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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냇물! 뛰어라 최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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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냇물! 뛰어라 최성각!"

[화제의 책] 최성각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

최성각은 '소설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소설을 쓰지 않는다. 아니 소설을 쓸 수 없다. 그는 펜으로 소설을 쓰는 대신 몸으로 세상을 쓴다. 최근 그가 펴낸 첫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녹색평론사 펴냄)는 바로 이렇게 몸으로 쓴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성각은 1990년대 초 상계동 쓰레기 소각장 반대 운동으로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그 후 그는 환경운동의 최전선에서 때로는 분노가 담긴 글로, 때로는 성찰이 담긴 글로, 세상을 써왔다. 필요하다면 직접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논, 지렁이, 골목길, 간이역 등에 상을 줘 세상을 깨우는 일도 주도했다.

이런 변화는 최성각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문학이 이런 것이라고 배웠다. "어떤 경우라도 작가는 당하는 자의 편에 서야 하고, 진실을 묵살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고 그들이 감추려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 지금 문학은 그가 배웠던 것이 아니다.

최성각에게 지금 환경운동이야말로 바로 문학이다. "오늘 말없이 능욕을 당하는 대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이고, 자연에 폭력을 일삼는 힘은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고 부추기는 주류 상식이다. 환경운동은 그런 거칠고 조악한 힘들에 의해 비천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다."

소설 쓰기 대신 환경운동을 택한 또 다른 '소설가' 김곰치가 이런 최성각의 목소리에 답하는 글을 보내왔다. <달려라 냇물아>의 서평을 의뢰받은 김곰치는 의례적인 공치사 대신 묵직한 질문이 담긴 글을 보내왔다. 지금 여기서 문학 행위는 무슨 의미인가? <편집자>


최성각 선배님, 얼마 만에 소식을 전하는 것인지요. "달려라 냇물, 뛰어라 최성각"이라고 딴에는 그럴싸하게 제목을 잡아봤지만, 제목과 어울리는 명랑한 글을 쓸 수 있을지…. 사는 이야기, 하소연이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푹 빠져 어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고, 그러다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이 새벽, 최근 발간된 선배님의 산문집 <달려라 냇물아>에서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에도 없었다'는 글을 읽었고, '네팔 여성 찬드라'와 관련된 글 두 편만 읽으면 선배님 책은 완독이 됩니다. 찬드라 이야기는 <녹색평론>에 실렸을 때, 이미 읽었습니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여사에게 비판적 일침을 놓는 '라다크 탐방기'도 그랬고요….

얼마 전의 일입니다. 어느 지면에 제가 글을 썼었는데요, 필자 소개가 '김곰치(소설가)'라고 되어 있었죠. 전라도 광주에 사는 누님이 보시고, '소설 쓴 지 오래 됐는데, 소설가라고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나 봅니다. 어머니가 누님의 말을 전해줍니다. '자식을 일곱, 열 낳아야 어머니고, 자식 하나 낳았다고 어머니 아닌가? 한 번 소설가는 영원한 소설가지…' 이렇게 말했지만, 누님한테 그런 평을 듣는 게 좀 억울하면서도, '그런 말을 들어도 싸지…' 이러기도 했습니다. 소설을 쓴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선배님의 이번 책도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이군요.
▲ <달려라 냇물아>(최성각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어도 소설을 쓰지 않거나 더는 쓰지 못하게 되는 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수십 명이잖아요. 문예계간지의 신인 발굴은 또 어떻고요. 등단 이후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는 이들이 그들 중 몇 퍼센트나 될까요. 물론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는 소설가'라고 해서 찬양할 만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오는 소설은, 줄기차게 나오기는 하는데, 절대 안 읽어! 이런 작가, 동료 또는 선후배 소설가들 리스트가 선배님한테도 있지요? 무기력하고 상투적인 주제 의식을 남발하는 것으로 낙인이 찍힌 작가들 말입니다. 소설이 정말 특별한 존재 의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정말 아끼고 아껴 가치 있는 확실한 작품만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작가의 인생은 '마침내 그것을 쓰고 죽었다'와 '결국 그것을 못 쓰고 죽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극단적인 이 생각이, 본업인 '소설 쓰기'에 부진한 제 자신을 위로하는 말일 뿐인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곧잘 하는 제 다짐인 것은 분명합니다. 언젠가는 그것을 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게 제 (미래의) 소설에 대한 믿음이자 소망입니다. 이미 네 권의 소설집을 발간하고 오래도록 작품 활동에 뜻을 잃은 듯했다가 10여 년 만에 첫 '산문집'을 낸 선배님도 비슷한 각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최성각'이란 이름 석 자는, 1994년 어느 계절에 처음 나타났었지요. 강원도 속초에서 군인으로 있을 땐데, 문학계간지 <작가세계>에 실린 선배님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작가세계>라는 계간지도 처음이었고, 선배님의 소설도 처음이었죠.(어떻게 해서 '마이너' 계간지가 내무반에 뒹굴고 있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주관적 기억일 뿐이고, 소설의 제목도 이 자리에서 명기할 자신이 없지만, 선배님의 단편소설은 제게 '쾅' 하고 다가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심각하고 잦은 환경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나? 이런 소식을 왜 대학 다닐 때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지 못했을까?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사건들을 다 꿰고 있을까?'



제가 읽어본 선배님의 소설은 오직 그 하나뿐입니다. 선배님이 이미 발간한 몇 권의 소설집을 읽고 실망하거나 부정적인 낙인을 찍을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소설가 최성각'은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작가입니다. 내무반에서 읽었던 그 한 작품에서 받은 좋은 이미지를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소설 공부'는 뒷전이 되고, 또 제가 선배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도, 문학판이 아니라 환경운동판이었지요. 이번 책의 머리말에서 선배님은 스스로 "문학판보다 환경운동판이 늘 더 문학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성각 선배님은 '환경운동판'의 대표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시민단체 '풀꽃세상'과 '풀꽃평화연구소' 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환경현장마다 빠짐없이 이름과 말과 행동을 던져오셨습니다. 직책을 맡았을 때는, 책임이 끈질기게 요구됩니다.

저는 여러 현장에 갔다가 개인적인 감동과 깨달음을 글로 썼을 뿐, 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장을 떠나와 제 책상에서 글쓰기가 끝났을 때는, 도시인의 생활로 깨끗이 돌아갔습니다.

선배님이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새만금 갯벌까지 달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죽어도 저렇게 못해…' 하고 그 열성에 감탄했습니다. 선배님은 자신이 쓴 여러 뜨거운 글을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얻은 말글의 깨우침에 미쳐 내 안에서 당장 가장 가능한 최고의 표현까지 어떻게든 내놓고 저는 곧 제가 쓴 글의 세계에서 추방되어버리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님은 훨씬 자기 자신에 정직하고 당당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한때나마 온 마음을 바친 현장이라면, 제게는 천성산이었고, 선배님한테는 새만금갯벌이 아니었는지요. 두 곳 다 대법원의 언어로 현장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정리가 된 듯합니다. 다 말하지 못한 우리의 언어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랜 싸움을 통과하며 인간 관계가 많이 훼손되었고, 우리 자신의 철학과 신념의 가난한 바닥도 보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회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는데, 이제 무엇을 사랑하여야 할까? 올해 들어 내내 고민하고 있습니다. 쫓아다니며 열렬히 주장할 때는 몰랐는데, 나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뭔가 진짜 새로운 글쓰기의 시간이 시작되려 한다는 예감에도 빠집니다. 술로 뇌를 마비시키고, 한밤에 망가뜨렸던 몸이 변함없이 회복되는 것에 감사해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중이랄까요. 그런 중에 선배님의 책이 나왔고, '지난 십여 년 간의 최성각이 이 한 권에 다 담겼구나…,' 하고 애잔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책을 통독하며 뜨겁고 열렬한 작가 최성각을 새로 알게 되었지만, 선배님 책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이 애잔하였던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선배님은 머리말에서 "제 어쭙잖은 체험과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생태적 관점에 의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제 시각은 관견(管見)이고, 알고 느끼고 겪은 것들이 '쉽게' 표현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으며, 비판은 무디고, 분노는 때로 적대감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하고 있으며, 감동과 설득보다는 흥분과 주장이 앞서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운동과 글쓰기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기보다는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불필요한 상처만 주고받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 몇 번 눈길이 맴돌았습니다. 운동과 글쓰기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반성은 좀 더 개인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아무려나 현실에서 우리의 운동은 하나같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이제 와 정말 '글쓰기'가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천성산과 새만금 갯벌에 걸었던, 거꾸러진 꿈과 소망, 그러나 그 대상이 산과 갯벌로 명명되지 않더라도, 다시 꿈을 일으켜 세우고, 활활 타오르도록 불질러버리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 아닐까. '작가 최성각'이 환경운동판에 있었기에 빤한 소리가 좀 덜 나오고, 빤한 소리를 하는 인사들도 눈치를 보고 입을 좀 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술술 잘 읽히는 선배님의 활달한 에세이들이 있어 환경운동판의 독서가 덜 삭막했습니다. 선배님의 등에 부리를 대고 있는 거위 두 마리, 책 표지에 실린 사진 말입니다, 이런 정경의 창출은, 그 정경이 가진 의미를 정확한 표현해내는 언어적 성취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미돼지의 젖꼭지 수를 넘어선 돼지새끼의 출생, 강에 버린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밤길을 달린 '작은 아이 최성각'의 사건과 선명한 그 기억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번 책의 백미였습니다.

선배님, 제가 문학판의 후배고, 선배님은, 선배이지 않습니까. 바라건대 식고 갈라진 제 가슴에 불 좀 질러주십시오. 동업자라고 질투하는 마음 하나도 들지 않도록, 완전히 제압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십몇 년 환경운동판 이력을 폭발시키는 이야기 좀 써주십시오. 이 어려운 시대, 새로운 언어가 누구한테 나오겠습니까. 시인, 소설가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선배가 좀 해주십시오. '작가 최성각이 환경운동에 매진해온 십몇 년 만에 녹색평론사에서 산문집을 내었다', 이 한 문장으로 <달려아 냇물아>에 대한 설명은 족합니다. 환경운동판에서 선배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찬찬한 회고와 성찰의 독자가 되기만 해도, 책의 소임은 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달려라 냇물아>를 통해 우리 모두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책을 덮고 함께 설득력 있는 새로운 꿈을 용감하게 꾸어야 합니다. 선배님이 해주세요. 거위와 돼지새끼 이야기에 담긴 사람과 자연사물 사이의 안타까운 사랑이 보다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신비롭고 타당한 이야기를 고대해봅니다.

지난 시간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였다고 물러나 앉을 시간은 아닙니다. 선배님은 길 위에 여전히 있습니다. 달려라 냇물, 뛰어라 최성각입니다. 선배님이 '마침내 그것을 쓰고 죽는 작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시대 훼손된 꿈의 본능을 작가들이 나서서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만나면 선배님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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