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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삼국지>에도 '19금' 딱지 붙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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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삼국지>에도 '19금' 딱지 붙일 건가?"

[우석훈 칼럼] "이 칼럼은 19금, 청소년 출입금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이 최소한 문화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통제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종종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경우만 가지고 얘기를 해보자.

졸저 <88만원 세대>의 첫 장은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고백하자면, 이 장에 내가 얘기한 사건은 몇 개의 사건을 겹쳐놓은 것인데, 원 얘기는 모두 실화이다. 아이를 가지게 된 중2 여학생에게 낙태를 권할 것이냐 말 거냐, 이런 대안 교육 쪽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뜨겁게 달구었던 질문들을 비롯해서, 실제 목격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그 절을 구성했다.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첫 결혼 및 출산이 30살을 넘어가는 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초경의 나이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내려왔다. 10대 미혼모 문제가, 점점 더 하부 연령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그 절의 첫 모티브가 된 사건은 어느 14세, 중2 학생의 임신 사건이었다. 실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의 소위 '타겟 독자'를 중3 여학생에게 맞추었고, 그들과 같이 만들어 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얘기로 한국 청춘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 그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7권을 출간할 때, 나는 이 사회가 그 사이에 엄청 바뀌어져 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 7권의 원 제목은 '섹스와 돈의 학문'이었다. 섹스는 곧 생식과 재생산 즉 생태학을 은유하고, 돈은 경제학을 은유했다. 일종의 생태경제학에 대한 파자인 셈인데, 나는 이 제목이 썩 마음에 들었었다. 출판사에서 나에게 권유한 건 아니고, 이미 그 3년 동안에 출판 환경이 변해서 결국 나는 그 제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어진 법률을 지키면서 순순히 제목을 찾다보니 <디버블링>이라는 아주 밋밋한 제목이 되어버렸다. 섹스가 들어간 책의 제목은, 일단 검색엔진에서 19금으로 분류가 되고, 고등학생들은 검색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첫 섹스의 경제학'으로 검색을 해보니, 대부분 내 책 내용이 나오는데, 정작 내가 이 얘기를 같이 하고자 했던 중3 여학생들은 그 내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88만원 세대'는, 19금 경제학이 되어버렸다.
▲ <88만원 세대>의 첫 장 제목인 '첫 섹스의 경제학'을 네이버 검색창에 입력하면, 성인인증을 받으라는 안내문이 뜬다.

자, 그건 그렇다 치자.

19세 미만에 대해서 통제를 해도 좋다는 식으로 현 정부는 청소년보호위원회 등을 통하여 극단적 통제 사회로 길을 잡았다. 누구도 법률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그런 권한을 준 적은 없지만, 이미 정부는 그렇게 갔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 몇 가지만 짚어 일단 짚어보자.

첫 번째.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 우리의 헌법은 방송 등에 대한 사전검열을 금지하고 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 등을 명확한 헌법 정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수 정태춘의 위헌 소송 이후로, 표현의 자유는 헌법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이걸 교묘하게,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으로 다시 부활시켜서 절대 권위를 쓰는 이상한 위원회들이 생겨났다. 자, 고전적인 질문인데,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 지금 우리의 감시자들은 헌법도 무시하고, 법률도 무시하고, "이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할 뿐이야"라는 말로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한다. 그 중의 일부는 종교적 신념으로, 그들의 일부는 정치적 신념으로, 사전 검열의 칼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좋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감시할 것인가? 그들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야말로 아무 기준 없이, 일부 위원회 위원들은 무법적,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두 번째, '19금'을 기준으로 예술과 문화가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의 예술은 국가가 먹여살려 주는 클래식과 국악 등 부르조아 예술이 아니라면, 시장을 통해서 자신의 창작물을 팔고 그렇게 생계를 꾸려가는 중이다. 그렇다고 19금 예술과 문화에 대한 번외 시장이 한국이 유럽처럼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등급 외 판정'은 현실적으로 상영불가를 의미한다. 19세 이상의 성인라도, 등급외 판정 예술을 접할 길은 사실상 없다. 음악이나 영화 등, 19금은 혹독한 시장에 대한 통제인 셈이다. 즉 국가의 권한을 빌려서, 시장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그래서 헌법 위에 시장이 있다는 요상한 상황을 만드는 중이다. 그래서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통용될 수 없다는 하는 결정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창작자나 기획자에게는, 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하는 무시무시한 결정이 된다. 헌법이 당신들 밥 먹여주는 게 아니쟎아, 그 빈틈에 엄청난 완장질이 생겨나게 된다.

세 번째, 저들이 국민경제를 좀 먹고 있다는 사실. 리처드 플로리다의 <도시와 창조 계급>은, 문제적 저서이다. 그 책의 테제가 맞든 틀리든,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창의성, 창조성, 심지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서울시의 정책 기조로 내걸었던 '창의 시정'까지, 기본적으로는 이 책에 나온 테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지배층이 최고의 모델로 삼았던 실리콘 밸리가 어떻게 성공했는가를 분석한 게 플로리다의 테제인데, 상징적으로 얘기하면 '게이 지수'에 대부분의 얘기가 담겨 있다, 게이가 많이 사는 도시일수록 창의적인 도시이다, 유시민이 대구에 출마하면서 대구를 창의적으로 만들자고 얘기할 때에도 이런 플로리다의 테제가 이론적 전제가 된다.

물론 게이들이 일반인에 비하여 더 능력이 있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고, 게이들이 지내기에 편안한 도시가 엔지니어나 과학자, 즉 창의적 인간들이 살기에도 역시 편하다는 말이다. 과학자들은 게이 이상으로 괴팍하고 자기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보수적인 도시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루이 뷔똥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대표적인 게이이고, 좌파 출신이며 또한 대표적인 게이 해방론자이다. 뉴욕의 대중 집회에도 맨 앞 줄에 나온다. 그런 게이들이 지내기에 가장 편한 도시 중의 하나가 뉴욕이다. 서울을 디자인 도시로 변해가는 흐름과, 청소년에게 섹스 및 술에 대한 담론이 완전 금지된 통제의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한나라당의 문화 성향이 공존할 수는 없다. 질서 정연하게 창의적 경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 19금 딱지를 붙이는 것을 즐겨하는 저들이, 최소한 경제의 시각에서 보면 2010년대에는 반(反)경제적이다. 우리는 지금 군인들이 하면 딱 좋을 법한 포디즘 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나버렸다. 그리고 그 시절에도 군인들은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셔버리자' 정도의 가사는 허용했다. 군사정권보다 더 혹독한 검열을 지금 이들이 휘두르는 것 아닌가?

내가 쓴 이 칼럼은, 이미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기준으로는 섹스와 게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니까, 이미 19금의 칼럼일 것이다. 원한다면, 술과 담배에 대한 은유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지만, 섹스의 '오남용'이 해로운 것처럼, 이 정도에서 절제하려고 한다.

형법 공부할 때 가장 재미있던 얘기가 대부분의 범죄는 금전 사건 아니면 치정 사건이라는 얘기였다. 돈 아니면 섹스, 이걸로 굉장히 많은 게 설명된다. 우리의 중등교육 즉 중고등학생들이 보고 들은 대부분의 문학작품 역시 돈 아니면 섹스를 모티브로 한다. 세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예술 작품이 그렇지 않은가? '베니스의 상인'처럼 돈만을 모티브로 하거나 '햄릿'처럼 어머니의 근친상간적 섹스를 모티브로 한다. 대부분의 고전에서 모티브는 그렇게 해놓고, 작가들은 그 위에 시대 정신을 얹는다. 그래서 그런 게 고전이다. 모티브를 통제하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고전은, 박정희 시대에 날조된 섹스 없는 장군의 얘기, 이순신 얘기 정도만 남을 것이다. 어머니가 알을 낳은 남도의 건국 신화, 이건 수간 얘기 아니냐? 조선 시대까지도, 이런 모티브들을 허용했다.

자, 생각해보자. '데카메론'을 비롯해, 우리가 중고등학생들에게 권해주는 문학 작품 중, 섹스가 빠진 작품을 추려보면 얼마나 될까? 진짜 소년들의 얘기인 '15소년 표류기' 정도 남지 않을까? 동화들도 대부분 섹스의 은유를 담고 있다. 근대화 시대 중국 농민의 삶을 굳건하게 그린 펄벅의 '대지'는 중학교 1학년이면 꼭 읽으라고 권해주는 대표적인 양서 소설이다.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섹스가 난무하고, 매음굴도 툭하면 나오고, 심지어 아편굴도 중요한 모티브로 나온다. 그러나 섹스하고, 아편 피우라는 주제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의 청소년보호위원회 식으로 얘기하면, 창녀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물론이고, 술을 마시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오는 성경 마저도 19금이다. 그뿐이랴? 16세 소녀의 시껍한 체위 표현이 나오는 '춘향전'을 당근 19금이 되고, '구운몽'같은 얘기들은 고전 축에도 끼면 안 된다.

2011년, 청소년을 보호한다, 이 명제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틀렸다. 이미 13세면 충분히 섹스가 가능하고, 초경을 지나 임신이 가능한 상태인데, 그걸 금지와 통제로, 무슨 수로 보호한다는 것인가?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문학작품 등 예술이 전부 섹스, 술, 담배, 여기에 염세적 세계관, 그리하여 자살을 미화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인류의 통합적인 결과물로부터 무슨 수로 보호한다는 것인가? 출간하여 자리 잡힌 이후로 단 한 번도 전세계적으로 청소년 양서에서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트의 슬픔'에 19금 딱지를 붙이겠다는 사람들을 제 정신으로 볼 수 있는가? 도대체 누가 어떤 권위로 괴테의 작품에 금지라는 딱지를 메길 수 있겠는가?

온 인류가 만든 이 문화와 예술의 결과물, 그리고 전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부여한 여성가족부의 권위, 그리고 그들이 위촉한 위원의 권리로 그걸 금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생각 자체가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저들은 초헌법적이며, 초법률적인 문화에 대한 딱지 매기기를 하는 중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재수없게 2007년부터 2012년 사이에 예술 활동을 해야 했던 한국 예술가들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는 것이다. 실효가 없지는 않지만, 그 실효는 우리 시대 예술의 손실로 나타나게 된다.

자, 이렇게 주장하는 나의 글은 저들의 기준이라면 19금 표현물일 것이다. 나는 13~18세, 중등교육 과정의 소녀의 섹스와 임신에 관해서, 상당히 심각하게 경제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했다. 이 칼럼이 19금이라고 판정을 내린다면 난 그것을 받아들이겠고, 그 기준이 경제학에 대해서라면 수긍할 수 있어도,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용된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예술과 표현의 자유, 그런 이유가 아니라, 문화경제와 창의성으로 가야 하는 우리의 경제 미래를 바로 저들이 갉아먹는 거이라서, 국민경제라는 이름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럼 10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화들을 그냥 방치할 것인가? 물론 나도 반대한다. 그러나 그 보완책은 최소한이며 합리적이 되어야지, 지금처럼 몇 명의 위원들이 임의적으로 완장질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수많은 섹스 장면이 나온다. 그걸 읽지 못하게 되는 청소년 시대, 그게 청소년을 보호하는 길인가? 그들을 바보로 만들자고 작정한 사람들이나 이런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저들의 기준대로 공평하게 적용되면, <토지>는 물론이고 <삼국지>, <초한지>, 전부 19금이다. 역사를 현실대로 기술한 모든 책들, 전부 청소년 금지물이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원본 그대로 읽으면, 수 없는 소녀 섹스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걸 해석한 미술작품이 등장한다. 그걸 무슨 수로 막고, 무슨 수로 통제할 것인가?

군사정권 시대에 앨범마다 하나씩 건전가요를 끼워 넣도록 했다. 그 정도는 참아낸다 쳐도, 앨범 한 장을 건전가요로 채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청소년보호위원호가 하는 완장질은, 이런 얘기이다. 이건 군사정권 시대를 뛰어넘는다. '뽀뽀뽀'류의 노래만 남겨놓겠다는 것 아닌가?

아무리 한나라당 시대라고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 누군가를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다는 그 사고, 2010년대의 시대에 도저히 맞지 않는다. 자신들은 룸살롱에서 놀면서, 청소년은 "주님, 살펴주소서"라고 외치라고만 하는 이 이상한 근엄주의, 한도를 이미 넘은 것 아닌가? 세익스피어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무슨 심의를 하고 검열을 한다는 거냐? 그런 기준이면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황순원도 못 넘어간다. 20세기 최고의 명랑주의자라는 김유정 작품들도 심의통과 불가이다. 조선총독부도 이 정도로 혹독하게 문화통제를 하지는 않았다. 헌법 위에 심의, 이건 말 안 된다. 예술과 문화는 종종 헌법도 뛰어넘는 존재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정신의 통제,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음악 등 문화 산업만 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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