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에게 있어 9.11 사태는 패권국가인 미국이 정한 국제질서에 순응해야하는 약소국의 설움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은 아시아 국가들이 그 동안 반민주적이고 불법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법적·군사적 탄압을 정당화해주는 도구가 됐기 때문이다. 9.11 사태 이후 10년은 미국식 패권주의의 실패를 상징할 뿐 아니라 아시아의 민주주의 발전이 역행하는 기간이 됐다. 대표적인 5개국의 실태를 파헤쳐 본다.
■ 파키스탄, 법적 절차 없이 미국에 테러 용의자 인도
대표적으로 파키스탄은 9.11 사태 이전부터 테러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채택한 나라다. 영국 식민지 시절(1859-1947)부터 '롤라트(Rowlatt) 법안'이나 '펀자브 살해 및 잔혹행위처벌법'(Punjab Murderous Outrages Act)을 통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테러범으로 고발당한 이들을 처벌해왔다.
해방된 이후에도 파키스탄 정부는 1952년 파키스탄 보안법(Security of Pakistan Act), 1960년 공공질서유지조례(Maintenance of Public Order Ordinance)를 만들어 테러 활동을 벌이거나 도움을 줬다는 의심만 있으면 용의자들을 구금해 왔다. 1997년에는 반테러법((Anti-Terrorism Act : ATA)을 제정해 테러에 가담한 이들이 무죄를 증명할 때까지 유죄로 가정하고, 용의자의 자백이 재판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더라도 증거로 인정할 수 있게 해 인권 활동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파키스탄은 한편으로 인권에 관한 국제규범을 꾸준히 수용하기도 했지만 자국 내에서 인권에 반하는 사건들은 9.11 사태 이후 더 잦아졌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후 반테러법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9.11 사태 이후 수년간 파키스탄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지목당한 수천 명이 정부에 의해 실종되거나 체포·억류됐다. 적법한 절차 없이 미국에 인도된 테러 용의자들도 자국인을 포함해 약 370명에 달한다.
테러용의자들은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체포·구금되었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으며, 혐의가 입증되지 못해 풀려난 이후에도 함구할 것을 강요받았다. 당국이 죄를 입증할 때까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무작정 구금당한 이들도 2500여 명에 이르렀다. 파키스탄 군부는 심지어 법정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고 풀려난 이들을 테러 혐의로 다시 체포해 법원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시민단체들은 정부에 의해 실종당한 이들을 조사해 주제하라고 정부에 요구해왔다. 지난해 설립된 실종자 조사위원회는 정보당국에 의해 실종된 것으로 확인된 이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위원회는 또 장기간 구금됐다가 풀려난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아직까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 스리랑카, 민족자결권 투쟁을 '토착 테러리즘'으로 규정
스리랑카는 인구의 74%를 차지하는 불교계 싱할리족과 힌두교계 소수민족인 타밀족 간의 오랜 분쟁을 겪어왔다.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진압함으로써 내전은 종료됐지만 국가 전체에 선포한 비상사태는 해제하지 않아 국제법 위반이라는 문제 제기가 잇따랐다. 대테러 관련법 역시 일부만 수정된 채 효력이 지속되고 있다.
스리랑카의 대테러 법률은 1971년 좌익 통일전선(United Front) 시절 싱할라족 청년들의 무장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이 법의 독소조항은 1979년 우익 통일국민당(United National Party) 정권이 타밀족 청년의 무장 투쟁을 근절하기 위해 제정한 테러방지[임시조치]법에 포함됐다. 스리랑카 정부는 그 이전에도 노동자 파업을 억누르기 위해 비상사태 선포 권한을 갖춘 공공안보법(Public Security Ordinance)을 운영하고 있었다. 노동계의 불만과 소수민족 갈등 등으로 비상사태 체제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스리랑카의 자유민주주의, 인권은 크게 후퇴했다.
9.11 사태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 했다. 국제사회의 정치적, 군사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스리랑카 정부도 대테러법처럼 국제 규범에 어긋나는 법률과 정책, 관행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특히 소수 민족의 민족자결권 투쟁을 토착 테러리즘 문제로 규정했다. 타밀 분리주의 반군인 '타밀 일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를 고립시키기 위한 정부의 공세를 '대테러 작전'으로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스리랑카의 테러방지법은 테러 행위나 불법 행위를 규제하는 법이지만 테러리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진 않는다.(테러리즘을 정의한 법안은 2006년 말 처음으로 나왔다) 때문에 보통 형사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죄목도 테러방지법에 의해 과중 징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법에 저촉된 이들은 영장 없이 체포당했고 범죄 행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이들에 대해 '예방 목적'으로 18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악용된 대테러법의 대상은 주로 타밀족에 집중되었다. 2009년 내전이 끝날 당시 구금된 타밀족은 1만2000명에 이르렀다. 또 스리랑카 정부는 '고도보안구역'을 설정해 주민들의 거주권과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한편, 타밀 반군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지역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를 취했다. 내전이 끝난 직후 30만 명의 타밀족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밀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스리랑카의 대테러법은 행정부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사법부와 입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대테러 정책을 펼친 결과 내전 기간 동안 타밀족의 자치운동 역량은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내전 이후에도 국가 및 사회의 군사화와 군부의 민간 정부 감독·이권 개입을 불렀다.
■ 방글라데시, 대테러법으로 탄압과 고문 저질러
9.11 사태 이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제사회에 지지를 요구했다. 이는 이슬람교도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방글라데시도 그 중 하나였다.
개발도상국인 방글라데시는 국제적 사안보다 국내 경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나라였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스리랑카처럼 사회·경제적 문제를 테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행렬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2002년 제정한 신속심리법정법(Speedy Trial Tribunal Act)은 일부 중대 범죄에 대해 빠른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2008년 3월에는 과도내각에 의해 대테러법령(Anti-Terrorism Ordinance)이 공포됐고 이듬해 2월 대테러법(Anti-Terrorism Act, ATA)이 제정됐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 어떤 공개 논의도 없었고 법에 명시된 '테러 행위'의 정의는 모호해 반정부 운동가, 교사, 언론인, 인권 활동가를 탄압하는데 악용됐다.
방글라데시에서 테러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 중 일부는 변호사 접견이나 가족 면회가 허락되지 않은 채 취조를 당했다. 이들이 법원에서 판결을 받을 때까지의 구치 기간은 평균 4년에서 7년이 걸렸으며, 법정에서 받은 형기보다 재판을 기다리면서 수감된 기간이 더 긴 경우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무장세력 및 테러리스트와 싸우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한 남아시아 대테러특별위원회(South Asian Anti-terrorism Taskforce, SAAT)와 법 집행기관들은 고문을 자행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2002년 군인들을 동원해 치안 캠페인을 벌이는 과정에서 48명이 구속돼 고문으로 사망했다. 2004년 특수 법집행기관으로 창설된 신속대응부대(Rapid Action Battalion, RAB) 역시 범죄 소탕과정에서 고문 논란을 불렀다.
방글라데시의 시민단체들에 따르면 2010년 한 해만 해도 정부기관에 의해 고문된 이가 67명에 이르며 이중 22명이 고문을 받다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들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국제정세를 의식해 사회적 불만을 군사적 방법으로 억누른다고 정치적 불만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며 국제 세력과 거리를 둘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참석자들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사법부 개입에 항의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테러 왕국' 인도네시아, 형법 무시한 대테러법 남용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3000만 명 중 85%가 이슬람교도인 국가다. 인도네시아는 1981년부터 과격 이슬람주의자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으며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의 몰락 이후 더 극심해졌다. 2001년에만 81건의 폭탄공격이 일어났고, 2002년에는 발리 폭탄테러로 2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해마다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9.11 사태 이전에 인도네시아에는 테러에 대한 규제가 없었지만 2002년 발리 폭탄테러 이후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정부규칙'이 제정·공표됐고 나중에 법으로 확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테러리스트 및 테러행위는 형사사법제도상 특수한 경우로 취급해 군과 정보기관의 개입을 허용했다. 이해 발표된 대통령 지시는 비사법기관인 국가정보기관(National Intelligence Body:BIN)에 체포와 구금 권한을 포함한 정보수집활동 권한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은 형법상으로 보장된 진정이나 사전심리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체포되었다. 테러 용의자로 지목돼 붙잡히거나 살해된 이들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법은 테러 조사관이나 검사, 변호사, 판사에 대한 위협을 하는 자를 기소할 수 있다고 명시해 언론 등을 통한 의견 개진을 제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테러작전을 수행하는 인도네시아 특수부대는 작전 과정에서 과도한 무력을 사용해 많은 희생을 불렀다. 2006~2007년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포소 지역에서는 테러 용의자를 추적하던 특수부대에 의해 미성년자 3명을 포함한 15명이 사망했고, 2010년에는 아체주(州) 잘린 산악지역에서 포위공격으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이 일로 징계를 받은 이는 드물었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는 대테러 작전을 국가 기밀로 은폐하기 위한 '국가기밀법'을 추진해 시민사회의 반발을 사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또 정부가 대테러 정책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테러리스트 지원 단체로 매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아프가니스탄, 증상과 진단을 혼동
'테러와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아프가니스탄은 최근까지도 탈레반의 테러에 몸살을 앓고 있다. 폭탄과 자살 골격, 인신납치 등이 빈번히 벌어지지만 아프간 정부는 국제사회나 주변국의 많은 간섭에 시달리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시민사회 또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회적 보호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가 대테러법을 명분으로 위법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면, 아프간은 반대로 국내의 정치·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 정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아프간에는 최소한의 군대만 배치해 국가 재건 및 테러리즘의 '연료'인 마약 퇴치 노력을 약화시켰다.
아프간 정부는 마약 문제가 아프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프간 내 시민사회는 증상과 진단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마약 확산을 통제하기에 앞서 국가 재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약 가공과 불법 거래를 금지하고 불법 거래자를 기소, 고발할 수 있는 사법부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등 아프간 스스로 군대와 경찰을 통해 국가 역량 강화에 집중하라는 게 시민사회의 요구다.
* 이 글은 5.18 광주 아시아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발표된 각국 사례를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
* 아시아의 '관타나모'<상> '테러와의 전쟁', 독재자들에게 지급된 '백지수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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