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남한의 민주화 과정에서 구제도 개혁, 특히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국가정보원의 개혁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탈냉전과 이후의 남북관계 개선으로 국가보안법은 존폐위기를 맞았지만,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이에 더해 테러와의 전쟁과 한국군의 아프간 이라크 파병 이후 반테러 입법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9.11 직후인 2001년 12월 통합방위법 개정안을 국회가 가결한 이래 테러방지기본법, 테러자금조달금지법, G20정상회의 경호안전을 위한 특별법 제정, 통신비밀보호법 및 국정원법 개정 등 테러방지를 빙자한 각종 통제제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이들 일련의 반테러입법은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 지칭할만하다. 이와 더불어 축소되어오던 국정원의 역할도 다시 강화되고 확대되고 있어 인권침해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노력의 좌절
국가보안법은 국가 안보보다는 주로 정부 비판 세력을 탄압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다시피 했지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불가피하다는 명목으로 유지되어 왔었다. 그런데 1991년 남북간 불가침과 상호존중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2000년 남북 정상이 채택한 6.15선언과 2005년 '남북관계발전에관한법률' 제정을 거치면서 남과 북이 적대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인정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최소한의 존립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만을 지목하여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지 않을 경우,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오던 기밀유출행위나 내란음모행위 등은 일반 형법 규정을 적용하여 얼마든지 규제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관련 통계는 1961년 이후부터 확인된다. 이는 한국전쟁(1950-1953) 전후 이념대립이 가장 극심했을 때의 처벌 실태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제한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61년부터 2002년까지 최소한 1만3178명이 국가보안법(반공법 포함) 위반으로 기소,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중 90% 이상이 단순히 북한을 찬양하거나 고무했다는 자의적인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이 확정된 사람 204명, 집행된 사람은 182명이다. 마지막 사형은 1986년 5월 3명에게 이루어졌다. 한편, 국가보안법 사범 중 사상전향을 거부한 비전향장기수 94명의 평균 복역기간은 31년이다. 국보법 사건에 대한 구속적부심 청구는 1987년(7차 개정)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인권단체를 비롯한 30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구성하고 1999년,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단식투쟁과 서명운동을 포함한 대규모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2004년말에는 1000명의 인권활동가들이 20일~60일에 이르는 집단적인 단식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 8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9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약하였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논란 끝에 폐지가 무산되었다. 당시 의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속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 있었다. 이 법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는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에도 이 법의 폐지에 대한 입장이 확고하지 않았고, 폐지여론도 압도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의회 내에서 개·폐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나아가 이명박 정부 이후 국가보안법 적용사례가 더 늘어나고 있다. 2003년 이후 2010년까지 기소된 인원은 430명에 이른다. 국가보안법 입건자 수는 참여정부 때인 2005, 2006, 2007년 각각 33명, 35명, 39명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이후 2008년 40명에서 2009년 70명, 2010년 151명으로 크게 늘었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당시 자신의 견해를 인터넷에 올린 네티즌 45명 역시 국가보안법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국정원법 개악 시도
국가정보원은 1961년 군부쿠데타 이후 미국의 CIA를 모방한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다. 중앙정보부(1981년 국가안전기획부, 1998년 국가정보원으로 명칭 변경)는 대북 정보수집,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 외에도 정부부서 보안점검, 국내정치 관련 정보 수집 등의 광범위한 비밀권한에 힘입어 정권안보도구로 악용되어왔다.
이에 민주화 직후인 1994년 국가안전기획부 법 개정을 통해 정치관여를 엄격히 금지했고, 그 직무를 "국외정보 및 대공·방첩·대테러 등 국내 보안정보 수집, 국가기밀에 대한 보안업무, 내란 및 국가보안법 등 사범 수사, 국정원 직무 관련 범죄에 대한 수사"등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불법도청 테이프 공개사건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간인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 구 안기부와 국정원이 직무범위 이외의 사안에 대한 불법도청을 자행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명박 정부 이후 국정원의 국내정치개입과 같은 직권남용은 더욱 심해졌다. 국정원의 대통령을 위한 정례 정보 보고 부활(이 관행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제한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당시 폐지되었었다), 정부의 토목사업(한반도 대운하 사업) 반대 교수모임에 대한 불법 사찰, 대통령이 연루된 부패혐의 사건(BBK 사건) 관련 민사소송 개입, 국정원 고위인사의 언론·종교 대책회의 참여, 시민사회단체를 후원한 기업에게 후원내역 자료 요구 등 법이 정한 직무범위에서 명백히 일탈한 정치적 개입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에 더해 여당은 2008년 국정원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국정원 직무범위를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에 관한 업무' 등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개념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 테러방지기본법 제정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등이 더해지면 국정원은 국내외 대부분의 정보수집 권한과 합법적인 패킷감청 권한을 보유하고, 치안 및 군사행동 집행기능까지 포괄한 거대한 비밀권부로 부활할 수 있다.
패킷감청의 남용과 통신비밀보호법 개악 시도
2009년 8월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수사에서 약 10년 이상 패킷감청수단을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패킷감청'이란 인터넷 전용회선 전체에 대한 실시간 감청을 의미하며, 감청 대상이나 내용을 특정하여 감청할 수 없다는 점에서 범죄수사를 위한 증거수집이 아니라 사찰과 감시를 위한 광범위한 정보수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패킷감청이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법원의 허가서를 받아 이루어졌으므로 위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패킷감청에 대한 법원의 허가는 사실상 '포괄 백지 허가서'를 발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인권단체들은 비판하고 있다.
한편, 여당인 한나라당은 전기통신사업자 등에게 감청장비를 구비 및 탑재를 의무화하고, 개인휴대 단말기(휴대폰)의 위치정보를 '통신사실확인자료'로 분류해 반경 5m까지 추적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화기록이나 위치정보 같은 '통신사실확인자료' 일체를 보관하여 수사정보기관에 협조하도록 했다.
야당 및 시민사회단체는 당시 '감청의 일상화'라며 반대하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이 독소조항의 삭제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했다. 해당 법안은 통신비밀보호제도를 한층 강화하고자 하는 다른 개혁적인 야당 개정안들과 더불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한국의 표현의 자유 지수는 2005년 31위에서 2009년 69위로 급락했다. 이 단체는 또 한국을 2009년 이후 3년간 줄곧 인터넷 감시국(Under Surveillance)으로 지목했다. 2011년 3월 참여연대 민변 등은 패킷감청의 위헌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이를 금지하는 입법운동도 추진하고 있다.
집요한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
9.11직후인 2001년 12월 통합방위법(1997년 제정)이 대폭 개정되었다. 통합방위란 '적의 침투·도발이나 그 위협에 대하여 각종 국가방위요소를 통합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통합방위사태가 선포되면 국무총리가 총괄하는 중앙통합방위협의회가 각 지역 행정조직과 경찰조직, 군과 예비군, 그리고 국정원 등 정보기구를 통합적으로 운용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통합방위사태를 선포하고 통제구역을 설정할 수 있다.
통합방위법의 제정과 개정에도 불구하고 2001년 11월 국가정보원은 테러방지법 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 테러방지법안은 9·11 테러 직후의 막연한 공포심을 이용하는 한편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성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테러방지법은 테러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테러방지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며 국정원의 권한이 비대화되고 테러행위 발생 시 군이 치안에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등 반민주적이고 위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테러방지법의 핵심은 '국정원 산하에 대테러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정원장은 법원의 허가 없이 대통령의 지시만으로 도청 및 감청을 할 수 있고, 테러단체 구성원으로 의심되는 외국인에 대해 법무부 장관에게 출입국 규제를 요청할 수 있으며, 국가중요시설을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어려운 때에는 대통령에게 군병력 지원을 건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테러방지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테러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모호하고 포괄적인 규정을 사용함으로써 법안의 각 조항들이 헌법과 국제인권법의 기준에 어긋나며 인권침해 소지가 매우 크다. △현행 법·제도, 국가기관의 체계로 테러범죄에 대한 예방, 처벌, 방지가 가능하다. △별도의 테러대책기구를 만든다는 것은 민주적인 국가 운영 원리에도 어긋나며 특히 국정원의 고유기능인 정보수집 이외의 수사권한, 군동원요청 권한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은 테러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정원이 법무부에 입국불허를 요청하도록 한 것에 대해 한국의 테러방지법이 난민 및 외국인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와 국회의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는 이 법안을 제2의 국가보안법으로 간주한 시민사회의 저항과 국가인권위원회의 반대의견 등으로 국회심사가 중단되었고, 그 후 여러차례의 수정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2011.5)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103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테러방지법제정반대 공동행동은 2001년 결성된 이래 본격화된 테러방지제도 도입을 저지하고,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미국식 '테러자금 조달 금지법' 제정
2001년 한국은 이미 일정 금액 이상의 원화와 외화의 거래를 추적하고 범죄수익과 관련된 금융거래나 돈세탁행위에 대해 처벌하고 그 이익을 몰수, 추징할 수 있는 주요 법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실 이 제도들은 부패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부유층의 재산해외도피, 뇌물수수, 불법정치자금 제공 등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참여연대가 제안하여 도입된 제도였다. 한국의 돈세탁방지제도는 세계 어느나라 못지않게 강력하고 선진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정부는 2004년 '테러자금조달의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에 대한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승인받은데 이어, 이 협약의 이행법안이라면서 '테러자금조달의 금지를 위한 법률 제정안'을 2007년 초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은 사실 미국이 이라크·이란을 제재할 때, 그리고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을 동결하도록 중국정부를 압박할 때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법제를 한국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 미국발 제도의 내용은 국제협약의 권고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소조항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법률안의 골자는 △재경부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장이 "테러혐의금융거래자라고 지목하면 이를 토대로 재정경제부장관은 이들의 자금의 동결을 지시"할 수 있고,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테러관련자를 지정하여 고시할 경우 별도의 사법적 절차 없이도 이들의 금융거래가 허가제로 전환(불허)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에 대해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테러'라는 개념이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이유로 테러방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테러자금'에 관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테러를 위한 자금이라는 표현도 모호한데 테러'관련'자금을 규정하는 것은 더더욱 모호하다고 반박했다.
이 법안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단지 우방국의 요청만으로도 개인이나 단체를 테러관련자로 지정하여 금융거래를 동결하도록 한 조항, 그리고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법원의 결정이나 영장없이 임의로 개인과 단체의 금융거래를 제한하거나 금융자산을 동결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을 악용할 경우, 레바논 난민촌이나 팔레스타인에 구호물자를 보내는 인도지원단체들의 자금이 자의적으로 동결될 수도 있다. 레바논 자치단체의 책임자가 헤즈볼라 구성원이라는 이유를 적용하면 꼼짝없이 자금이 동결되고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렵게 되는 것이다.
시민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일치된 의견은 인권침해가능성이 높은 새 법률안을 도입할 필요가 없고, 이미 한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돈세탁방지/처벌 제도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다만, 정부의 원안은 폐기되고 '테러자금조달금지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공중 등 협박목적을 위한 자금조달행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다소 복잡한 이름으로 법률명칭이 수정되었다. 이 법의 남용을 막기 위해 '테러행위' 혹은 '테러관련자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대신 국제법으로 금지된 특정한 범죄 행위들, 예를 들어 비행기납치, 민간상선 피랍 등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그 위반자의 금융거래를 제재하기로 했다.
또한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자금을 동결하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사법적 통제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우방국(미국)의 요청만 있으면, 유엔이나 국제협약에서 제재하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의 금융거래라 할지라도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독소조항은 원안대로 유지되었다. 이미 동일한 조항이 외국환 관리법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란 제재 논란
실제로 외국환 관리법은 우방국(미국)의 요청만으로도 특정인의 외환거래를 금지할 수 있다. "한국이 체결한 조약 및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의 성실한 이행을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뿐만 아니라 "국제평화 및 안전유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특히 기여할 필요가 있는 경우" 한국 정부가 특정한 외국환 거래를 허가제로 전환(사실상 불허)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란제재에 외국환 관리법을 작용한 경우다. 2010년 9월 이명박 정부는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제재요청을 받아들여 102개 단체 및 개인 24명을 금융제재 대상자로 지정하였다. 여기에는 이란 국영은행 멜라트 은행도 포함되어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29호는 이란의 40개 단체 및 개인 1명만을 제재대상으로 지정하였고, "이 결의안의 어떠한 조항도 국가들이 이 결의안 범주를 넘어선 조치나 행동을 취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이란제재는 미국 국내법에 따른 것으로서 유엔안보리 결의에는 위배되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참여연대는 한국정부의 이란제재가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는 의견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슬람계 이주노동자와 '반한외국인'에 대한 사찰과 차별
테러와의 전쟁은 이주노동자들, 특히 이슬람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강화시키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라크 추가 파병 전후인 2004년 법무부는 '대테러종합대책'에 따라 이란, 이라크 등 8개 테러지원국가 국민이 입국할 경우 경찰 등에 이들의 체류지, 기간 등을 통보하고 경찰은 국내에 체류하는 이슬람권 출신자의 동향파악 활동을 하도록 했다. 당시 국내 거부 이슬람국가 출신자는 29개국 6만7068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 가운데 미 국무부가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수단 등 5개국 출신이 1755명, 알 카에다 등 테러 단체를 실질적으로 지원해 왔다는 의혹을 받아온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출신이 7177명이 집중 사찰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법무부는 '불법체류자의 반한활동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하여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시위를 선동하거나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하는 자 △정치적 주장을 하면서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오도하며 이를 선전하거나 주동하는 자 △기타 국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활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등을 반한활동 인사로 규정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형법, 출입국관리법, 집시법 등을 적용해 형사처벌한 뒤 강제퇴거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이해 10월 말, 법무부는반한 활동 관련자 등 단속실적을 국회에 제출, 집회 등 가담 불법체류자 14명은 강제퇴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2010년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와 국회는 한시법인 'G20정상회의경호안전을위한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테러방지를 명분으로 G20기간 전후 집회와 시위를 포괄적이고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찰청은 중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권 57개국에서 입국한 5만여명의 국내 체류상황을 조사해 체류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주거지를 수시로 옮기는 등 의심스러운 외국인 99명을 골라 관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경찰은 2∼3주에 한 차례씩 이들의 거주지와 직장을 확인하고, 이들이 체류 목적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지도 감시했다. 경찰과 검찰은 2010년 2월 대구 이슬람 사원 주변에서 근무하는 이맘과 이주노동자 등 2명의 파키스탄인이 탈레반 구성원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재판과정에서 관련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경찰청은 또한 "법무부와 국가정보원 등도 테러 용의자 명단을 확보해 입국금지 대상에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 입국이 금지된 테러 혐의 외국인은 5천여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 명단에 의거하여 시민사회단체의 G20 관련 학술회의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파키스탄 여성단체 대표 칼리크 부슈라(Khaliq Bushra), 네팔노총 사무총장 우메쉬 우파댜에(Umesh Upadhyaya), 국제농민단체 비아캄페시나 대표인 헨리 사라기(인도네시아) 등 6명의 비자가 거부되었고, 필리핀 소재 IBON International의 폴 퀸토스 부장을 비롯한 8명의 필리핀 활동가가 입국비자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무더기로 공항에서 출국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각종 국제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하던 인사들이었다.
▲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를 대비해 인천공항에서 폭발물 처리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특공대원들. ⓒ연합뉴스 |
테러와의 전쟁과 87년 체제와의 불화
미국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은 1990년대 태동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본격화한 남한 내의 시민 주도 민주주의와 갈등을 빚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시민의 능동적 지원 속에 집권한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패권적 정책에 맞서 갈등을 빚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행정부의 대다수 관료들과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적인 정치인들에게는 특히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관료들은 대테러전쟁의 논리를 손쉽게 내면화했고, 안보 관료와 군, 그리고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기득권 강화에 적절히 활용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기간 동안은 테러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권이 완만하게 확대되어왔다.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의 폐지는 유보되었다.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파병을 계기로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나 사찰행위를 강화했고,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군과 정보기관이 치안문제에 간여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은 보다 악화되었다. 특히 공안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약화되고 이들의 권력남용이 두드러졌다. 국가보안법 적용사례가 늘어나고 국가정보원과 군정보기구의 정보통제와 사찰이 강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G20 개최를 계기로 테러예방을 이유로 집회나 시위를 자의적으로 금지하는 한시법을 발의하여 여당 주도의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해외 인권 개발 활동가들의 입국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가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나 테러에 대한 공포를 과장하여 공동체 내부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요구를 억압하거나 부당하게 통제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안보는 공동체 구성원의 안전이라는 본래적 목적에 맞게 재정의되어야 하며, 안보를 다루는 국가기구들은 민주화되어 보다 투명하고 책임 있게 운영되어야 한다.
* 이 글은 5.18 광주 아시아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발표된 한국 사례를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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