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국가의 공공적 역할을 지키면서도 시장개방을 통해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주장했고, 반대 진영은 공공서비스 분야가 개방되면 한국 사회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부가 교육, 의료 등 핵심적인 공공서비스 분야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의 핵심이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자동차, 개성공단, 농산물 등 상품 관세와 관련된 분야와 투자자-국가 제소제(ISD) 등으로 옮겨갔다.
미국도 한국의 의료와 교육엔 관심이 없다고 화답하면서 공공성 침해 비판을 피해 갔다.
'공공서비스 요금이 폭등한다'는 괴담?
협상이 개시된 지 10개월 만에 한미 FTA가 타결됐다. 공공서비스를 지켰다며 정부의 홍보 공세가 대단하다. 교육, 의료뿐만 아니라 통신, 전력, 가스 등 기간산업의 외국인 소유제한도 현행대로 유지됐다고 자랑하고 있다.
"'한미 FTA 체결되면 영리병원이 몰려들어와 의료비가 폭등할 것'이라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후사정을 살피지 않는 걱정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계는 한미FTA 협상 대상이 아닙니다. (…)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를 모두 개방하면 요금이 폭등한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유언비어입니다. 공공서비스는 개방 대상이 아닙니다."
한미 FTA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 정부가 중앙일간지 광고에 실은 '괴담편'에 나온 내용들이다.
기세등등한 노무현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대국민 담화에서 "법률, 회계 등 서비스 시장에 대해 좀 더 과감한 개방을 하라고 지시했는데 교육, 의료 시장의 경우 전혀 개방되지 않았고, 문화산업도 크게 열리지 않았다"며 서비스 분야 협상 결과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선일보>도 "의료·교육, 문 닫아걸면 퇴보뿐이다"라는 사설로 대통령을 지원했다.
공공서비스 시장 개방?…한미FTA 필요 없다
과연 대통령은 서비스분야를 개방하겠다는 애초의 의지를 꺾은 것일까? 그래서 한미 FTA가 타결됐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서비스는 지켜진 것일까? 이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정부는 지금까지 서비스산업 개방을 위해 '한미 FTA 경로'와 '자진개방 경로'라는 두 가지 트랙을 밟아 왔다. 한미 FTA에서 의료와 교육이 협상대상에서 조기에 빠진 것은 굳이 논란이 되는 한미 FTA틀을 통하지 않고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자진개방 경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의장으로 있는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지난해 6월 작성한 문건 '서비스산업의 현황 및 발전전략'에 따르면, 정부는 처음부터 "한미 FTA에서 미국이 의료 분야를 협상 의제로 제기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기존 FTA에서 의료시장을 논의 대상으로 한 적이 없고, WTO(세계무역기구) DDA(도하개발아젠다) 협상 등에서도 의료서비스 문제를 한국 측에 쟁점으로 제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의료시장 개방에 별 관심도 보이지 않았는데, 노 대통령 혼자 한미 FTA를 통해 의료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통하지 않고도 의료시장을 개방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그런 개방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민경제자문회의 문건은 "정부는 한미 FTA와 별개로 의료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개방 및 경쟁 도입을 검토"해 왔다고 나와 있다.
의료시장 개방은 'FTA 개방' 대신 '자발적인 개방'으로
정부가 자진해서 의료시장을 개방해 온 사실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과 보건의료단체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돼 왔다.
의료시장 개방의 통로는 '경제자유구역(economic free zone)'이다.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이 제정되면서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외국자본이 영리병원을 설립하는 것이 허용됐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우려가 제기됐지만, 정부는 '진료 대상이 외국인에 한정되므로 국내 의료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크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물론 이는 의료시장을 여는 첫 단추에 지나지 않았다. 이 법이 제정된 후 의료시장 개방의 수위는 계속 높아져 갔다.
2005년 외국병원이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 이와 관련해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국회 연설에서 해외원정 진료비가 연 1조 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외국병원이 내국인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노 대통령의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났다. 2006년 정부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해외 의료지출비가 연간 최고 518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보다는 후하게 관련 액수를 추산한 공공기관의 추계를 보더라도, 1300억 원(보건산업진흥원)이나 2000억 원(한국은행) 수준이었다. 의료시장 개방과 관련된 진짜 괴담은 노 대통령이 유포한 '1조 원 괴담'이었다.
2006년 의료시장 개방은 제주도특별자치도법 제정을 통해 또 다시 확대된다. 제주도는 경제자유구역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던 의료 광고와 의료기관 부대사업이 허용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현재 의료시장 개방을 더욱 심화시키는 내용의 법안을 심의 중이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제출한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은 외국병원 설립 요건을 기존 '외국인'에서 '외국인이 50% 이상의 지분을 출자한 외국인투자 기업'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굳이 병원 자본이 아니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은 단순한 지분 참여를 통해 의료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국내 대형병원들도 이들과 손잡고 사실상 영리법인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이밖에 이 개정안에는 외국병원이 호텔, 온천 등 부대사업을 해도 된다는 '보너스'까지 포함돼 있다.
이 정도면 경제자유구역, 제주도특별자치도를 통한 의료시장 개방은 성공적으로(?) 완료된 셈이다. 공적 건강보험제도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완전 시장의료 체제'가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것이다. 현재 인천에서는 뉴욕장로교 병원이, 부산에서는 하버드대 병원이 개원을 준비 중이다.
개방 거점 확보→전국적인 확대
이제 의료시장 개방론자들에게 남은 과제는 경제자유구역과 특별자치도 등 시장개방 거점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인천, 부산, 광양, 제주도에 이어 전국이 경제자유구역이나 특별자치구로 전환되기만 하면 된다.
경제자유구역으로 선정되기 위해선 국제공항, 국제항만, 광역교통망, 정보통신망 등 기반시설을 갖추면 된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국제공항은 인천, 김해, 제주, 청주, 대구, 광주, 양양, 김포(예비국제공항) 등 8개로 전국의 주요도시를 거의 포괄하고 있다. 또 항만법에 정해진 무역항인 국제항만의 개수만 무려 28개이다.
국제공항과 국제항만이 포괄하는 지역의 범위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하여, 경제자유구역은 연계지역 등으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거점지역 확대를 통한 의료시장 개방 전략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외경제위원회 회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전면적 개방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경제자유구역, 제주국제자유도시, 기업도시 등을 서비스시장 개방의 시금석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상기 지역들에 대한 개방성과와 문제점 분석을 토대로 개방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갈 필요"(강조는 인용자. '제3차 대외경제위원회 회의 안건', 2004. 12. 16).
교육시장도 '자발적인 개방'의 소용돌이에
교육시장도 의료시장과 유사한 길을 밟고 있다. 현재 학원 등 성인교육 시장은 사실상 개방돼 있는 상태다. 아직 수익성이 충분치 않아, 외국인이 국내에 설립한 외국학원의 규모가 작을 뿐이다.
경제자유구역법과 외국교육기관설립운영특별법에 의해, 공교육 시장도 이미 경제자유구역과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개방돼 있는 상태다.
2006년에는 송도국제학교가 착공됐고, 내년에 개교될 예정이다. 이 학교에는 내국인 입학은 물론이고 입학 시 한국의 학력도 인정된다. 단, 원래는 이익금 해외송금이 가능한 사실상의 영리법인으로 추진됐다가, 국회 심의 과정에서 형식상으론 비영리법인의 성격을 띠게끔 변경됐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국내 대학설립 규제완화(예: 영리법인 학교 설립 허용)와 연계해 영리법인 외국학교 설립을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는 국민경제자문회의 문건에서 확인되듯, 교육시장도 의료시장의 '자발적인 시장 개방'의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고 있다.
의료와 교육만 공공서비스인가?
공공성이 요구되는 분야는 사실 의료와 교육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이란 '필수 서비스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원리'를 의미한다.
시장이윤 논리에 의해 사회 구성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필수 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제약될 때 우리는 '공공성이 훼손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의료와 교육이 돈벌이 수단이 돼 저소득 계층이 이용하기 힘들어 질 때, 자본 투자자들이 기간산업을 장악해 교통, 전기, 가스, 통신 요금이 비싸질 때, 투자자와 사주가 각각 문화와 언론을 장악할 때, 다국적 자본이 먹을거리를 좌지우지할 때, 그리고 부동산 정책과 조세 정책 등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이 공정하지 못할 때, 공공성은 훼손이 된 것이다.
한미 FTA가 심각한 공공성 침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세 분야 손익도 따져 봐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할 공공성이 이미 위험 수준에 있는 지금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한미 FTA의 핵심이다.
정부는 통신, 전기, 가스 등에서 각각 49%, 40%, 30%의 외국인 지분 제한이 유지됐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앞으로 공공사업 분야에서의 외국인 지분 제한이 결코 이보다는 높은 수준으로 강화될 수 없다는, 이른바 '래칫(ratchet) 효과'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다. 지난 수년간 확대되어 온 기간산업 외국인 소유 몫이 커질 일만 남은 셈이다.
공공성이 훼손되는 분야는 이외에도 많다. 의약품, 지적재산권, 시청각·미디어, 농산물·쇠고기, 투자자-국가 소송 등 많은 분야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투자자의 이윤을 위해 지금보다 더 높은 공공서비스 비용을 지불하거나 아예 공공서비스 이용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특히 투자자-국가 제소제의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난 12일 '한미FTA 제2차 장·차관 워크숍'에서는 전윤철 감사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한다. 투자자-국가 제소제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감사원장을 향해 "북미자유무역지대 창설 이후 13년 동안 투자자-국가 소송에 의한 보상액이 3000만 달러 정도라면 피해가 거의 없는 것 아니냐"며 똑똑한(?) 대통령이 질책했다는 것이다.
소송 대리인에겐 법정에서 다루어진 3000만 달러만이 관심의 총액일 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국가 정책에 미칠 총체적인 '위협 효과(chilling effect)'에 주목해야 한다. 소송에 이르기도 전에 포기되는 국가의 공공정책, 그로 인해 일그러질 우리 사회를 보아야 한다. 변호사들이 모임이 아니라, 대통령이 참가하는 장차관급 워크숍이라면 말이다.
한미 FTA, 진보진영의 실험 공간마저 축소한다
한미 FTA로 말미암을 공공성의 훼손은 서민 생활이 파괴되는 데 대한 현실적 문제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진보 진영에게는 사회운동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이윤 원리를 전면화하는 운동이라면, 반(反)신자유주의 운동은 시장이윤을 넘어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가는 운동, 즉 사회공공성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공공적 영역에서 시장이윤이 아닌 새로운 사회운영 원리를 실험하고 대중에게 검증을 받는 대안운동이다.
사회공공적 분야가 자꾸만 축소된다는 사실은 진보 진영이 검증할 실험의 가능성 역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가 추진하는 공공서비스 상업화를 막으면서 동시에 현행 공공부문을 혁신해 새로운 대안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지금 진보진영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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