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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좌파는 신자유주의에 봉사한다"

[발언] '사회적 대타협론'을 위한 변 ④

① 왜 진보는 사회-재벌 타협론을 수용하지 못하는가
② "민족경제론은 난센스다"
③ 마오쩌둥의 민족경제론과 스웨덴 사민주의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인들은 모두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우파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면, 좌파는 국가 권력의 장악을 통한 사회 변혁을 꿈꿨다.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군부독재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입에 달고 다녔으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사회운동권 역시 시도 때도 없이 민족과 국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심지어 투쟁조직의 명칭에 국가와 민족을 집어넣어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 애학투련(애국학생투쟁연합), 구학련(구국학생연맹)을 탄생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1990년대 접어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국가는 모름지기 교양 있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천박한 단어가 됐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애국, 호국, 조국, 국익 등 '국(國)'자 합성어만 봐도 진저리를 쳤고, 자신이 국가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쿨(cool)'한 인간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데 골몰하게 되었다. 한 인기 소설가는 "강아지 목욕 때문에 선거에 참여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칼럼을 '진보적' 매체에 기고하기까지 했다.
▲ 2003년 하반기 한국을 강타했던 영화 <실미도>는 "국가주의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라는 열광과 "'제대로 된 국가주의'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결국 국가주의를 노래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시네마서비스

최근에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를 둘러싸고 국가주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평론가들이 <실미도>를 두고 "국가주의에 희생당한 이들의 비극으로 국가주의를 정면 공격하는 영화"라며 통쾌해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뛰는 자 위엔 나는 자가 있는 법! 다른 평론가 한 분은 "(실미도는) 제대로(?) 된 국가를 열망한다는 점에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영화"라고 비판했다.

'제대로(?)'는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제대로 된 국가'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왜? 국가는 억압체제이니까! 한편 이 '제대로 된' 반(反)국가주의자는 "(국가주의가) 대중의 무의식과 결합하면 파시즘이 도래한다"고 겁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누가 더 반국가주의적인지를 놓고 지식인들끼리 경쟁을 벌인 셈이다.

1980년대 이전엔 말 한 번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는 말 한 번 잘못했다간 국가주의자나, 최악의 경우엔 파시스트로 찍히기 십상이었다.

진보 진영의 국가관이 불과 10년 사이에 이토록 변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괴한 연재의 후반부에 이른 지금, 필자는 '국가주의'를 주제로 논의를 전개해보려고 한다. 사회적 대타협론이 시도한 주요 작업 가운데 하나는 반국가주의(anti-statism)가 창궐한 가운데서 '국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8혁명과 反국가주의

사실 반국가주의자들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의료, 연금 등 사회보험은 제쳐두더라도 식량, 에너지, 통신, 국방, 치안, 교통 등 기초적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들이 이럭저럭 공급될 수 있는 이유는 국가의 개입과 간섭 덕분이라는 점을 지적하면 된다.

국가는 또한 이런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반국가주의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억압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사회보험의 경우 전체 보험금의 절반 정도를 사업주가 부담해야 하는데, 이는 사업주에 대한 국가의 억압임이 분명하다. 에너지, 통신, 교통 서비스가 현재의 가격에 공급될 수 있는 이유는 국가가 폭력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다만 국방, 치안 등 노골적 폭력의 형식을 띤 서비스들은 정말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서비스를 공급받야야 하는 권리에서 의무에서 반국가주의자들을 제외시켜 드리기 위해 헌법소원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국방과 치안은 비(非)선택성을 본질로 하는 공공재라서 특정인만 제외시킬 방법은 없는데다, 이분들이 진심으로 이런 서비스 공급을 거부할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그런데도 명석하기 그지없는 문화평론가들이 반국가주의에 쏠리는 이유 중 하나는 해방 이후 줄곧 국가, 민족 등의 집단적 주체가 개인성 및 자유의 가치를 억압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군사정부의 국민총동원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대항한 범민주화운동 진영의 조직 원리도 집단을 중심에 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반국가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의 창궐은 억압당한 개인성의 복수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혼이 깨어나 소복 차림의 귀신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아랑이나 장화·홍련만 해도 이들이 머리 풀고 나타나기 위한 필요조건은 신임 지방관의 부임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국의 억압된 개인들에게 나타난 '신임 지방관'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1968년 전후의 세계적 학생혁명으로 등장한 신좌파 이론들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노동거부, 해체, 탈주 등으로 불리는 지식상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신좌파 이론들의 특징은 1960~1970년대 당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싸잡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구좌파가 꿈꿨던 '생산수단의 사회화' 따위는 1968년 당시에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신좌파의 변혁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국가 혹은 체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그냥 반항하고 허무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나 체제는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신좌파 운동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등 특정한 국가·제도가 아니라 제도와 사회적 규칙 그 자체에 반역을 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복'을 지향했던 것이다.

신좌파 운동이 태동한 것은 서구 자본주의가 가장 활력적인 선순환을 시현하던 시기였다. 신좌파의 변혁 대상인 서구 체제는 표준화된 소비재를 대량으로 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다.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대량생산 체제의 특징인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지루하게 노동했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규모의 임금을 지급받았고, 고용 안정성을 누렸다. 더욱이 체제는 이 같은 생산-소비-분배 시스템에서 튕겨 나오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업, 연금, 의료 등의 부문에서 사회보험 제도를 시행했다.

얼마나 강고한 체제인가!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대중의 동의를 얻어낼 만한 체제가 과연 존재했을까.

그러나 이런 체제에서 신좌파 지식인들이 읽어낸 것은 자본의 톱니바퀴나 '파시스트 돼지'가 되어버린 인간이었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상품을 소비해서 비슷한 일상을 누리는, 지루하고 단조로우며 획일적인 체제, 지식인들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이 체제에 대중들이 순응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신좌파 지식인들은 이 같은 주제를 열심히 연구한 끝에 그럴듯한 해답을 찾아낸다. 그것은, 현재의 방식대로 말한다면, '대중들은 매트릭스(허구)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혁명적 행위로서의 LSD 복용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체제는 스스로를 유지, 재생산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거짓 이미지(매트릭스)를 만들어 대중에 주입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상실하고, 체제가 강요한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대량소비의 주체가 된다. 신좌파들에게 있어, 대중은 체제에 순치된 거짓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억누르게 된 정신질환자들로 간주된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는 경우, 이 정신질환자들은 떼를 지어 억압된 욕망을 기괴한 형태로 분출시킨다.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같은 정신질환은 치유하기가 매우 힘들다. 유아기 때부터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니 뭐니 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체제의 '감시와 통제'를 내화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유아가 '사회화'를 통해 각종 규칙을 수용하며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정신질환의 원인이고, 사회적으로는 타락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敵)은 사회화, 혹은 규칙 그 자체이다. 체제를 변혁하려면 특정한 규칙이 아니라 규칙 그 자체에 맞서 싸워야 하며, 규칙은 억압에 다름 아니다. 규칙과 관행에 저항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멋지고 쿨한 것이 된다.

서구의 극단적 신좌파들이 사회화된 의식을 해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각 체계를 흩트리는 환각제 LSD를 복용하기도 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사유방식

지극히 단순화하기는 했지만, 신좌파의 논리는 이상과 같다. 신좌파의 논리는 한국사회에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하나인 '탈주파'가 전개하는 '노동 거부'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우리는 '노동' 이외의 활동들, 즉 친구들과 혹은 홀로 노래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은 '대가 없는 활동'에서도 충분히 즐거움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체제에서 우리는 자본에 고용돼 노동을 하고 이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예컨대 노동하지 못하는 인간인 실업자는 사회적으로 경시를 받는다. 심지어 노동의 대가인 임금의 크기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권은 기본권이기도 하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라 우리가 온전히 노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위협받게 된다.

이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소박한 요구는 "노동의 권리를 돌려주고, 적절한 고용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범한' 탈주파 지식인들이 보기에 이는 결코 바람직한 방안이 아니다. '탈주파'는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 가운데 유독 '대가를 받는 활동', 즉 '노동'만이 특권화되어 있는 현상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가치 있는' 우리 자신의 활동을 굳이 자본을 통해 가치화할 이유가 없"으며 "자본의 흔적 없는 삶을 긍정하자"고 권유한다.

이 같은 담론은 정말 멋지다. 급진적이고 사회변혁적이며, 위태로워서 오히려 섹시하게 느껴진다. 군데군데 맑스, 혁명, 노동 같은 '빨간' 단어를 삽입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담론은 결국 '자본 관계 외부에서 살아가자' 혹은 '안정된 고용을 꿈꾸지 말고 자신의 삶을 추구하시오'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틀린 말이 아니다. 고용기회가 줄어들면 취업을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안'(?)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거나 '탈주파' 등 자존심 강한 유명 지식인들에게만 가능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장기간 '자본의 흔적 없는 삶', 즉 실업 상태로 살다 보면 노동 이외의 '가치 있는 활동' 따윈 꿈도 꿀 수 없는 팍팍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이런 담론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 효과는 개인적인 위안과 자기기만, 사회현실의 정체일 가능성이 크다. 슬프게도,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 차원에서 승인하지 않을 때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외부를 꿈꾸지 마라?

필자는 얼마 전 <한겨레>에서 매우 슬픈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취업실패와 (취업)사기에 절망하고 6개월에 걸친 동남아 여행을 다녀온 여성이 저자이다. 이 여성은 자신의 경험과 인생관을 이렇게 정리한다.

"자본주의 사이클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이른바 잘 나가는 직업, 원한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클 안에 속해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편해졌다."

그녀는 정말 행복하고 편해졌을까. 사태의 진상은 자기 노동의 가치화를 통해서 자본의 쳇바퀴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한 젊은이가 강제로 자본주의의 주변부로 밀려난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고용 창출력 없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핵심부에서 주변부로 던져주는 불안정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 외부'의 삶을 꿈꾸며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자위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입장에서는 그녀와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이 이와 비슷한 사고를 해야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체질적으로 많은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부와 지위상승을 노리는 의욕적 인간이 지나치게 많으면 이 체제는 지탱될 수 없다. 과격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 외부의 사상'은 이렇게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유지에 봉사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 자본주의의 외부를 꿈꾸게 한 '진보적' 이데올로그들은 자신의 담론을 자본의 사이클에 유통시키면서 그런대로 먹고 살고 있다.

그들의 담론은 "노동의 권리를 돌려주고 적절한 고용대책을 마련하라"고 국가와 정당에 요구하거나 그 방안을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불안정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외부' 담론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집단행동의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노동권은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진보' 담론은 민중의 아편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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