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헤지펀드 '튜더펀드'의 폴 튜더 존스는 '로빈훗재단'을 만들어 사회적 기업에 재정적 후원과 경영 노하우 전수를 아끼지 않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야만인'이란 별명까지 얻은 사모펀드 'KKR'의 조지 로버츠도 '레데프'라는 금융 NPO를 운영하고 있다.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밥&돈> 칼럼에서 이들 금융 비영리단체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박 교수는 이들의 출연은 신자유주의의 침투로 인해 생긴 공공성의 빈 공간을 채우려는 사회의 '자정작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의 출연을 삐딱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혁시키기 위한 작은 실험으로 볼 것을 주문했다. <편집자 주>
오늘날 금융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곳에는 첨단 금융기법으로 무장을 하고 고수익을 추구하는 수많은 금융회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과 지역 활성화에 목표를 둔 대안금융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눈길을 끄는 것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재정적 후원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 금융단체, 즉 금융 비영리단체(Non-profit Organization: NPO)들이다. 이들 단체는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와 동일한 투자행태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회적 기업을 육성한다.
자본시장의 도둑과 로빈훗 재단
헤지펀드(hedge fund)는 전 세계 금융시장의 빈틈을 헤집고 다니면서 경제의 기초체질과 금융변수 사이의 괴리를 교묘히 이용해, 때로는 의도적으로 환율을 높이거나 낮춤으로써 막대한 부를 챙기고 이를 고객과 나누는 금융집단이다. 환율이 요동을 치고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헤지펀드의 죄를 묻는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진다.
'튜더펀드 인베스트먼트'의 폴 튜더 존스는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헤지펀드의 대표이다. 하지만 그는 '로빈훗재단'(www.robinhood.org)의 설립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헤지펀드는 금융시장의 도적"이라는 세간의 악명을 의도적으로 뒤튼 것인지, 아니면 중세의 로빈훗이야말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사회적 기업가(social entrepreneur)라는 나름의 확신에 근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선택한 이름은 '로빈훗'이었다.
이 재단의 목적은 설립자의 이력과는 달리 돈을 버는 데 있지 않다. 돈을 쓰되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에 쓰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로빈훗재단은 부와 빈곤이 공존하는 대도시 뉴욕을 무대로 보육·교육·직업훈련·경제사업 등을 벌이는 사회적 기업들에게 자금과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고 있다.
로빈훗재단은 사회적 기업에 대한 재정적 후원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 금융단체, 즉 금융 비영리단체(NPO)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의 후견인이 된 악명 높은 사모펀드
시민사회와 재계에서 헤지펀드보다도 더 악명이 높은 펀드가 있다. 바로 사모펀드다.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 PEF)란 상장 기업의 지분을 매입해 기업을 인수한 후 가혹한 구조조정을 거쳐 되팔아 거액의 차익을 거둔 다음 이를 고객과 나누는 펀드이다. 때때로 사모펀드는 건실하지만 경영상으로는 적자인 회사를 인수합병(M&A) 한 후 알짜 자산을 팔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리고 일자리를 없애거나 아예 기업을 없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펀드가 바로 'KKR(Kohlberg Kravis Roberts)'이다. 1990년대 세계 최대의 적대적 M&A를 주도한 이 펀드는 이후 두 명의 저자(Bryan Burrough와 John Helyar)로부터 '문 앞에 서성이는 야만인(Barbarians at the gate)'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선사받기도 했다.
그런데 KKR의 공동 창업자인 조지 로버츠가 만든 단체가 하나 있으니, 바로 '로빈훗재단'과 함께 '금융 비영리단체'의 대표로 꼽히는 레데프(the Roberts Enterprise Development Fund: REDF)이다.
로버츠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금융자본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벌어들인 거액의 돈으로 마치 속죄라도 하듯 레데프를 만들어 사회적 기업에 대한 후견에 나선 것이다.
KKR과 유사한 투자기법을 통해 사회적 기업을 지원한다는 것이 레데프의 특징이다. 레데프는 고용창출을 통해 빈곤을 퇴치하려는 단체, 일정 규모 이상의 단체, 레데프의 적극적인 개입에 동의하는 단체 등을 대상으로 기부자의 요구사항에 부합되는 사회적 기업 후보군들을 골라낸 후, 대형 컨설팅 회사에 의뢰해 어떤 단체가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하도록 한다. 기업 선정이 끝나면 외부에서 전문 경영진을 데려와 조직 개편에 돌입하는데, 일정 기간 후 재평가를 실시해 기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곳에는 기부를 중단하고 일정 기준을 상회한 효과를 낸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확대한다.
로버츠에게는 사모펀드 활동과 레데프 활동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추구하는 목표가 각각 금전적 수익률이냐 사회적·공익적 수익률이냐 라는 점에서 다를 뿐 수익률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앨 고어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사람
미국에는 이들 말고도 공공성과 경영 효율성을 같은 무게로 중시하면서 일상적인 기업가와 사회기업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기업에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하고 사회기업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대표적인 사람은 미국의 대표적인 경매 사이트인 eBay를 오늘날의 위치로까지 키운 초대 CEO 제프 스콜이다.
eBay의 기업공개(IPO)로 20억 달러의 거부가 된 스콜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신세대형 사회기업가이다. 세상을 바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흥행성이 부족해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영화를 발굴해 돈을 대주는 게 그의 주된 활동 중 하나다.
맥도널드 햄버거와 코카콜라가 어떻게 보통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가를 고발한 영화 <패스트푸드의 나라>나 앨 고어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은 그의 투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2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eBay 주식을 출연해 만든 '스콜재단'(www.skollfoundation.org)은 사회적 기업을 후원하는 재단 중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이 재단은 옥스퍼드대의 사이드 경영대학원에 '사회기업가정신 센터'를 설립했으며, 팔레스타인과 인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빈곤 퇴치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
영미권에서 사회기업가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
1980년대 영국 정부는 대규모의 복지지출 삭감을 단행했다. 사회적 기업은 이 같은 공공성의 후퇴를 보완하려는 민간의 자발적인 움직임 가운데 하나다. 노동과 자본을 활용해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기업가는 1990년대 말을 전후로 영국과 미국에서 정부의 공백을 채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경영학자들의 영원한 스승인 피터 드러커는 사회기업가를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회의 성과 역량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비영리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이들이 보다 효율적인 경영과 관리를 통해 기존 비영리단체의 효율성을 개선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가치창조라는 본연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하자는 것이 사회기업가의 가능성에 새롭게 주목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사회적'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기업이 판매하는 상품의 성격이 사회적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방식이나 노동과 자본을 조직하는 방식이 사회적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가령, 영국의 대표적인 비영리단체인 옥스팜(Oxfam)이 만든 회사 '카페디렉트(Cafédirect)'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제공한 농가에서만 커피 원두를 구입하는, 이른바 공정무역의 원칙을 준수한다. 현재 카페디렉트는 영국 최대의 커피 브랜드 중 하나다.
제이미 올리버라는 사회기업가가 만든 음식점 핍프틴(Fifteen)은 청년 실업자와 노숙자, 알콜 중독자 등을 종업원으로 고용하고, 기술과 경험을 습득한 종업원들에게는 창업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체이다. 현재 핍프틴은 런던 사람들에게 세련된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현재 영국에는 이 같은 사회적 기업이 1만5000개 이상 존재한다. 이들 사회적 기업 중에는 종업원소유기업이 적지 않다. 또,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이 비영리조직으로 세제상 혜택을 받고 있다.
이들 사회적 기업은 노동당과 보수당 양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보수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로 대도시의 사회 문제를 치유하는 사회적 기업의 육성을 통해 과거 어렵게 지지를 얻어냈던 지역의 표를 되찾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기업 경영의 노하우를 공공 부문에 전승시킨다는 발상 또한 사업가를 중시하는 보수당의 이념적 성향에 부합한다.
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기업은 지방정부의 관료주의를 우회해 활력 넘치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공서비스 개혁의 원동력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더욱이 이들의 활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사회개혁가들에 의해 주창되었던 생산자협동조합 또는 자율공동체의 이상을 반추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노동당 정부가 <미래건설자(Futurebuilders)>라는 공적기구를 통해 2억1500만 파운드의 기금을 사회적 기업에 자금 융자를 해주는 것도 이처럼 사회적 기업에 우호적인 정치적·지적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기업 현황은? 우리 사회에도 사회적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기업을 탈산업시대에 새롭게 고용을 창출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할 소중한 터전으로 가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오기도 한다. 다 함께 그 성공을 축하해야 할 사회적 기업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저소득층에게 생계형 창업자금을 제공하고, 이들의 자활을 전문적인 사후관리를 통해 내실 있게 후견하는 <신나는 조합>이나 <사회연대은행>의 성공 사례는 레데프나 스콜재단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
사회적 기업을 위한 인프라
사회적 기업은 수익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인 기업과는 달리 들어가는 돈에 비해 벌어들이는 돈이 많지 않으므로 외부로부터의 자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지 않는 한,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존속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관련 인프라의 확충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에 동의하고 자신의 돈을 기꺼이 이들 사회적 기업에 기부할 용의가 있는 수많은 시민과 투자자들 △사회적 기업의 활동과 실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우수한 사회적 기업과 그렇지 못한 사회적 기업을 가려내는 리서치사나 신용평가사 △사회적 기업이 본래의 목적을 보다 잘 달성할 수 있도록 최신 경영기법을 전수해줄 컨설팅사 △사회적 기업 또는 비영리단체에 제공되는 자금에 대한 세제 혜택 및 체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정부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채원 재단'이 보고 싶다
재정건전성의 경제적 압박과 작은 정부를 향한 정치적 압력이 세계적 차원에서 완화되지 않는 한, 정부 주도로 제공되는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민간 차원에서 제공되는 공공성과 사회적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앞으로 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처럼 신자유주의적 흐름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은 시장과 사회로 구성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오묘한 자정 작용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부를 하는 사람이 금융 투자자와 같은 방식, 즉 '내게 성과를 입증하면 내가 가진 돈과 시간을 주겠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방향으로 경기 규칙이 바뀐 상황에서 벤처투자나 금융투자를 통해 하루아침에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돈과 시간 그리고 재능을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서도 삐딱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또한, 자칫 세상과는 격리된 채 타성에 안주할 수도 있는 비영리단체에 긴장감과 활력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
공공성이 외면되는 사회, 새로운 실험의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는 희망이 없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도 불가능하다. 사회적 가치를 얘기하면 무능한 몽상가이거나 위험한 선동가로 치부되는 풍조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편견 속에 완강하게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꿀 수 없다. 작지만 구체적인 성과물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꽝'하고 건드릴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남들보다 앞서 공공성을 몸소 실험하는 사람들이 성과를 내야 하는데, 보다 많은 자원과 노력이 새로운 공공부문, 즉 사회적 기업으로 몰려올수록 그 기간은 단축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처럼 성공한 젊은 사업가들이 이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해 본다. 맨 주먹으로 미래에셋을 굴지의 증권사로 키운 박현주 회장이나 '한국의 워렌 버핏'으로 불리우는 가치투자의 대명사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전무가 새로운 금융 NPO를 만들어 사회적 기업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나서고, 보다 많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 속에서 영리활동 영역과 사회활동 영역 사이에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창의와 연대를 배우는 새로운 학교, 환자가 주인인 새로운 병원, 놀이와 공부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서관, 노년의 지식과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화센터,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회사가 먼 미래의 아득한 몽상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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