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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때 가장 잘해준 군인? 중공군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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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6ㆍ25 때 가장 잘해준 군인? 중공군이었지!"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16〉'미군 민간인 학살' 기사를 접하며

필자의 모친은 함경도에서 태어나 강원도 철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한국전쟁 전에 월남해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분이다. 철원에서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징용과 징집을 피해 함경도로 들어갔다가 첫딸을 낳은 외조부는 일제가 패망하기 얼마 전 철원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서기로 일했다.
  
  38선 이북을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공산당 세상'이 들어선 얼마 후 그는 외조모와 둘이서 대여섯 살이던 필자의 모친을 큰집에 남겨놓고 월남했다. 젊은 시절부터 성실하고 근면했던 외조부는 공산당에 의한 체포나 고문 같은 모진 일을 당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친일파들이 숙청당하는 '새 세상'에서 '일제의 최하위 집행인'이었던 외조부가 설 땅은 없었을 것이다.
  
  모친은 안개 자욱한 어느 날 아침 보따리를 등에 매고 머리에 인 채 "큰아버지 말씀 잘 들어라. 곧 돌아온다"며 대문을 나서던 외조부와 외조모의 뒷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큰집 마당의 소달구지에 올라서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짙은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부모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봐야만 했던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얼마나 시리고 아팠을까.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부모 슬하를 떠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
  
  서울에서 자리 잡은 외조부로부터 연락이 왔던지 모친도 어느 새벽 보따리 짐을 챙겨 낯선 어른을 따라 남행길에 나섰다. 길잡이를 하는 청년을 따라 하룻길을 걸어 큰 강(한탄강이 아니었나 싶다)을 배로 건너니 작은 마을이 있고,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며 밥을 얻어먹고 강 건너에 도착해 해가 있는 방향으로 산속 숲길을 냅다 뛰었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초병의 총성이 울렸지만, 사격술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일부러 허공에 총질을 해댔는지,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8선 이남의 어느 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 영등포역에 내려 어느 사무실을 찾아가니 외조부가 모친을 보고 "왔구나" 하시더란다. 그날로 모친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그런 얼마 후 전쟁이 터졌다. 영등포 근처에 살던 외가는 피난길에 올랐다. 하루나 이틀을 걸었을까. 경기도 안양의 산골마을에 도착할 무렵 남침한 인민군이 피난민 행렬을 가로질러갔고, 외가는 그 마을 대갓집의 어느 골방을 얻어 피난살이를 하게 되었다. 모친의 기억으론 대갓집에는 하얀 모시한복을 곱게 차린 마나님과 가족이 살고 있었다. 마나님은 자기 집을 찾아온 피난민들을 거둬 먹이고 동네사람에게도 식량을 나눠주는 아주 인자한 분이었다.
  
  며칠 후 대갓집 정문 앞에 인민군 지프가 섰고, 청년 장교가 내렸다. 마나님이 그를 활짝 웃음으로 반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걸로 봐서 마나님의 아들처럼 보였다. 여덟 살이었던 모친의 눈에 청년 장교를 비롯한 인민군은 절도와 규율이 있었고, 이른바 '적(敵) 치하'였지만 점령군들에게서 어떠한 위협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청년 장교는 하루도 안 지나 떠났다.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무렵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모친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대갓집과 마나님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더라는 것이다. 미군과 국군이 인천을 휩쓸고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문이 돈 어느 날 삽과 낫, 곡괭이를 든 마을사람들이 대갓집으로 몰려왔다. 마나님 가족을 끌어내 마당에 팽개치고 집안의 기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그리고 '인민재판'이 시작됐다. 판사도 없고, 검사도 없고, 변호사도 없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여덟 살짜리 소녀는 피난민을 거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던 마나님 가족에게 들이닥친 생지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나님과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 살인마로 변해 노인을 때려죽이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는 봐선 안 된다며 필자의 외조모가 손으로 모친의 눈을 가렸다. 대갓집의 보살핌을 받았던 이들 가운데 아무도 말리려 나서지 않았다.
  
  미군-국군-중공군의 기억
  
  9ㆍ28 수복 후에 영등포 집으로 돌아와 외조부를 기다렸다고 모친이 말씀하는 걸로 봐선 외조부는 따로 피난길에 올랐던 모양이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아낙과 취학 전의 어린 남매가 가장이 돌아오지 않은 집을 지키는 일은 고역이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한 일감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난감한 문제는 국군과 미군과 우익청년대의 밤 행패를 피하는 일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외조모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의 문밖 출입을 막았다. 밤만 되면 국군과 미군이 민가에 침입해 여자를 욕보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란다. 대문을 발로 차고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미군과 국군 때문에 외조모에게 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겁에 질린 외조모는 방문걸이에 숟가락을 꽂아놓고선 곤히 자는 아이들을 꼬집어 울렸고, 영문 모르는 남매의 울음소리를 들은 침입자들은 뭐라 욕을 내뱉곤 사라지곤 했다.
  
  영등포에 주둔한 미군과 이탈리아 군의 군복을 빨아주면 군대 보급품과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아낙이 군부대를 기웃거릴 수 없어 털 복숭이 양코배기한테 군복을 받아오고 외조모가 빤 군복을 돌려주는 일은 어린 모친이 맡았다. 홀로 피난 갔다 돌아온 외조부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그러다가 1ㆍ4 후퇴를 해야 했던 모양이다.
  
  이번 피난길에도 아이들 때문에 걸음이 늦었는지, 중공군에 따라잡혀 피난민과 중공군이 같이 남쪽으로 걸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모친의 기억으론 중공군이 너무나 좋았다고 한다. 피난민들에게 해코지는 물론 성내거나 얼굴 부라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떤 중공군은 총도 없이 빈손으로 대열을 따라 묵묵히 남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피난민들에게 끼친 피해라고는 피난민의 이불 짐에서 흰 천을 떼 달라고 해 온몸에 두르는 것뿐이었다. 중공군은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장 무서워했다.
  
  물론 미군기의 폭격은 피난민에게도 공포 그 자체였다. 여름의 첫 피난 때인지 겨울의 두 번째 피난 때인지는 모르지만, 모친이 낀 피난민 행렬도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물론 피난행렬에 인민군이나 중공군은 한 명도 없었다. '쌕쌔기'(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제트기가 쌔액쌔액 거리면 날아간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쏘고 난리가 났다. 모친도 폭탄이 터지며 생긴 폭풍에 날아올라 어느 집 처마 밑에 코를 처박았다.
  
  미군기가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리며 소리가 잘 안 들렸다. 여덟 살 소녀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 보니 코를 처박은 집은 박살나 기둥만 남았고, 길 건너편에서 외조모가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더란다. 그런데 외조모는 물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람들이 폭격으로 흙먼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필자의 모친은 깔깔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충격으로 막혔던 귀가 뚫리니 외조모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이것아 어디 다친 데 없냐."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 땅에 바짝 엎드렸다고 한다. 물론 누구 하나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나라 군대가 제일 잘 해줬어?"
  
  영등포 외가의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새댁이 있었다. 전쟁이 나고 '인공' 치하가 되자 그 새댁이 완장을 차고 나타났다. 전쟁 전 새댁은 어린 모친의 눈에 똑똑하거나 잘 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모친이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니 완장을 찬 새댁의 얼굴 표정이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싶더란다.
  
  아무튼 새댁은 인민군이 도망갈 때 따라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모였기에 동네 친구들과 달려가 보니 새댁이 서북청년대의 지프차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맨땅바닥에 끌려 다니며 온몸이 터진 새댁을 끌고 서북청년대의 지프차는 청년대 사무소로 사라졌다. 사무소 자리가 지금의 영등포경찰서 자리 아닐까 싶다는 모친의 말로는 그 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져 있었고, 그 구덩이에 온갖 오물이 가득했던 모양이다. 얼마 후 총소리가 들렸고, 마을 어른들은 새댁이 죽으면서도 "김일성 장군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쑥덕댔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고, 외가의 직계가족 가운데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던 듯하다. 모친의 남동생이 죽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쟁의 학살과는 아무 상관없는 병 때문이었다. '반공'과 '반북' 아니면 모두 공산당으로 몰았던 이승만 독재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모친에게는 의문이 생겼다. 공산당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국군과 미군은 정의의 군대였다는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생기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6ㆍ25사변'에 관한 드라마도 그 일색이었다.
  
  경상도 시골에 살던 필자의 어린 시절 겨울방학이면 모친은 필자를 방바닥에 눕혀놓고 흰 달력을 깔아놓고선 참빗으로 이를 잡아주시곤 했다. "미군이 이 잡는 다고 DDT를 허옇게 뿌려대곤 했지"하면서 모친은 전쟁통에 자신이 몸소 겪었던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중공군, 규율과 군기가 반듯이 잡힌 인민군, '초코레토' 뿌려대며 여자들을 보면 군침 삼키던 미군,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워 설설 피하던 국군과 우익청년대, 빨랫감 맡기며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이탈리아 군…. 전쟁 때 모친의 나이였던 어린 필자는 물었다. "어느 나라 군대가 사람들에게 가장 잘해줬어요?" 모친의 말은 충격이었다. "당연히 중공군이었지."
  
  "어느 나라 군대가 가장 싫었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되돌아올 답이 '국군'임은 모친이 들려준 전쟁경험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임을 어린 필자도 알고 있었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
  
  작년에 고향집에 갔더니, 모친이 서울 외가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모친이 강원도 철원의 산골마을을 떠난 다음에도 모친의 큰집은 그곳에서 계속 살았고, 전쟁이 터졌어도 피난을 떠나진 않은 모양이다. 당시 십대이던 모친의 사촌오빠가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간 사이 미군기가 마을을 폭격했고, 생존자는 별로 없었다. 물론 모친 사촌오빠의 양친도 '불귀의 객'이 되었다.
  
  외가 모임에서 전쟁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촌오빠가 "북한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지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분의 사위가 북한에 양식도 주고 하여튼 남북이 화해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모친의 사촌오빠가 "인민군이 내 부모를 죽였는데, 내가 빨갱이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냐?"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듣다 못한 모친이 말했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미군 폭격으로 죽은 부모를 왜 인민군이 죽였다고 하느냐. 사실은 미군이 오빠 부모를 죽인 것 아니냐." 그 분은 말을 얼버무리더니 방을 나갔다고 한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을 밝혀내 풀리처상을 받은 <AP>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미군이 조직적으로 개입되었음을 또다시 밝혀냈다.
  
  경북 포항 해변에서 미해군 구축함 디해이븐호가 "목표물이 인민군이 아니라 피란민이라는 사실"을 알렸음에도 미군 지휘부는 포격명령을 내렸다. 디해이븐호는 오후 2시 19분부터 2시 30분까지 11분 동안 5인치 포를 15발 발사했고, 생존자 최일출 씨(75)는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바다는 핏물로 가득했다"고 전했다. 다른 목격자들은 "피해자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였다"고 말했다.
  
  <AP>가 확보한 비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1951년 1월 19일 미군기가 경북 예천의 산성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해 마을 주민 34명이 사망했다. 문서는 "(폭격으로 인한) 인민군 사상자는 없다"고 썼으며, 생존자들은 "인민군을 도운 적이 없으며 소개 경고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951년 1월 20일 단양 영춘의 곡계골 입구에 미군기가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이 폭격으로 동굴 속에 피신했던 민간인 300명이 질식해 사망했다. 미 전투기가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전에 미 정찰기가 이 지역 상공을 지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전쟁 초창기이던 1950년 8월 10일 미군과 미군기는 마산 곡안리에 있는 한 사찰로 피신하려던 민간인들을 향해 사격했다. 생존자들은 많은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83명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비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이 지역을 관할하던 미 보병 25사단 사령부는 전투지역에서 민간인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공식 시행되기 2주 전에 사격명령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1951년 1월 15일쯤 충남 아산 둔포 마을에 있는 창고에 피신해 있던 피란민들을 향해 미군기가 폭격을 가해 300명이 죽었다. 생존자들은 당시 피란민들이 추위를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미전투기는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모친이 들려준 전쟁 경험을 떠올렸다. 외조모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로 만들어 모친을 깔깔거리며 웃게 만든 폭격 작전을 실행한 조종사는 그날의 작전 일지에 뭐라고 썼을까. 모친 사촌오빠의 양친을 폭격해 살해한 미군기 조종사는 그날의 작전기록을 어떻게 남겼을까.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지나 '참여정부'에 도달한 대한민국 정부의 문서고(文書庫) 어디에 (지금의 영등포 경찰서 근처에 있었던) 시궁창 구덩이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생을 마감했다는 새댁의 기록이 남겨져 있을까. 안양 산골마을의 후덕한 마나님의 비극적인 죽음은 누가 기록해놓았을까.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역사의 기록물에는 실제 일어난 일의 만분지일도 담겨 있지 않는다는 점과 승리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할 뿐 패배자나 죽은 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난공불락의 반공체제는 우리 사회에 한국전쟁과 '빨갱이'에 대해 정신분열증을 강요해 왔다. 자신의 부모가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죽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빨갱이'가 죽였다고 주저 없이 말해 온 모친의 사촌오빠가 대표적인 예다. 비인간적인 반공체제라는 사회와 역사가 강요한 '정신병'을 앓아 온 셈이다.
  
  진정한 화해(와 마음의 치료)는 진실이 드러날 때 가능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저질러진 공산당의 만행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들어 왔다. 하지만, 그 만행의 상당수가 국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그게 부담스러운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우익과 미군을 감싸기에 급급해 온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는 정부의 과거사 진상규명을 사사건건 비난해 왔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온갖 만행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한국전쟁은 미국, 중국, 일본, 소련 등 20개가 넘는 나라들이 개입된 국제 전쟁이자 남북한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었다. 한반도 도처에서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나 정확히 몇 명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외조모는 필자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외조부는 1년 전에 사망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외조부는 고향땅 철원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말년에 고향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그때는 병이 너무 깊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땅이 바로 발밑에 내다뵈는 DMZ 전망대에 서는 걸로 마지막 생의 소망을 대신했다. 전쟁 당시 여덟 살 어린이였던 모친에게 이토록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데, 삽십대 한창 때 전쟁을 겪은 외조부가 담아 놓았을 이야기는 끝이 있었을까 싶다. 살아계실 때 미리 이야기를 들어놓지 않은 게 후회된다.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이법에 근거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해 활동하고 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미군당국이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AP> 기사를 읽으며 위원회의 왕성한 활동을 기원하는 게 필자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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