경영을 지휘하게 됐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한국현대사뿐 아니라 삼성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이맹희 씨 역시 이 사건에 깊이 연루돼 있다. 이 씨는 지난 1993년 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당시 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맹희 씨는 삼성그룹 총수에 오르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71년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여기에도 '사카린 밀수 사건'이 관계가 있다. 이맹희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른바 '이창희 씨의 모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창희 씨는 이병철 회장의 차남이다.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고 감옥살이를 했던 이창희 씨가 이병철 회장 및 삼성의 조직적 비리에 대해 청와대에 투서를 했다는 것. 여기에는 이병철 회장이 영원히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또 외화 밀반출 등 당시엔 특히 심각하게 여겨지던 경제범죄 사실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런 투서 내용을 처음 접한 것은 당시 중령 계급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이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맹희 씨와도 젊은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이맹희 씨는 전 전 대통령이 자신으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면서도, 투서 사실을 자신에게 먼저 알리지 않은 데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반면, 이병철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정치군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점 역시 이맹희, 이창희 씨에게 불신을 품은 한 이유였다고 한다.
한편, 투서에 담긴 이창희 씨의 생각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것. 실제로 이창희 씨는 다른 자리에서도 "아버지 이병철이 삼성에서 손을 떼야 삼성이 산다"라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회장은 이창희 씨에 대해 정을 떼게 된다. 아울러 이맹희 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여기에 경영상 문제까지 겹치면서 이맹희 씨는 삼성을 떠나게 됐다.
이병철 "니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 니가 다 할 수 있나?"
당시 상황에 대한 이맹희 씨의 술회를 정리하면, 이렇다. 칩거 중이던 이병철 회장이 갑자기 당시 삼성 회장이던 이맹희 씨를 호출했다. "니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 니가 다 할 수 있나?" 이맹희 회장이 "다 잘할 수 없심더"라고 했더니, 이병철 회장은 "그라모 할 수 있는 것만 해라"고 말을 잘랐다.
며칠 뒤, 이병철 회장이 "내가 한번 보게, 직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종이에 써 와봐라"고 했다. 이맹희 회장은 삼성전자·중앙일보·삼성물산·제일제당·신세계·동방생명·안국화재·제일모직·성균관대·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전무·상무·이사 등 17개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병철 전 회장은 직책을 가리키며 "이건 하기 힘들제?" "이건 너 할 수 없제?"라며 이미 예정을 한 듯 연필로 직책에 줄을 죽죽 그었다. 대부분 그렇게 줄을 긋고 이맹희 회장에겐 삼성물산·삼성전자·제일제당 부사장 직책 3개만을 남겨두었다. 그 뒤 이병철 전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이맹희 씨는 눈에 띄게 반항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반면, 이병철 회장 회고록인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라고 설명했다.
삼성과 CJ의 오랜 갈등
어쨌건 이때부터 장남인 이맹희 씨와 차남인 이창희 씨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원래는 '미디어 경영'만 맡기로 돼 있었던 이건희 현 삼성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이창희 씨는 이후에도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갈등을 했지만, 결국 화해했다. 새한미디어를 세운 이창희 씨더러 이병철 회장은 "너 각 사장들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고, 이창희 씨는 삼성 계열사를 돌며 사장들에게 '무조건 잘못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삼성 비서실은 새한미디어를 챙겨주기 시작했고, 이병철 회장은 제일합섬 개인 지분을 이창희 씨에게 줬다. 그러나 이맹희 씨는 주로 사냥과 골프로 소일하며 아버지와 거리를 뒀다고 한다.
그러나 이맹희 씨는 삼성 경영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사망했을 당시, 영정을 들었던 것은 이맹희 씨의 장남인 이재현 CJ회장이었다. 이맹희 씨의 모친인 고(故) 박두을 씨도 사망 직전까지 이재현 회장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병철 회장이 경영권은 삼남에게 넘겼지만, 삼성가(家)의 '장손'이라는 상징성까지 넘긴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점은 삼성과 CJ 사이의 오랜 갈등의 한 변수다.
1993년엔 회고록으로, 2012년엔 '소송'으로 세간의 주목 끌어
이후, 이맹희 씨는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아버지와의 갈등,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공개된 것은 지난 1993년 이 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묻어둔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면서다. 이맹희 씨가 소송을 낸 직후, 이 씨의 삶을 다룬 보도가 잇따르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이들 책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책들은 현재 절판 됐으며 일부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다. 이 책들이 출간될 당시, 삼성그룹 측은 대단히 긴장했다고 한다. 이맹희 씨는 책 출간 이후 다시 은둔에 들어갔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알려졌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이재현 회장의 딸이자 직계손녀인 이경민 씨의 결혼식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처럼 세인의 기억에만 머물던 이맹희 씨가 갑자기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가 벌인 소송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을 갖는 이가 하나둘이 아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