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연구위원은 이번 칼럼에서 다시금 금융화 개념을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을 선보인다. 그는 '쿠폰 풀(coupon pool)'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이 개념을 통해 "2007년 한국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의 성격을 어떻게 음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것이 "금융허브 프로젝트, 특히 '자산운용법 특화 금융허브' 계획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조망한다. <편집자 주>
국내외에서 '금융화(financialization)'라는 개념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용어가 내포한 뜻과 함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 논의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국민경제에서 금융산업의 비중이 커졌다'는 양적 의미만 담고 있다. 다른 어떤 경우에는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지배가 다시 도래했다'는, 힐퍼딩이나 레닌 류의 고전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국민경제의 축적방식이 변화했다'거나 '축적이 이뤄지는 통로가 주로 금융적인 것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제도 변화로서의 금융화
물론 '금융화'에 대한 각각의 접근 방식이 지닌 장단점이나 한계를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접근법이 하나같이 '제도 변화의 추진력으로서의 금융화'라는 측면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정의하든지 간에, 금융화는 여러 사회제도, 특히 금융제도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금융화가 진정 '자본주의의 성격'이라는 큰 규모 차원에서 벌어지는 변화라면, 금융제도에서 벌어질 변화도 상전벽해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금융화 논의에서 금융제도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아직 미발달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쉽다.
물론 금융화를 겪었거나 겪기 시작한 곳의 금융제도가 '상전벽해' 혹은 "빅뱅"의 변화를 겪은 것은 상식이므로 특별히 학문적 분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이런 법적, 제도적 변화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공문서나 저널리즘 이상의 의의를 가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상의 변화'와 '그 배후에 작동하는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을 잇는 매개 고리로서의 '제도적 틀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금융화에 접근하면 어떨까.
양적 금융화(금융 부문의 팽창) 논의와 질적 금융화(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변화) 논의가 이어질 수 있는 매개 고리는 바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제도적 틀의 변화이다. 금융화에 대해 어떤 접근법을 취하든 지간에,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제도적 틀을 변화시켰는가'라는 논의와 연결될 때에야 비로소 질적 혹은 양적 범주의 변화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다리가 놓아지는 것이다.
역으로, 제도 변화에 대한 연구가 지루한 법·제도의 디테일이나 산재된 수치의 나열과 같은 현상 기술의 차원에 머물지 않으려면, 제도 변화가 금융화의 양적 현상과 질적 본질 차원에서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한 분석과 조망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가 금융화를 겪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2007년 한국의 금융제도는 '자본시장통합법'의 도입이라는 큰 사건을 겪었다. 권오규 경제 부총리를 필두로 전·현직 금융 관료들의 입에서는 2008년에는 보험업까지를 포괄하는 "금융 빅뱅"이 임박했다는 메시지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제도 변화로서의 금융화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쿠폰 풀"의 개념
'제도 변화'로서 자본시장통합법이 지니는 의의를 조망하기 위해 먼저 "쿠폰 풀(coupon pool)"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쿠폰 풀이란 지난 20년 간 계속된 금융화의 결과 미국과 영국 등에서 새롭게 생겨난 금융제도의 틀을 묘사하기 위한 개념으로, 맨체스터 경영대의 줄리 프라우드(Julie Froud)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이 제안했다.
예전의 국민경제에서 금융 흐름의 수요 측인 기업과 국가와 공급 측인 가계를 잇는 다리는 금융 거래의 종류와 질에 따라 은행, 보험, 증권 시장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지만 "쿠폰 풀" 체제에서는 이 모든 금융 행위가 '금융상품'이라는 쿠폰(coupon)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이 모든 다양한 쿠폰들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pool)으로 들어오게 된다.
금융제도는, 쿠폰 풀에서의 역동성으로 인해, 더 이상 기업과 국가, 가계의 금융 행태를 반영하고 매개하는 매개자(mediator)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경제 행태를 규제하는 규제자(regulator)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1970년대 이전 각국의 금융제도는 비록 그 외양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기업과 국가, 가계의 자금 흐름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왼쪽 원에는 자금 수요자인 기업과 국가가, 오른쪽 원에는 자금 공급자인 가계가 위치한 전통적인 국민경제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왼쪽에서는 기업과 국가가 금융체제로부터 자금을 조달해가는 흐름이, 오른쪽에는 가계가 여유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각종 금융기관에 자금을 공급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금융기관은 이 두 개의 원 가운데에서 수요자와 공급자를 매개하며, 이는 가계 쪽 행위자 등의 시간 선호(time preference)와 유동성, 투자의 시간 지평 등 금융 거래의 질적 차이에 따라 은행, 증권시장, 보험 등과 같은 다양한 채널로 나눠진다.
프라우드 등은 이 체계가 생산설비의 확장과 고용의 증대를 주요 축적수단으로 삼던 1970년대 이전의 자본주의에 적합한 금융제도라고 본다. 즉, 설비투자나 재정지출 등을 위해 자금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국가에 지속적,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체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화'가 진행되면서 이 두 개의 원과 이들을 매개하는 몇 개의 금융 채널들로 이루어진 이미지가 변하게 된다. 먼저 이 채널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compartment)이 무너지고 이들 채널이 하나로 연결된다. 수요 쪽이나 공급 쪽이나 금융기관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으로 자금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것이 아니라, 각종 금융상품을 내놓아 그것을 판매하고 가격을 매기는 것으로 행태를 바꾸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업도 국가도 채권이나 주식 또는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직접 시장에 내다파는 식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한다. 가계는 은행에 정기적금을 드는 대신, 직접 금융시장에 나가 금융상품을 매매하든지 아니면 각종 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금융시장에 뛰어든다. 나머지 여유 자금은 노후나 질병 등을 대비하기 위해 보험이나 연금에 들어가는데, 이런 자금 흐름도 결국 쿠폰 풀에 흡수돼 각종 쿠폰을 거래하는 돈으로 쓰이게 된다.
이 같은 새로운 체제 아래서는, 이전에는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고 각각 다른 종류의 규제를 받았던 상이한 금융기관들과 제도들의 차이가 사라지게 된다. 은행, 보험, 증권사 등에 각각 다르게 적용됐던 이자율 규정이나 포트폴리오 관련 규정이 점차 하나의 성격, 즉 '자산운용업'의 성격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 금융기관과 제도가 지닌 차이가 모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각 금융기관들은 나름의 강점을 살려 자신만의 시장을 개척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행태가 '돈을 활용하여 돈을 불린다(M - M')'는 단순한 '자산운용업' 논리로 수렴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쿠폰 풀 창출의 요건들
이러한 쿠폰 풀 체제가 자동으로 생성되고 발전한다고 볼 수는 없다. 국민경제의 가운데에 위치한 다양한 금융제도를 하나로 통합하는 "빅뱅"도 필요하지만, 왼쪽 원과 오른쪽 원에 해당하는 행위자들도 자신들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왼쪽 원에 위치한 기업들의 경우를 보자. 이들은 쿠폰 풀에서 발행한 쿠폰(금융상품)들의 가격 등락이 자신들의 행태를 규제할 수 있도록 기업 통치(corporate governance)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처럼 노동조합이 기업 통치 구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결정(Zusammenbestimmung) 제도가 존재할 경우, 쿠폰 풀이 기업 행태를 전일적으로 규제하기란 힘들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좋은 기업 지배구조(good corporate governance)'라는 이름으로 총괄되는 주주가치 경영, 투명성 등의 원칙들이 철저하게 관철되도록 스스로의 행태는 물론 관련 제도들도 정비해야 한다. 소위 '주주 자본주의적 경영'을 도입하는 것이다.
오른쪽 원에 위치한 가계도 모든 여유 자금이 결국에는 쿠폰 풀로 흡수되도록 행태를 바꿔야 한다. 이 같은 오른쪽 측면의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논의는, 왼쪽 측면의 변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가계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주기(life-cycle)와 패턴에 따라 여유 자금을 보험, 연금 등 여러 기관에 넣는다. 아직까지는 국가가 이런 자금을 관리하고, 또 이와 관련한 각종 규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런 국가의 관리나 각종 규제를 다 털어내고 이 다양한 기관들이 자유롭게 쿠폰 풀로 뛰어들어 자산운용사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오른쪽의 개혁도 완성될 것이다.
즉, 가계의 행태 변화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개인들이 돈을 맡겨두는 모든 금융기관에 쌓인 '뭉칫돈'을 쿠폰 풀로 부어대는 일대 조치를 하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가계의 생활 주기와 관련된 거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복잡한 문제이다. 각종 정치적, 사회적 쟁점과 논쟁들이 따라붙게 돼 있고, 기관들 간의 경쟁 속에서 어느 한쪽에 부당한 특혜가 가지 않도록 자금 배분과 참여의 기회를 만드는 등 실로 거대한 변혁이 수반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본시장통합법의 도입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자산운용업 특화 금융허브'계획에 따른 여러 제도 변화들이 지닌 의미를 착목할 수 있다.
자본시장통합법과 "자산운용 특화 금융허브"
정부는 2010년까지 한국을 동아시아의 '자산운용 특화 금융허브'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은 2007년 현재 200조 원이 넘는 국민연금과 이와 비슷한 규모의 외환 보유 등을 한국투자공사(KIC) 등을 통해 국내외의 자산 운용업체들에게 위탁한다는 것이다. 또 퇴직연금도 최근의 제도 개혁을 통해 쿠폰 풀에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다.
자본시장통합법은 7개의 장벽으로 나눠져 있었던 우리나라의 자본시장을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금융투자기관을 출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증권시장에서의 쿠폰 풀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과거 은행만이 누렸던 '지급결재권'이 증권사에도 부여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또 정부가 조만간 보험업체에도 지급결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지급결재권이 은행의 독점에서 벗어나게 되면 가계 행위자들의 자금 배분은 증권사, 보험사 등으로 다변화될 것이다. 현재 봉급생활자들의 돈이 은행 계좌에서 이보다 더 높은 금리를 보장해주는 증권사들의 CMA(예탁금을 어음, 채권 등에 투자한 후 그 수익을 고객에게 돌려주는 실적배당 금융상품) 통장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증권사, 보험사들과 금리 경쟁을 해야 하고, 따라서 예대마진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자산운용업이나 투자은행업의 행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모두 쿠폰 풀에서의 활동가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한국투자공사(KIC)의 설립,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주식 비중의 증가, 퇴직연금 제도의 개혁 등 오른쪽 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지닌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각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몇 개의 제도 개혁들이 사실은 한국 금융계에 쿠폰 풀을 창출시켜주기 위한 일관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 개혁들이 정부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자산운용 특화 금융허브'계획을 담은 여러 문서들에서 하나의 세트처럼 엮여져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맺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에서 "쿠폰 풀"의 창출을 보게 될 것인가?
프라우드 등이 강조하는 바, 이러한 쿠폰 풀 체제가 전면적으로 실현된 나라는 아직 미국과 영국밖에 없다. 노사관계, 연금체제 등 온갖 복잡한 제도적 장치들에 대해 각국 자본주의가 갖는 다양성(Varieties of National Capitalism)에 막혀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금융허브 계획과 이 계획을 실행하는 중요 관문인 자본시장통합법 등을 통해 미국과 영국의 뒤를 쫓아 순수한 쿠폰 풀의 금융체제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한 가치 평가와 정치적 의미의 음미는 올해 대선이 끝나고 "빅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있는 내년의 과제가 될 것이다.
불현듯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벚꽃 동산'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제의 세계'는 -물론 이 세계도 스칼렛 오하라의 눈물 젖은 뺨이나 벚꽃이 가득 핀 정원만큼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사라지고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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