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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오른 ISO26000 시대…"윤리도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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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오른 ISO26000 시대…"윤리도 경쟁력이다"

활발해진 사회책임 투자…주목받는 '흥부 자본주의'

"조센진(한국인)이라서 어쩔 수 없다."

일본에 출장을 갔던 한 기업인이 문득 이런 말을 들었다. 일본 기업인들끼리 하던 말을 우연히 엿들은 것인데, 한국 기업의 불투명한 거래 관행을 가리킨 말이란다. 솔직히 억울했다. '그럼 일본 기업은 깨끗한가.' 이렇게 곱씹었지만, 남 탓해서 뭐하냐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국 기업이 비자금, 탈세, 노동 탄압, 뇌물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가 봐도 투명한 회계, 협력업체와의 공정한 거래로 모범을 보이면, 한국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자연스레 씻겨나가리라는 게 그 기업인의 생각이다.

ISO26000시대, 막무가내식 기업 경영은 안 통한다

지난달 14일 유한대학에서 열린 'ISO26000과 한국기업 점프의 기회'라는 토론회에 참가한 한 기업인의 회고다. 이 토론회의 취지는 제목 그대로다. 이번달부터 발효되는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ISO 26000)을 한국 기업이 보다 건강한 경제 주체로 거듭나게끔 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약간은 무모한 기업가 정신이 그 원동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일은 다 용서된다는 정서가 생겼고, 지금 한국 경제를 이끄는 기업은 대부분 이런 정서의 수혜자다. 실제로 한국 최고의 기업인 삼성과 현대는 경영권 불법 세습, 노동자 탄압 등 온갖 비리와 불법 행위로도 악명이 높다.

해외 투자 큰손들, 한국 기업 투자 철회 선언한 이유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성공만 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슬슬 통하지 않고 있다. 조금씩이지만, 게임의 규칙이 바뀌고 있다. 이른바 사회책임투자(SRI)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정글자본주의의 종주국으로 통하는 미국에서도 사회책임투자가 펀드 시장의 10%를 차지한다.

북해산 석유를 개발해서 번 돈을 밑천으로 투자하는 노르웨이 정부연기금이 대표적이다. 이들 투자기금은 공공부문이 운용하므로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자를 탄압하거나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사업을 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겐 묘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투자하는 게 길게 보면 수익률도 좋다고 한다. 당장 한국 기업 가운데서도 레드카드를 받은 곳이 있다. 한화, 풍산 등이 이 기금을 통제하는 윤리위원회로부터 '투자 철회 권고'를 받은 적이 있다.

또 덴마크의 공적연금인 ATP는 현대자동차와 닛산자동차를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다. 사회책임 투자 원칙에 위배된다는 게다. 닛산은 수단에서 무기 밀매를 했다는 이유로,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제외됐다.

▲ 지난달 14일, 유한대학에선 윤리적 기업가 정신을 다룬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프레시안
글로벌 기업, 힘 세진 만큼 사회적 책임도 짊어져야

그리고 올해 11월, ISO 26000이 발효되면서 이런 흐름에 힘이 실렸다. ISO 26000은 기업·정부·사회단체 등이 져야 할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적 표준이다. 2005년 3월 브라질 살바도르 첫 총회를 시작으로, 지난 5월 덴마크 코펜하겐의 마지막 총회까지 총 8차례의 총회를 거친 끝에 만들어졌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기술관리국 산하에 사회적 책임 표준 작업반이 만들어졌고, 그 아래에 있는 6개의 태스크 그룹이 표준안을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 ISO는 각종 기술규격과 품질에 관한 표준을 만드는 일을 해 왔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이런 역할이 중요해졌다. 만약 유럽에서 만든 전자제품은 일본 가정의 전기 콘센트에 연결할 수 없다면, 일본과 유럽 사이의 전자제품 무역은 불가능하다. '세계화' 흐름과 '표준' 제정은 그래서 동전의 양면이다. ISO는 기계 분야의 표준화 작업에서 출발해 이제는 거의 모든 산업의 표준화 작업을 맡고 있다.

그런데 기술 표준을 주로 다뤘던 ISO가 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나선 걸까. 우선 과거보다 기업의 힘이 훨씬 세졌다. 공룡과도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출현했고, 이들은 어지간한 정부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라야 하는데,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이들 기업에게 책임을 지우기엔 ISO와 같은 국제기구가 제격이다.

떠오르는 소비자 파워…삼성 무노조 경영, 국제 사회 심판 받을 듯

기업의 힘이 세진만큼 소비자들의 권리 의식도 높아졌다. 또 기업 활동에 따른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도 커졌다. 또 글로벌 기업이 인권 및 환경 기준이 느슨한 가난한 나라에서 헐값으로 노동력을 쥐어짜는 일에 대한 국제적인 반감도 생겼다.

그러나 관심이 쏠리는 한두 기업만 문제삼으면 반발이 생길 수 있다. '남들도 이렇게 한다. 왜 우리만 문제삼느냐'라는 반발이다. 결국 다함께 따를 수 있는 '표준'이 필요하다. ISO가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로비'로 규제를 피하는 한국 기업의 전통적인 성공방정식이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ISO 26000 제정을 주도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유럽 시민사회의 거대한 반발을 살 것이라고 경고했다. 회계 투명성이 낮다는 점 역시 치명적인 약점이다.

한국 재벌 총수들에게 故 유일한이 남긴 교훈

하지만 지난달 14일 'ISO26000과 한국기업 점프의 기회' 토론회에 참가한 이들은 한국 기업이 이런 약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다. 오히려 '점프'의 기회가 되리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유한대학 김영호 총장은 '유일한 식 경영'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한국에도 깨끗한 기업이 없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한양행 창업주인 고(故) 유일한은 2세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불법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삼성, 현대 등 재벌 기업과 대조적이다. 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는커녕 회삿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만든 것과도 대조적이다.

ISO26000은 기업 조직의 지배구조, 인권 및 노동 관행, 생태계에 대한 고려, 공정 거래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 사회 참여 등을 다루고 있다. 이들 분야에 대해 세부적인 표준이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게 사회적 책임의 7가지 원칙이다. 설명 책임, 투명성, 이해관계자의 이해 존중, 국제 행동 규범 존중, 인권 존중 등의 원칙이다. ISO26000은 이런 원칙에 따른 표준안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제 '윤리' 아닌 '돈' 문제다

다만 ISO26000은, 다른 ISO 표준안과 달리 인증제가 아닌 검증제 방식이다. 평소에는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검증하는 방식이다. 기업 입장에선 만만해 보일 수도 있다. 평소엔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터졌을 때 검증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오면,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또 ISO26000이 사회책임투자의 기준 역할을 하게 되므로, 투자 유치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이쯤 되면, ISO26000이 바탕을 둔 사회적 책임에 관한 원칙은 '윤리' 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다.

김영호 총장은 ISO26000 시대를 맞은 한국 기업들에게 '흥부 자본주의'를 이야기한다. 착한 흥부가 탐욕스런 놀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앞서 언급한 일본 기업인은 한국인이 깨끗한 경제 활동과는 거리가 먼, 눈 앞의 돈벌이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본래의 우리 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 착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게 오히려 한국적인 경제 상식이라는 말이다. 착한 기업에게 돈을 몰아주는 사회책임 투자의 기준이 되는 ISO26000 제정이 '한국기업 점프의 기회'라고 본 것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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