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지만 아랍이 아닌 이란 축구
이란은 지리적으로는 중동 지역으로 분류되지만 아랍 국가는 아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쓰는 페르시아 민족이다. 이란은 때로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한 목소리를 냈지만 독자노선을 걷는 경우도 있었다.
1976년 아랍 7개국이 <아랍만(灣) 통신> 설립을 발표하자, 이란은 발끈했다. 이란은 '아랍만'이란 명칭은 있을 수 없고 '페르시아만'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란은 이 문제로 아랍 국가들과 외교관계까지 재검토 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란은 이집트, 시리아가 '아랍만'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이들 국가와 1960년 단교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런 정서는 축구에도 투영됐다. 이란은 1968년 자국에서 아시안컵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1년 전 아랍 국가들과 유명한 '6일 전쟁'을 했던 이스라엘이 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 아랍 국가들은 대회를 보이코트 했다. 하지만 스위스 유학시절 축구를 했고, 1962년 이란 국내리그를 창설한 팔레비 국왕은 아랍과 다른 선택을 했다. 이란의 서구화를 위한 도구로 축구의 위력을 간파한 그는 대회를 그대로 진행시켰고, 이란은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대 이란 축구 전성기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 1968년을 시작으로 아시안컵 3연패를 달성한 이란 축구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1972년, 1976년 올림픽에도 아시아 대표로 출전했다.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의 맹주였다.
악연의 시작, 1978년 월드컵 예선
한국과 이란의 악연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스라엘과 일본을 넘고 최종예선에 안착한 한국은 경험 많은 이회택을 다시 대표팀에 불러 들였다. 이란을 포함해 호주, 쿠웨이트 등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차범근과 환상의 공격라인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 이회택은 도중 하차했다. 이란과의 경기에서 이회택은 전반전만 뛰고 '꺽다리' 김재한으로 교체됐다. 이회택은 라커룸에서 축구화를 집어 던지며 "몸이 이제야 풀려서 후반전에는 좀 제대로 뛰어보려고 했는데 왜 빼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 광경을 본 최정민 감독은 진노했고, 결국 이회택은 대표팀에서 명예롭지 못하게 떠났다.
현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조광래 감독가 중원을 지키던 한국은 당시 경기를 압도했지만 이란과 아쉬운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회택 사건으로 팀 분위기 마저 안 좋아진 한국은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 경기의 고비를 넘긴 이란이 월드컵에 나갔다.
힘과 스피드 한국과 호각지세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기동성 있는 플레이의 이란이야말로 한국으로서는 가장 싸우기 거북한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이란과의 1978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한 국내 스포츠 주간지가 내놓은 짤막한 예상평이다.
그렇다면 한국 축구는 왜 처음부터 이란을 부담스러워 했을까? 근본적 이유는 이란이 한국 못지 않게 스피드와 힘을 갖고 있어서다. 한국은 대체로 아시아 무대에서 투지와 빠른 주력으로 상대를 압도해 왔다. 하지만 이란에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체력전에서 이란을 압도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란은 다른 아랍국가나 동남아 팀들과는 달리 선이 굵은 힘의 축구를 중시했다. 이는 그들의 오래된 레슬링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이란 민족에게 힘은 중요했다. 그들이 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종목도 레슬링 자유형과 역도였다.
1996년 아시안컵 한국과의 8강전에서 무려 4골을 몰아 치며 박종환 감독을 낙마시켰던 장신 스트라이커 알리 다에이나, 마찬가지로 2004년 한국과의 아시안컵 8강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알리 카리미는 모두 기술 보다는 힘이 돋보이는 특급 골잡이였다.
강경파 집권하면 전력이 약화되는 이란 축구
1980년대 한국 축구를 괴롭혔던 건 이란이 아니라 사우디나 쿠웨이트였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호메이니는 축구를 천박한 '서양 스포츠'이자 부패와 사치의 화신이었던 팔레비 국왕의 유산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설상가상 격으로 이란 이라크 전쟁의 발발은 이란 축구의 근간마저 흔들었다. 1980년대가 이란 축구의 암흑기였던 이유다.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이 임박했던 시점에 이란 축구 리그는 재개됐다. 이후 이란은 축구를 다시 끌어 안았다. 조용한 개혁을 원했던 라프산자니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1994년 월드컵 예선도 이란에서 TV로 생중계 됐다. 197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란이 월드컵 진출이 무산되자 이란 축구협회 회장과 감독은 모두 경질됐다.
1997년 이란의 대통령 선거는 '서구 스포츠' 축구와 '전통 스포츠' 레슬링의 대결구도였다. 보수파 후보는 레슬링 선수들을 동원했고, 온건파 후보는 축구 스타를 내세워 선거 유세를 펼쳤다. 결과는 온건파 하타미 후보의 승리였다. 이 승리의 분위기는 1998년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1998년 월드컵에서 이란은 '숙적' 미국과 격돌했다. 이란 선수들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꽃을 든 채 미국과의 친선 분위기를 강조했다. 하지만 경기는 달랐다. 이란 선수들은 접전 끝에 미국을 2-1로 이겼고,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현재 이란을 통치하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강경파다. 축구와는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축구는 강경파 대통령과 2009년 충돌했다. 한국과 남아공 월드컵 예선을 치르던 이란의 주축 선수들은 손목에 녹색 밴드를 차고 경기를 했다.
▲ 2009년 6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8차전 한국-이란 경기에서 오범석(한국)과 볼을 다투고 있는 카리미(이란). 손목에 녹색 밴드를 찼다. ⓒ뉴시스 |
이 녹색 밴드는 당시 아마디네자드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온건파 후보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인 카리미와 마다비키아 등 이 사건에 가담한 선수들은 대표팀을 떠났다. 현재 아시안컵에 참가 중인 이란의 공격력은 이 선수들이 떠나기 전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후반전 체력이 변수
한국은 조별 예선 경기를 통해 후반전에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바레인과의 경기에서 내준 페널티 킥이나 호주 전 후반에 골키퍼 판단 미스로 인해 허용한 골 모두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체력 저하에서 출발했다. 반대로 이란은 이번 대회에서 후반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라크, 북한과의 경기에서 모두 후반에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한국의 후반 교체카드가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다. 특히 공격수 쪽이 그렇다. K리그 득점왕 유병수와 '왼발의 달인' 염기훈은 호주와의 경기에서 교체투입 됐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조광래 감독은 유병수의 무딘 움직임 때문에 다시 그를 윤빛가람으로 교체했고, 유병수의 인터넷 항명소동까지 벌어졌다.
유병수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진짜 할 맛이 안 난다. 90분도 아니고 20분 만에 내가 가지고 이룬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네"라고 썼다. 논란이 되자 유병수는 글을 지우고 항명이 아니었다는 점을 피력했다. 하지만 조 감독은 "당시 왜 재차 교체를 당했는지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좀 더 잘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많이 뛰기로 정평이 나있는 박지성, 이청용 외에도 구자철, 지동원 등 공격 라인이 많이 지쳐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선수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란은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 후보 선수를 출전시키며 숨 고르기를 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8강전에서 껄끄러운 이란을 피하기 위해 인도 전에서도 사력을 다해야 했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한국이 앞서 있지만 체력적인 면에서는 이란이 앞서 있다.
한국이 이란을 '난타전' 끝에 이길 경우에도 일본, 카타르 승자와 맞붙게 될 준결승전에서 피로를 일찍 느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카타르보다 한국은 휴식일이 하루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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