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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 그 참을 수 없는 시대착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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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 그 참을 수 없는 시대착오성

인권·청소년단체 "국기법 시행령 제정 중단해야"

최근 행정자치부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수정해 시행령으로 제정하겠다고 발표한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애국조회' 등에 참석해야 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법으로 정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제까지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무총리 지시로 이어져 왔다.

전국 90여 개 인권·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반대하는 인권·사회단체'는 11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양심을 획일화하고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다문화·민주화 사회에 '국기에 대한 맹세'도 같이 간다?
▲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반대하는 인권·사회단체'는 11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프레시안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는 수정이 아니라 폐지가 마땅하다"며 "양심의 자유 및 인권을 침해하는 시행령 자체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발상"이라고 밝혔다.

자신을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라고 밝힌 김태정 씨는 "어제 6.10 항쟁 기념행사를 참 요란하게 하더라"며 "그렇지만 민주화가 뭔가.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못 외우면 벌을 세우는 지긋지긋한 군사독재 정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아직도 경례와 맹세를 강요하는 이런 나라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우삼열 사무국장은 "이주노동자 42만 명, 이주인 100만 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라며 "조만간 이주인 2세 자녀가 150만 명이 넘을 거라는 분석은 우리가 다양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우 국장은 "이런 시대에 삶의 방식이 존중되려면 전체주의와 군사주의의 잔재가 사라져야 한다"며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강요받는 이주인 자녀들이 느끼게 될 심정을 생각해보라"고 밝혔다.
행자부 "시대 흐름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맹세 수정할 것"

'국기에 대한 맹세 논란'은 지난 1월 제정돼 오는 7월 27일 시행을 앞둔 '대한민국 국기법' 때문에 일고 있다. 국기법 6조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는 선 채로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편 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하거나 거수경례를 한다"고 명시돼 있으며 "그 밖에 절차 및 방법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

지난 4월 행자부는 국기법 시행령안을 입법 예고하며 여기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시행령안 4조 1항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 중 애국가를 주악하지 않는 경우에는 맹세문을 낭송한다"고 명시돼 있다.

행자부는 이어 지난 5월30일 기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미래지향적인 견지"에서 수정하겠다며 3가지의 예시문을 발표했고 지난 8일 인터넷을 통한 의견수렴절차를 마무리했다.

제시된 예시문들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등으로 기존 맹세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과 형태를 띄고 있다.

행자부는 "새로운 맹세문을 담은 '국기법 시행령'을 7월 중에 제정 및 공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애국 강요한 이 치고 평화로운 세상 만든 이 없더라"
▲ '청소년이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에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청소년들 ⓒ프레시안

또 이 자리에서는 1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연명한 '청소년이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낭독됐다.

선언문에서 이들은 "시행령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집어 넣는다고 하는 소리는 청소년이 아닌 사람이 듣기에도 징글맞지만 청소년들에게는 더 징글맞게 들린다"며 "이 사회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애국'을 부려먹기 편하다는 이유로 강요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 더 강도높은 '애국'을 해봤자 자신의 인간성을 국가에 뺏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히틀러, 히로히토, 무솔리니, 박정희, 예로부터 애국을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분들 치고 평화로운 세상 만드신 분은 없었다"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하고, 더 많은 생산을 해야 하는 도구로 취급했던 분들은 언제나 '애국'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역사를 보면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보고 희생시키는 사회는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우린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밝혔다.

인권침해적 법령 제정 움직임, 인권위가 나서야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인권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곧이어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해 면담을 가졌다. 인권침해적 요소가 다분한 '국기에 대한 맹세 및 경례'를 시행령으로 지정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인권위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현재 인권위는 "시행령에 처벌 조항이 있을 경우에만 대응하겠다"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인권사회단체들은 "물론 현 국기법과 국기법 시행령안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거부했을 경우 처벌하거나 제재하는 조항이 삽입돼 있지는 않다"며 "그러나 형법, 국가공무원법 등 다른 법과 연계시켜 처벌하거나 학교 재량권을 명분으로 퇴학이나 불합격 처분을 하는 등 제재조치가 가해진 사례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해 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성명서에서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가 올해 초 법률의 지위로 옷을 갈아입더니 이제는 '국기에 대한 맹세'마저 법률의 지위로 격상돼 강제될 지경에 놓였다"며 "문구 몇 자를 손질한다고 해서 '국기에 대한 맹세'의 본질적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은 "박정희 유신체제와 함께 전 국민의 일상으로 파고든 맹세는 국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해 온 주문이었다"며 "국가의 명령을 통해 양심을 획일화하고 애국을 강요하는 교육은 애국심을 높이긴 커녕 오히려 청소년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의 범죄를 정당화해줄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진작 솎아냈어야 할 일제와 유신의 잔재이자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미래지향적으로 수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쌍두마차의 다른 한편에 자리잡은 국기에 대한 경례 역시 이참에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인권위에 대해 △국기법 시행령, 시행규칙 개정안에 대한 권고와 의견표명 촉구 △행정자치부와의 정책협의 △7월초 국무회의 출석과 발언 등을 요구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는 국내법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인 규약상으로 어떤 문제가 있을까. 이날 인권사회단체들은 인권위에 '긴급 대응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국기법 및 시행령안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낱낱이 지적했다.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침해 : 신사참배와 함께 강요됐던 황국신민서사와 다름없는 일제 잔재라는 판단, 애국심을 강제나 훈육을 통해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교육적 양심 등 다양한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거부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럼에도 법을 통해 국기에 대한 존중과 애호를 의무화하고 강제하는 것은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8조(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와 대한민국 헌법 19조(양심의 자유), 20조(종교의 자유),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14조(아동의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 :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에 따르면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떤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되며, 국가 내지 국가의 상징을 비판하거나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벌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육권 침해 : 학교 현장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강제하는 것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2조(비차별)와 13조(교육에 대한 권리), 교육기본법 4조(교육에 있어서의 차별금지)와 12조(학습자의 기본적 인권 존중)을 위반하게 되며 특히 아동의 권리에 대한 협약 2조(비차별)와 28조(교육권), 29조(교육목표)에 대한 위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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