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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속 협상으로 모자라 졸속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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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속 협상으로 모자라 졸속 대책?

[한미FTA 뜯어보기 463 : FTA 현미경&망원경(3)] 김현종의 "혁명적 농업대책"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최근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응해 "혁명적인 농업 대책을 만들겠다"고 발언했다. 그런데 혁명적인 농업 대책이란 무슨 뜻인가?

21세기 이후 선진국의 농업 정책은 크게 '미국형'과 '유럽형'으로 나뉜다. 지난 몇 년 간 형성된 미국형 농업 정책의 가장 큰 축은 유전자조작(GM) 농법 및 화학적 농법에 의한 대량생산이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조 축으로 중남미 유기농업 부문에 계속해서 자국의 농업자본을 진출시키고 있다. 그래서 쿠바와 코스타리카를 제외한 중남미 국가들에서의 유기농은 실제로는 '노예농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농업 정책 '미국형' vs. '유럽형'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언급한 '혁명적인 농업 대책'은 이같은 미국의 농업 정책에 맞선 유럽 국가들의 대응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럽형 농업 정책을 선도하는 중심 국가들로는 스위스와 영국이고, 독일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유럽 국가들에서 자신들만의 농업 보호 정책이 나오는 것은 미국식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유럽 소비자들의 반대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WTO(세계무역구제) 체제가 허용하는 수준에서 자국 농업에 대한 보조금을 늘려나가고 있다.

몇 가지 실증분석에 따르면, 영국 농가의 수익금 절반이 영국 정부의 보조금이라고 한다. 사실 미국 농가의 수익 역시 절반은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금이라는 보고도 있다.

미국형이니 유럽형이니 말은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이런 구분에는 세계 최고의 농업 경쟁력을 자랑하는 미국 농업에 대응해 자국 농업의 근간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한 유럽 선진국들의 몸부림이 반영돼 있는 것이다.

농업 문제는 '사회적 지지'의 문제

미국과 유럽의 농업 전쟁은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택권과 공공보건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한 축을 형성하고, '어떻게 자국의 농업 보조금은 유지하면서 상대국의 보조금을 없앨 것인가'가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서든 유럽 국가들에서든 농업은 이미 산업 측면의 기계적인 논리를 벗어나 그야말로 '어떻게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를 이끌어낼 것인가'의 문제와 더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업의 생태적 기능 △농업의 사회적 일자리 창출 △WTO 체제에서 최근 각광받고 있는, '지역경제에 대한 기여' 등이 각 나라의 농업 정책을 움직이는 최근의 논리들이다.

선진국형 농업 대책, 우리나라에서 먹힐까?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어떤 방향의 농업 대책을 생각했기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형이든 유럽형이든 우리나라에서는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농업 대책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유전자조작 식품의 유해성 등 식품안전(food safety)에 대해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갖는 민감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들과 비교하면 사실상 제일 낮은 수준이다.

스위스가 3년 이상 미국과의 FTA 협상을 진행하다가 결국 국민투표를 통해 협상을 정지시킨 것도 바로 이 유전자조작 식품의 유통 금지와 관련된 한시적 조치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도 데프라(DEFRA, Department of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라는 전문 부처를 통해 환경과 식품, 그리고 농정을 조율하고 있다. 이는 영국 농업을 광우병이라는 치욕에서 어떻게든 탈출시키고자 하는 영국 정부의 노력의 일환이다.
▲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연합뉴스

게다가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농업 보조금에 대해 '쓸데없는 지원'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정부가 119조 원의 투융자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 돈이 농업 보조에 지출된 적은 거의 없다.

선진국의 기준에 따르면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실제적인 지원은 1조 원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정부가 연간 10조 원을 농업에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농업에 119조 원이라는 돈이 지원됐다면, 지금 농촌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수도권에 나와 있을까?

일각에서는 농업에 대한 쓸데없는 보조로 농민들 사이에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발생해 연간 10조 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 도덕적 해이 때문이라도 읍면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가 관찰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읍면 규모도 유지하기 어려운 곳이 태반이고, 농촌 지역의 학교는 수백 개 이상 추가로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다. 늘어나는 것은 부재지주(absentee landlord)이고, 부재지주가 되기 위해 몰래 농촌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농지 투기꾼밖에 없다.

우리 농정이 무조건 잘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물론 이렇게 된 과정에서 우리나라 농정이 잘못한 것도 없지는 않다. 그들은 국민들과 소비자들에게 왜 그들의 세금이 농업에 들어가야 하는지 적절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 이 세금으로 공익, 국토 생태 등 여하튼 무언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점도 입증해 보이지 못했다.

단지 '신토불이'라는 이유만으로 농약에 범벅이 된 '우리 농산물'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 소비자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우는 브랜드화라는 명목으로 가격만 잔뜩 높아졌지, 정작 항생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유기축산' 비율은 1퍼센트도 안 된다.

이런 소비자들의 불만이 한미 FTA에 대한 지지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농정 담당자와 농업 지도자에게는 뼈를 깎는 고통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정작 한미 FTA 농업 분야의 협상을 총지휘했던 민동석 농림부 차관보에게서는 이 뼈를 깎는 고통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정부의 대책은 오로지 '농업 보조금'…믿을 수 있나?

광우병에 대한 1차적인 대응도 하지 않은 것, GMO(Gener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조작식품)라는 단어가 부정적 이미지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제 LMO(Living Gener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변형유기식품)라는 이름으로 유전자조작 식품에 허술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 이상한 계산 방식으로 부문별 농업 피해액을 산출해 내는 것 등 정부의 수많은 잘못들은 이미 지나간 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한미 FTA에 대한 농업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을 보면, 과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한 '혁명적인 농업 대책'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아연실색하게 된다.

'개방으로 인해 큰 피해가 예상되는 주요 작물들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현재 정부가 가장 전면에 내놓고 있는 농업 대책이다. 이는 '가격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농업 보조금은 크게 보면 가격 보조금과 생활 보조금이 있다. 생활 보조금은 농산물 물량이나 가격과 상관없이 농민에게 지급되는 돈으로서, 이는 지역 경제정책 혹은 일반적 후생정책에 해당하기 때문에 WTO 체제도 인정하고 있다.

'지역농업'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는 유럽과 미국이 동시에 '직불제'라는 새로운 방식에 열광하는 것도 이 제도가 WTO 체제와 호환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농산물 가격과 연동된 보조금, 예를 들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는 경우에 지급되는 긴급 보조금은 앞으로 4~5년 후 WTO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즉, 한미 FTA가 발효돼 수입관세가 상당히 낮아진 4~5년 후에도 WTO 체제가 이런 보조금을 인정해줄지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앰버 박스? 블루 박스?…정부는 이게 무슨 뜻인지나 알까?

가격 보조금이 WTO 체제에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농업 정책인 '그린 박스(보조금 허용 정책)'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가격 보조금이 언젠가는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돼야 할 '앰버 박스(보조금 '절차적 철폐' 정책)'에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당분간은 보조금 지급이 허용될 가능성이 있는 '블루 박스(보조금 '잠정적 허용' 정책)'에 들어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WTO 체제의 보조금 정책>

그린 박스 - 보조금 허용 정책
블루 박스 - 보조금 잠정적인 허용 정책
앰버 박스 - 보조금 점차적 철폐 정책
레드 박스 - 보조금 철폐 정책

물론 앰버 박스와 블루 박스의 기준이 애매하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 WTO 농업 다자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선전하는 '가격 보조금'을 블루 박스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세밀한 많은 단서 조항들을 단 정책 프레임워크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정부가 지금처럼 그냥 "가격이 떨어지면 도와주겠다"고 해서는 우리의 농업 보조금 정책은 앰버 박스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지금 농업에 대한 혁명적 대책을 만든다면서 앰버 박스에 들어가게 생긴 대책을 그 핵심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과연 WTO 협상 과정의 다양한 조문 체계를 제대로 검토나 하면서 한미 FTA 협상에 임했는지 의심조차 든다.

정부는 양자협약은 물론 다자협약도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진다. 하지만 정부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면, 정부가 현재 내놓고 있는 많은 대책들이 국민 설득, 국회 비준 통과, 조약 발효 때까지만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정작 FTA가 발효돼 실제로 운용되는 단계에서는 WTO 분쟁소송을 당할 위험성 때문에 사용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졸속 협상'으로도 모자라 '졸속 대책'?

외교통상부는 이미 WTO 협상에서 일본은 물론 다른 선진국이 전부 집어넣은 학교급식 예외조항 한 줄을 집어넣지 않아서, 학교급식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각 지방자치단체들의 학교급식조례에 행정소송을 걸고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승소한 '자랑스러운' 전력이 있다.

만약 정부가 내놓은 한미 FTA 수입피해 농가에 대한 지원 대책이 WTO '앰버 박스'에 해당되어 곧 폐지돼야 한다면, 우리는 4~5년 후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린 박스(보조금 허용 정책)'를 중심으로 농업 대책을 세우고, 그린박스보다는 못하지만 엠버 박스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블루 박스'로 이를 보조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아예 엠버 박스의 정책을 끄집어내 이걸 농업 대책이라고 내놓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FTA는 세계화 시대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정부의 홍보 공세는 자신들만의 통치 방식이자 직무 범위라고 하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WTO의 앰버 박스, 블루 박스, 그린 박스 등과 관련된 정책 목록과 이같은 정책 분류에 함의된 기본 정신이라도 파악한 후 국내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정부는 급하게 했던 협상만큼이나 대책도 급하게 만들고 있다. 살얼음판에서 썰매 타면서 즐거워하는 어린이처럼 불안해 보여 지켜만 보고 있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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