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기억이란 것도 자의적인 부분이 크니 오늘날 우리가 온전히 전태일을 호출할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전태일이 풀빵을 사 먹이고, 몸을 다 태우면서까지 지켜내려 했던 노동자들은 오늘날 비정규직으로 차별받고 해고되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여의치 않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전태일의 정신을 밥 먹듯 거론한다. 전태일을 부르짖는 어느 누구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의 당위성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다. 전태일의 정신이 바로 거기 있음을 부정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연 그 당위적인 부름에 대해 어디까지 답하고 있는가. 어느 누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태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동료를 적으로 돌리는 자본의 요지경
"동희오토에 가면 거기엔 용역들은 없고 다 아는 아저씨들이고, 다 동네 애들이고 그래요. 진입하려고 서로 몸 부대끼면서도 "이눔의 자식들, 그러지 말어" 그래요, 아저씨들이. 바로 옆에서 일하던 아저씨들이고 하다 보니까 서로 심하게 하지도 못하죠. 싸움은 주로 회사 관리자들과 했어요. 경비들이 막고 있으면 뒤에서 발로 차고 그랬거든요."
바로 어제까지도 옆자리에서 서로 라인 땡겨주고 담배 빌려피우고 위로해주고 위안받고 하던 사람들이 대치하고 섰다. "이눔의 자식들, 그러지 말어" 아저씨는 동생 같고 자식 같던 청년들이 고생을 사서하니 걱정스럽다. 청년들은 여지껏 함께 고생해 온 아저씨들과 좀 더 잘 살아보고 싶다. 하루마다 조금 더 구부정하게 퇴근하는 아저씨들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그 아저씨들의 뒷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자본이 마련한 무대에서 이들은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밀고 상처를 낸다. 다름 아닌 각자의 사정 때문이다. '사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있어 목까지 차오른 무엇이다. 뱉자니 괴롭고 삼키자니 고통스러운,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어정쩡한 상태를 최선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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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시면서 마음속으로 저희와 함께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현장투쟁 당시 넓은 공장터를 울리던 이백윤 지회장의 저 한 마디는 그래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투쟁하는 사람들 곁을 그저 지나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정, 그것은 오래도록 아프게 여물어 온 고통의 역사다.
"손가락 하나 잘리거나 해야 산재처리 해주지…."
"한 아저씨가 일하다가 점점 허리가 안 좋아졌는데 산재처리를 하겠다고 했더니 회사에서 치료비 줄테니 산재처리는 안된다고 뜯어말렸어요. 산재보험을 다 들긴 하는데 무재해 사업장이거든요. 산재처리를 안 하는 거죠. 회사에서 공상처리 하고, 치료비 대주고, 치료하는 동안 일 빠진 만큼은 월급에서 빠지는 거고. 병가가 없었어요. 병 때문에 쉬어도 그냥 쉬는 거예요. 그 아저씨도 쉬지도 못한 채로 병원을 다녔어요. 돈을 안 벌수는 없으니까. 그러다 더 악화되어서 결국 산재처리를 했죠. 그러고 나서 바로 해고됐어요. 그때가 마침 계약 1년 다가오는 시점이라 재계약을 안 해버린 거죠."
장애인 되는 줄도 모르고 충직하게 일한 대가는 해고통첩이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무렇게나 버림받고도 분노할 수 없다. 그들을 지켜줄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최진일 사무국장은 "노동조합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는 못했겠죠"라며 쓰게 웃었다.
"산재처리도 웬만하면 안하죠. 산재처리 하면 하청업체 사장 점수 깎이니까. 웬만한 거는 공상 처리도 안하고 휴직으로 해요. 병원비 주면서 조금 쉬다 와라, 그러거든요. 골절이나 되어야 전치 4주쯤 나오고 쉬다 와라 그러죠."
심인호 대협부장은 연신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타박상이나 화상 같은 것은 말도 못 꺼낸단다. 매일 같이 파스에 근육통 약을 달고 살았다면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손가락 하나 잘리거나 해야 산재처리 해주지……."
함께 "아니오"를 외치다
"우리가 일하던 조에 아주머니 한 분이 새로 들어왔었는데, 몸도 약하고 일에 적응도 어렵다 보니까 소화가 안 되는 거예요. 밥을 못 먹더라고. 아주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일을 못하니까 조장이 와서 그만두라고 압박을 계속 한 거예요. 만날 면담 들어가면 울고 나오는 거야. 그때 우리 조원들이 전부 나섰어요. 처음으로 한 집단행동이었죠."
동료의 일에 함께 분노하는 것. 노동자들의 연대는 그렇게 작은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 남의 일에 내 일처럼 아파하는 사람들. 누구든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은 커다란 힘을 가진다. 불씨는 바로 이런 곳에서 틔워진다. 최진일 사무국장도 이전에는 별다른 집단행동을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노동조합 활동을 해 본 적도 없었단다. 그래서 그 사건은 본인에게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고 했다. 모두 함께,'아니오'를 외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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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또 한 가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건 하나를 기억해냈다.
"제가 해고되고 나서요. 한번은 출근버스 우르르 탈 때 같이 들어가서 동료들이 라인에서 일하는 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어있었어요. 쉬는 시간 되니까 아는 형이 화장실 옆 칸으로 와서 '진일아, 괜찮냐?' 그러더라고. 그러고 점심시간까지 한 4시간 앉아있었어요. 다리가 저려 죽겠더라고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화장실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어요. 그 날도 마찬가지로 회사의 부당함과 우리의 권리를 이야기하다가 끌려나갔어요. 그런데 그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이 심정적으로는 지지해도 나서서 함께하지는 않았었는데, 그 날은 저를 끌어내는 경비들을 아저씨들 동생들이 뜯어말리더라고요. 못 잊죠. 평소에는 전혀 몰랐던 친구들도 함께 싸워줬거든요. 너무 고마웠어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경험. 최진일 사무국장은 당시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의 이름, 노동자로 불리워진다.
"처음에 동희오토에서 노조 띄울 때 200명의 조합원이 모였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실제 350명 모였다는 거지. 그 억압과 탄압을 뚫고 2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거죠."
심인호 대협부장의 말처럼 그것은 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반증이었다. 노동자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고 "아니오!"를 외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해고의 위협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들이 뒷산을 기어오른 사연
"어용노조 하나 무너지고, 위원장 쫓겨나고 새로 선거하고 하는 상황들이 있어서 현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급박함이 있었죠. 그래서 뒷산을 올라갔어요."
해고자들은 방송장비며 앰프, 방송차 스피커를 나눠 짊어지고 서로를 밀어주면서 산을 올랐다고 했다. 뒷산을 올라가면 훤히 트인 공장 내부와 식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까지 동료들과 밥 먹었던 식당이 여전히 거기 있고, 무엇보다 이제는 조그맣게 멀어진 동료들이 거기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거기, 없다.
"거기서 방송을 몇 번 트니까 회사 측에서 식당 옥상에다가 스피커를 달아서 음악을 막 트는 거예요. 최신가요가 쩌렁쩌렁 울려. 우리 소리가 딸리더라고. 그래서 산 밑에 발전기를 놓고 100미터짜리 전선을 가져다가 산 위에까지 연결해서 썼어요. 한 사람은 밑에서 발전기 돌리고 위에서는 방송 틀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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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산에 철조망이 쳐 있어요. 근데 거기도 마을이 있어서 경비들이 출퇴근하는 구멍이 있거든요. 거기로 한번 들어가보자 해서 회사 안으로 진입한 적이 있죠. 후다다닥 식당으로 뛰어들어가서 유인물 뿌리고 경비들한테 붙잡혀 나왔죠. 근데 거기로 들어가는 걸 경비들이 눈치를 챘는지 보수를 해놨더라고. 그래서 사다리를 걸쳐놓고 넘어갔죠. 그랬더니 위에다가 철조망을 감아놨더라고. 그래서 땅을 팠어요. 그랬더니만 그 다음엔 땅에다 말뚝을 쭉 박아놨더라고. 그래서 철조망 위에 이불 덮어놓고 넘어갔어요."
최진일 사무국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껄껄 웃었다. 이만하면 웬만한 의지가 아니지 싶다. 대단하다고 했더니 그게 다가 아니란다.
"차 트렁크에 몰래 타고 들어가기도 했었어요. 정문을 지나서 주차장까지 오면 경비실이 있어요. 거기는 경비들이 두 명 정도 밖에 없거든요. 경비실 앞에다 차를 딱 대고 트렁크를 열었더니 경비들이 헉, 하는 거야.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안으로 막 뛰어들어갔어요. 그때 심인호 동지는 다리를 다쳐서 기브스를 하고 있었거든. 쩔룩쩔룩 거리면서 들어가는데도 경비들이 손을 못쓰더라고요, 놀래가지고. 그 사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동료들과 이야기나누고 그랬죠. 결국 관리자들한테 끌려서 나왔지만. 그 밖에도 일화는 많아요. 현수막 거는 봉에 8시간 동안 매달려있던 적도 있어요. 동료들 나올 때마다 이야기하려고 시도했었죠."
차 트렁크에 들어갈 생각까지는 어떻게 한 것일까. 그들에게 있어 불가능한 상황이란 없어 보였다. 이런 평가에 대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고 대답했다.
갈 곳 없는 파견노동자
최진일 사무국장은 동희오토에 입사하기 전, 자동차 부품업체에 파견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벼룩시장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파견회사 광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갔단다.
"저는 처음에 동양인알파라고 자동차 선루프 만드는 데 있었어요. 파견회사 광고 나가지고 가봤더니 차를 태우더니 어디를 막 가더라고요. 그렇게 떨궈진 데가 거기였어요. 전체 인원 중에 정규직들 한 절반, 파견업체가 네 개 정도, 이주노동자 전문파견업체도 하나 들어와있었어요. 첫날 일하고 왔더니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못하겠더라고요. 거기서 좀만 일하면 굳은살이 박혀서 이티(ET)된다고 그러던데 진짜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철파동이 나는 바람에 물량이 줄어서 대량해고가 있었어요. 그때 저도 나왔고요. 출근했는데 불러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유감이다 그러면서 해고통보를 하는 거죠. 얼마나 비참해. 그런데 거기서 잘리고 나와도 그 파견업체를 또 찾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수가 없거든."
수없이 해고되고 무수히 떠돌아다녀야 하는 파견노동자는 어느 현장에서나 이방인에 표류자가 된다. 오늘의 그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에 지배당한다. 그들의 주체는 잔업에 침식당하고 피로에 갉아먹힌다. 언제 어느 곳에서 부유할지언정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삶이다.
"우리는 폐업되었던 업체라 들어갈 때 분위기 살벌했어요. 노동조합 위원장이 2008년 3월에 잘렸어요. 소장하던 놈도 잘리고. 업체가 폐업되면 전에 있던 업체의 관리자들 그대로 데리고 가요. 그런데 사장이 새로 왔는데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 전에 있던 관리자들이 그전에 해왔던 방식대로 간섭하니까 사장이 잘라버리는 거지. 관리자들 잘라버린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거든. 오히려 현장은 꽁꽁 얼어붙죠. 와, 관리자들도 잘려나가는구나. 조심해야지. 이런 분위기가 조성이 되니까 본보기로 자르는 경우가 많았죠."
박태수 조직부장은 입사 당시의 상황들을 이렇게 술회했다. 자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줄을 해고라는 올가미로 틀어쥐고 말 잘 들으라며 협박한다. 억만 겁의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을 자본의 속성은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제 목을 틀어 쥔' 자본의 손목을 움켜쥐느냐', 아니면 '올가미를 목에 건 채로 얌전히 살아남느냐'의 두 가지 갈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어느 상황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현재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유령집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름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때 보았던 얼굴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없다. 해고되었거나 다른 곳으로 배치전환 되었을 그들도 하루 앞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신자유주의의 폭압적 물결은 생존에 대한 불안을 볼모로 하여, 서로의 적으로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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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일 사무국장은 매일 밤낮을 용역경비들에게 당하고 또 당했으면서도 "쟤들도 갑갑한 인생이죠" 한다. 하나같이 갑갑한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 무리는 갑갑한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밀고, 한 무리는 갑갑한 인생이나마 유지해보려고 맞부딪쳐온다. 비정규직 노동자이긴 마찬가지건만 자본은 신통하게도 그들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을 그어놓았다. 그들은 그 선을 사이에 두고 오늘도 서로의 몸을 부딪는다.
정규직노조 조끼 하나만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
박태수 조직부장은 현대차 노동조합에서 영상강사로 잠깐 일한 경력이 있다. 2002년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독자 임단협 투쟁을 했었는데, 파업투쟁으로 라인을 끊던 현장에 함께 결합했었단다.
"현대차 노동조합에서 일할 때, 정규직노조 조끼와 비정규직노조 조끼가 달랐어요. 정규직노조 조끼를 입고 있으면 라인에서 관리자들이 함부로 못해요. 공장 정문에서 비정규직노조 집회를 한 적이 있어요. 류기혁 열사 영상을 틀려고 했는데 경비실에서 전기를 안내주는 거예요. 정규직노조 조끼를 입고 가서 코드 그냥 코드 꽂았더니 안 건드리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이 정규직 노조 조끼 하나만 못하구나 하는 걸 그때 느꼈죠."
직접 현장노동자로 살게 된 경위를 물었더니 '자괴감'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 투쟁현장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했어요. 그런데 투쟁이 정리되는 시점이 오니까 그 사람들과 나는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더라고. 그 사람들은 당장 책임 묻고, 징계되고 해고되고 구속되는데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이 술 얻어먹고 고맙다는 소리만 듣더라고. 그 사람들은 죽어 나자빠지는데 나는 그렇지 않더라고. 그때 자괴감이 들었어요."
정규직노조의 힘은 조끼 하나로 확연하게 드러나온다. 복잡한 내부사정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현실은 이렇게 단순하게 형상화된다. 수백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조 조끼 한 벌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권이 없다
"원래도 힘들었으니까 그냥 죽어라고 하는 거예요. 딴 거 없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직율이 높은 이유도 그거예요. 너무 고되니까."
고된 노동에 대해 자포자기하는 사람들. 박태수 조직부장은 출근버스를 탈 때마다 바뀌는 얼굴들을 보면서 다시 처음부터 투쟁을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다 신입사원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출근버스 타서 선전전을 해도, '쟤들 뭔데 저러고 있지?' 이러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단다. 이유를 물었더니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늘로 자꾸만 올라가는 이유가 대중파업을 못해서 그래요. 노동조합을 현장에 안착시키기가 워낙에 힘들고, 계약해지 당하고 정리해고 당하고 하니까. 그러다보니까 파업투쟁하기가 힘들죠.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올라가고, 굶고, 노숙하고 그런 거죠. 우리도 사실 그런 거예요. 현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는 것처럼 파업하고 투쟁할 수 있다면 이런 거 안 하지."
노동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파업인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이 벽을 깨야만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할 수 있는 권리는 없어요. 파업하는 순간 잘리니까, 아니 파업하려고 노동조합 만드는 순간 잘리니까. 파업권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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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나도 제자리
1989년 전태일문학상 1회 수상작이었던 안재성 작가의 '파업'이라는 소설이 있다. 놀랍게도 그 소설 속에는 동희오토 노동자들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회사는 해고자들과 노동자의 접촉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담을 넘어 왔으니 해고자들을 주거침입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그날로 모든 담장에 높다란 철조망을 둘렀다.…그러나 해고자들의 기발한 침공 작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해고자들은 배식구를 장악해 연설을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들고 온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회사의 변명을 다시 공박하는 소식지 2호였다."
이 소설이 쓰인 지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로부터는 더한 세월들이 우리를 지나갔다. 그럼에도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투쟁은 쳇바퀴 돌듯 꼬리를 물고 문다. 자본은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더욱 거대해졌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더욱 위치가 불안정해졌다. 자본은 20여 년 동안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더욱 능수능란하게 노동자들을 '능욕'한다.
진보란 단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상황은 악화 일변도를 달릴 것이다. 인간의 눈은 변화만을 포착한다. 익숙해진 모든 정지한 것들에 대해서 인간은 장님이나 다름없다. 이 모든 절망의 상황에 익숙해지기 전에 지금 절실한 것은 변화다. 그 속에 돌파구가 있다.
이랜드 투쟁에 부쳐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된 이랜드 파업. 이랜드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정규직의 비정규직 투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업 결의 당시 찾아왔던 단 세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김경욱 전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은 사실 그 전에는 존재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 세 사람은 마지막까지 남아 같이 투쟁해줬어요. 그리고 세 명 다 복직했었고요."
김경욱 위원장은 그 세 사람의 의지가 이랜드 투쟁을 만든 큰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파업할 때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자리를 메우는 것을 보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하는 파업이 아니면 그 싸움은 패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김경욱 위원장. 이랜드 투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한 싸움이었기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김경욱 위원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험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먼저 손 내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각자 위태로운 싸움을 하기 보다는 함께 승리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상생의 투쟁으로 이랜드 파업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 임금부분을 제외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모두 사라졌고,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이 보장되었으며 추가적인 외주화도 막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도 전원 복직되었다. 물론 복직을 포기한 지도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정규직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었어요. 해고의 위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거든요. 제가 비정규직이었다면 진즉 해고돼 조직활동은 시작조차 못했을 겁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것이 자본에게 가장 위협적이며 효과적인 투쟁 방식입니다."
"그게…, 되겠나?"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투쟁, 공동투쟁 이야기를 깊게 하다보면 하나같이 터져나오는 탄식 한 마디가 있다. "그게…, 되겠나?"
"계속적으로 외주화가 진행 중이고 비정규직들의 전환배치와 계약해지가 손쉽게 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이를 묵인하는 측면이 없진 않습니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비정규직지회 노영태 조합원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비정규직은 항상 사회적 약자로서, 혹은 하위층의 사람들로서 비춰지는 측면이 있어요.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죠. 동희오토라는 공장도 사실 기아차 정규직 노조의 묵인 하에 생겨난 거예요. 해외공장 외주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은데 실질적으로 국내의 완성차 외주 하청 공장에 대해서는 왜 묵인하고 막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죠."
동희오토 같은 공장들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게 되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결국은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함께 공유할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손잡아야 한다.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
"비정규 투쟁의 전망, 없습니다. 없는 거 압니다. '비정규 투쟁, 이렇게 하면 승리한다'라고 제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가 하겠습니다. 몇 개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승리할 지 우리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겠습니다, 끝까지. 비록 그것이 완벽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900억 원짜리 전용기 타고 다니면서 유지비만 일년에 300~400억 원씩 든다는 정몽구가 한 달 150만 원 받아가면서 5~6만원 더 벌어보자고 토요일, 일요일 청소특근까지 나와야하는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마음을 손톱만치라도 알겠습니까. 높은 상공에서 바라보이는 개미새끼, 혹은 '찌끄레기' 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몽구가 가지고 있는 꿈은 이 착취구조를 더욱 더 안착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우리가 보여줄 것입니다."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투쟁 1주년 기념 촛불문화제에서 이백윤 지회장이 했던 이야기다. 이제 투쟁의 기간은 당시의 배가 지났지만 이 지회장의 발언처럼 상황은 별반 더 나아진 것이 없다. 그러나 2년 여의 투쟁은 숱한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의미들이 허무하게 흩어지지 않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나무는 바닥에서부터 시간을 채워 올린다. 두 손을 허리에 받치고 까마득한 높이의 나무를 올려다보노라면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라온 시간의 길이가 가늠이 어려울 만큼 경이로워진다. 그러나 나무는 단지 일정한 공간만을 점유해 온 것이 아니다. 나무가 채워 올린 그 시간들을 지나갔던 바람, 곤충, 새, 먼지. 수많은 생명들을 틔우고 묻으면서 영글어진 갖가지 사연들로 나무는 둥우리를 키우고 넓은 잎을 피웠다.
오늘이 오기까지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채워 온 2년 여의 시간 속에도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찾아 온 수많은 사람들, 목소리들, 이야기들, 또 그들을 떠난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 그들의 2년을 함께 채우고 있다. 그 가운데는 함께 싸우자던 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그 속에도 단순치 않은 이야기들이 얽힌 줄은 알지만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치던 전태일 앞에서는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이것이다. 4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그들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의 죽음, 그 정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흩어져선 안 된다. 정규직 노조가 손을 내밀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인간 선언
좌판에 널린 사과가 이미 불긋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사이 사과는 연하게 돌던 푸릇한 식감이 이미 여물어 질깃해져 있다. 사과를 씹으면서 문득 계절 하나가 갔구나, 싶다. 계절들은 이렇게 뜬금없는 방식으로 감지되곤 한다. 그러나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앉아있는 거리에선 어떠한 계절도 감지되지 않는다. 모든 계절은 다만 견뎌야 할 한가지다. 무르익을수록 질겨지는 과실의 껍질처럼 질기게 앉아있어야 한다.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길은 걷기 수월하게 뻗어있고, 하이힐이건 정장구두건 모두, 무리 없이 지나는 저 길 위에 한 두 시간만 앉아있어 봐도 저들이 지나는 길과 내가 주저앉은 이 길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2년을 넘게 최저임금에 하루 13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현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외치는 그들은, 경쾌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단순히 기괴한 풍광 이상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다 같다지만, 같지 않다. 누리는 권리도 자유도 서로 멀기만 한 사람들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강제 연행되면서 수많은 완력들에 둘러싸여 쉰 목으로 외친 한마디가 아직 귀에 맺혀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인간이다!" 이 구호는 말 그대로 '인간 선언'이다. 전태일이 죽고, 40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금 선언을 해야만 인간이 될 수 있는 사회에 그 역사의 길 위에 지금 우리가 놓여있다. 열사의 40주기를 맞아 우리는 전태일의 이름을 부를 준비를 다시금 시작해야 할 것 같다. 40년 전 시다들에게 풀빵을 건네던 전태일의 언 손처럼 누구든 먼저 서로를 위해 손 내밀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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