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대동하고 타국으로 이주해 간 사람은, 일단 그곳의 지배적인 종교와 문화 앞에서 이방인으로서 조심스럽게 지내게 된다. 굴러들어 온 낯선 돌로서 상당한 시간 동안 우선은 박힌 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점차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낯선 돌들의 밀도가 높아지고, 한두 세대 지나게 되면서, 그들에게는 문화적 표출을 계속해서 자제하기보다 적절한 표현을 동반한 '문화 간 공존'의 논리가 더욱 더 절실해진다. 내 문화를 어느 정도로 드러내야 박힌 돌들이 불쾌하지 않을지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하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기에 이 과정은 불가피하게 갈등과 충돌의 출현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 종교 사원 건축 놓고 독일식 '보혁갈등'
사회학 개론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러한 진술의 생생한 사례가 지난 주말 서유럽의 교통의 요지이자 독일의 주요 대도시 가운데 하나인 쾰른에서 발생했다. 이방종교가 새로이 '문화 간 공존'을 요구하며 자신의 문화의 표출 강도를 높이려 들자 토착문화의 담지자들이 상이한 반응을 보이면서 서로 충돌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기에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원래 쾰른은 독일 내에서도 타문화나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수준이 매우 높은 곳이다. 동성애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만의 모임 장소들도 공개적으로 발달해 있다. 심지어 연례행사로 동성애자 퍼레이드도 대규모로 개최된다. 이런 쾰른에는 약 12만 명의 이슬람계가 거주하고 있다. 전체 시 인구의 약 10분의 1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쾰른에는 유서 깊은 쾰른 대성당의 존재가 상징하듯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톨릭이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쾰른의 터키계 이슬람 거주자들은 이 도시에 대규모의 '이슬람 종교 사원'을 건축할 것을 추진했고, 쾰른 시가 이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쾰른 시 내에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인 '프로-쾰른(Pro-Koeln)'은 시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우리 자녀들이 겪을 문화적 혼돈을 막는다"는 취지로 지난 주말(16일) "용기 있는 시민들의 행동"을 촉구하며 시위를 조직했다.
우파 성향이 짙은 단체가 이러한 행동을 조직하자 이에 맞서 상대적으로 좌파 성향의 단체들은 거의 동일한 장소에서 '맞시위(Gegen-Demonstration)'를 조직했다. 이들은 이슬람 사원의 건립을 막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프로쾰른과 같은 "인종주의자" 내지 "신나치(Neo-Nazi) 성향의 극우단체"야말로 시민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를 빌자면, 독일식의 '보혁갈등'이요, 남남갈등이 아니라 '서서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는 사건이 이렇게 해서 지난 주말 쾰른 시가지를 장식했다. 오스트리아의 극우보수당 FPÖ의 당수인 슈트라헤도 프로쾰른이 주관한 행사의 연사로 나서, 우익 간의 국제적인 연대를 공고히 하면서 프로쾰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프로쾰른의 지지자들은 당일 시내에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과정에서 약 100여 명이 연행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일단 극우파 단체의 지지자들은 수적으로 소수였고, 대체로 맞시위를 주도한 단체들이 평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수를 차지했다.
노조-기독교가 손잡고 이슬람 사원 건설 지지
이날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대로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짚고 싶다. 우선 독일인들 가운데 이슬람 사원 건립의 찬성을 위해 귀한 주말 시간을 내서 시위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들은 마치 "당신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신념의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그것에 맞서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선언한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명언을 집단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그리 고명한 지식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과 심지어 청소년들이라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맞시위'를 주도한 단체들의 핵심에 노동조합과 기독교 교회가 있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독일 노동시장에 평등과 정의를 불어넣는 일을 주도적으로 벌이는 노조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차별을 맞서기 위해 이렇게 시민들에 동의를 구하는 정치적인 시위를 조직하기도 한다. 이는 물론 이들이 평일에 파업을 벌이는, 강도 높은 수준의 노사관계상의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노조의 본업(?)을 벗어난 정치적 행동이다. 노동조합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노조가 사회평등과 정의를 향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독일 노조는 잘 알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노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독일 교회의 호응은 더욱 놀랍다. 이슬람 사원의 건립을 교회가 옹호하고 나서다니! 쾰른 대성당과 같은 유서 깊은 세계적인 문화재가 시내의 중심에서 기독교적인 통합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는 도시에 거대한 이슬람 사원이 함께 건립된다는 것은 기독교 중심적인 세계관을 깊이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요 껄끄러운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편협한 자종교 중심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독일의 기독교는 공존과 소통을 지지하는 선택을 기꺼이 하며 시민단체들과 뜻을 같이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고 문화는 소통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장엄하게 서 있어 온 기독교의 상징물 곁에 오늘부터 이슬람의 상징물이 나란히 선다고 해도 이를 행여 기독교의 패배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가 지니는 관용, 수용 내지 겸양의 정신이 승패를 떠나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그러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차원 높은 기독교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야말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소통 위해 우리 안의 벽부터 깨자
세계화 시대에 문화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다문화적인 정체성을 키워나가며 그 가운데 '문화적 관용'의 수준을 높이는 작업은 어느 나라든지 평화롭고 합리적인 공동체로서 21세기의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에 있어 점점 중요한 덕목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자문화의 정체성이 침해받지 않으면서 공존의 경계를 설정하는 작업이 과연 어디까지가 될지에 대해서는 획일적인 답은 없다. 이때 최선은 문화적 소통과 공존의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진행하며 폐쇄적 우월의식을 지양하는 작업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일이고, 그럴 때 보다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답이 찾아질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쾰른에서 발생한 작은 '문명의 충돌'이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인 이유는 그만큼 독일사회와 독일 기독교가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의 성향이나 한국인에게 내재된 유교 문화권의 문화적 속성상 과연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발생했을 때 어떠한 반응으로 드러날까? 혹자는 아직 우리는 유럽만큼 문화의 공존과 더불어 살아가기의 필요를 그다지 크게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준비가 덜 되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수동적인 변명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영양가 있는 태도가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 것'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것'인가? 문화적 다양성 속에 기회의 평등과 사회정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과연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것을 지탱할 힘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가? 이러한 새로운 도전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로운 조치를 지금부터 취한다면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은 앞으로 점점 더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최근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의 폐지 문제를 놓고 우리 안에서 진지한 논란이 진행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성찰하고 유연화하는 긍정적인 노력이라고 보인다. 나치즘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방불케 하는 국가주의 이념은 지난 수십 년간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 안에 소름끼치도록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유사의례적인 행위를 사회화과정에서부터 반복시켜 우리 안에 획일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심어 놓았다. 공교육이 이러한 유사종교행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사회통합을 지속하겠다면 이는 다문화 사회를 준비하는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먼저 종교화된 국가주의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문화의 의미를 세계관이나 체제이념의 수준으로까지 확대해석한다면, 냉전시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이 정면충돌하여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이고 반세기 이상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하여 아직까지도 체제간의 화해를 이루지 못한 우리야말로 또 다른 의미에서 '문화의 충돌'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 셈이다. 체제와 이념의 충돌이 거의 두 세대 가까이 진행되면서 이제는 자본주의 문화와 공산주의 문화가 남북 모두에서 사람들의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고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다보면 금세 이질성을 느낄 것이다. 이미 한국에 상당 수 이주해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북한식 사투리만도 우리 사회에서 그들을 이방인으로 배제시키는 문화적인 코드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가장 지배적인 시각은 제발 전쟁의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 소통이성이 비무장지대로부터 꽃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한과 북한의 공론장 모두 공개적으로 상대방의 체제이념을 추종하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은 절대 금기시 되어 있다. 그러나 정녕 통일을 생각한다면, 양자 모두 반세기동안 경직되어 발전해 온 체제이념을 보다 유연하게 재구성하며 지혜로운 사회통합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사회통합이 동반되지 않는 정치경제 통합은 오래 못갈 것이 분명하며 통합은 그 이전에 공존이라고 하는 기초 작업이 다져져야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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